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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시리즈를 통해서 본 성동훈의 작품세계

하계훈

1. 성동훈의 작업실

주부의 성격이 부엌 살림살이의 상태에서 드러나듯이 작가의 작업실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성격이나 작업 스타일과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힌트를 얻어낼 수도 있다. 직업상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적지 않게 생기는 필자로서는 작가의 작업실을 찾는 것이 언제나 가벼운 설렘을 가져다준다. 마치 이성의 사생활 공간을 엿보는 듯한 악의적인 호기심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딱히 그런 종류의 호기심과는 좀 다른 기대감과 호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에 자리 잡은 성동훈의 작업실은 그의 작품의 스케일에 걸맞게 적당히 넓고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몇 해 전 작가가 작업 인부들을 데리고 직접 지었다는 그의 작업실은 살림집과 붙어있으며 내부의 통로로 이어져 있고 외부에서 별도로 접근할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작업실 바닥은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소품들과 작품제작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은 선반위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높은 천정 위로 무거운 작품을 운반할 수 있도록 도르래 운반 장치가 설치된 작업실은 작가가 주로 제작하는 작품의 무게를 짐작케 해주었으며 철물 위주의 재료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작은 철공소나 기계조립 창고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작업실 내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물 모티브들과 그 밖의 다른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 여러 가지 단계의 철근 구조물과, 시멘트를 결합시킨 완성 단계의 작품들이 놓여있고 바닥에는 문짝만한 철판에 작가가 무언가를 구상한 듯한 드로잉이 반쯤 그려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작업실 한 편에는 지난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 공연을 마친 배우처럼 전시장의 조명 아래서 본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약간 풀어진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는 듯이 놓여 있었다.

작업실 한 편에 놓인 휴식용 탁자와 의자 위에는 찻잔과 몇 권의 책과 작업 구상에 사용된 듯한 종이뭉치 등이 보이고 작은 스테레오 녹음기가 작업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놓여있었다. 작가는 작업 중에 음악을 즐겨 듣는 듯했다. 실제로 그의 집 거실에도 많은 음악 CD가 있었다. 그리고 작업실 밖에는 앞으로 작품에 사용할 재료인 철근과 철판, 그리고 고철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건너편 마당에는 석재 작업을 위한 작업장 천막과 각종 연마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동훈의 작업실에서 다른 작가들의 작업실과 달리 발견할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다만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작품 제작을 위한 재료를 미리미리 확보하여 보관한다거나 작업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무질서하게 방치하여 작업중에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없앤 점으로 보아 그의 짜임새 있는 작업태도와 계획적인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그가 필자에게 보여준 포트폴리오는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국내 뿐 아니라 외국의 조각 세미나나 아트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진 기록과 현지 언론의 보도 내용도 꼼꼼하게 수집되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진 상태로 정리되어 있었다.

작업의 특성상 성동훈의 작품은 작품이 설치되고 전시되는 현장에서 마무리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의 작업실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는 시도는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진지하고 계획성 있게 작업하며 자신의 작업 이력을 잘 관리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정돈되고 계획되어 있는 공간을 보고 작가에 대한 인상과 느낌이 달라졌다. 뚜렷한 근거없이 느낌에 기초했던 나의 선입견은 이어지는 작가와의 대화에서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2. 작가 성동훈의 성장과정

1967년 부산에서 태어난 성동훈은 작가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가계의 예술적 내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동물을 사랑하며 목장을 경영하는 소박하고 목가적인 꿈을 갖고 성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의 그의 작품에서 소나 말, 돼지, 닭 등의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과 그의 이러한 어릴 적 꿈을 연결시키는 것이 억지스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대학시절부터 그는 경기도 안성에서 생활하였으며 지금도 안성에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갖고 있다. 안성 지역은 일제시대였던 1930년대만 하더라도 교통의 요지로서 제법 발전을 하였고 잘 알려진 대로 안성유기(鍮器)라는 놋그릇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해방 후 6.25 전쟁을 겪고 나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어 교통과 물류의 중심 기능이 지방도로에서 고속도로로 전환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점차 낙후된 농업지역으로 전락해가게 되었다. 지금의 안성은 포도나 배 등의 과수산업과 농업 등이 지역의 주된 산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제적,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안성의 성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안성지역의 이러한 환경이 작가에게는 오히려 작품제작에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 모델들 가운데는 실제로 이 지역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 모티브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우리 동네 도깨비>, <농촌리> 등의 작품명에서 이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 도입되는 폐품 농기구의 부속이나 그 밖의 고물들도 부분적으로 이 지역의 산업적, 풍토적 특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몇 해 전에 한 미술교육 잡지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소개한 적이 있다. 우리가 지금 작가의 다부진 체형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중학교 시절 운동에 적성을 보이는,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예술적 기질과는 비교적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제작한 미술수업의 과제물로 인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깨닫고 작가로서의 먼 길에 첫발을 내딛게 된 셈이다. 당시 미술 선생님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그는 부산에서 예술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다시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1990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한국구상조각대전과 경인미술대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차지하면서 조각계의 주목을 받았던 성동훈은 같은 또래의 젊은 작가들 가운데 좀 일찍 미술계에서 자리를 굳힌 편이다. 그 당시까지도 우리 미술계가 가지고 있는 성장 시스템 안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과정이 각종 공모전을 통해서 입상하는 것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성동훈이 작가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정상적인 경로를 밟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로도 그는 1992년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린 화랑미술제와 경기도의 모란미술관에서 주최한 국제 조각심포지엄,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1994년 부산 국제야외조각 심포지엄, 1995년 성곡미술관의 야외조각 설치 프로그램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굵직한 행사에 참가하면서 어느 새 중견작가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그는 천안의 아라리오 갤러리 야외조각 공원, 청주시가 주최한 국제 환경아트 페스티벌, 공군사관학교 조각 심포지엄, 광주 휴먼 조각공원 프로젝트 등의 중요한 국내 행사뿐 아니라 일본 다찌가와시와 이화테의 국제 아트 페스티벌, 사라예보 국제 아트 페스티벌, 이탈리아 떼리촐라와 우디네의 국제 조각 심포지엄, 뮌헨 올림픽 공원 아트페스티벌, 네덜란드 위트렉트의 스튜디오 프로그램 등의 수많은 각종 외국 예술행사에 참가하면서 국제적인 작가로서 좀더 폭넓은 활동무대를 점진적으로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진행하오는 가운데 성동훈이 초기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들은 <돈키호테> 연작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문명사회와 인간성에 대한 풍자와 해학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도 돈키호테 기마상(엄밀히 말하면 소를 타고 있었으므로 기우(騎牛)상이라 해야겠지만)이었다. 이러한 주제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의 주제로서 이어진다. 인간성의 탐구와 풍자로서의 성동훈의 돈키호테 시리즈는 작업의 진화과정에서 본능 시리즈와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이어지는데 초기의 돈키호테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해학과 풍자정신은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대학 졸업 후 계속해 온 이러한 그의 작품이 주는 조형언어는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주제의 직설적인 표현은 작품의 제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작품에 제목을 부여함에 있어서도 작품과의 직접적인 연결 혹은 연상이 가능하게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구사한다. <무식한 소를 탄 동키>(1993), <닭을 탄 동키>(1993) 등 서술적인 제목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소박하고 솔직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이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정돈되고 있지만 기본적인 작가의 성격으로서의 직선적이고 솔직한 점은 변함이 없이 지속되어 왔다.

성동훈은 현재 국내에서 특정 화랑과 전속 성격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특별히 어떠한 작가들의 협회에 가입된 상태도 아니다. 그는 단순히 안성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비슷한 작업 스타일을 갖고 있는 작가들과 비공식적인 유대를 맺고 있으며 일년 중 몇 차례의 외국 예술행사에 참여하면서 형성된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3. 성동훈의 작품세계의 특징과 배경

성동훈을 가리킬 때 동원되는 주된 단어들은 ‘묵묵’, ‘뚝심’, ‘배짱’ 등인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는 말없이 작업에 몰두하면서 작품의 완성을 통해 자신감을 키워가는 형의 작가다. 성동훈이라는 작가에 대한 믿음은 무엇보다도 그가 묵묵하고 꾸준히 진행해가는 작업의 양과 거기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작품성에서 비롯된다. 가끔 작업태도에 있어서 뚝심과 배짱으로 밀어붙인다는 표현이 무계획적이고 저돌적이라는 느낌을 자아낼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하루를 모두 작업에 쏟아부으면서 작품제작과정을 몇 단계로 분할하고 단계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조절하며 적절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재충전함으로써 효율적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 작업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일단 작업에 돌입하면 그는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작업에 몰입하려고 노력한다.

조각가로서의 성동훈은 무엇보다도 재료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가 특별히 기피하는 재료는 따로 없지만 작가가 주로 다루는 재료는 고철과 폐품 기계의 다양한 부속들, 그리고 시멘트 종류 등이다. 그는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재료의 특성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가 고교시절부터 실기 위주의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의 감각에 의해 작품에 도입되는 재료들은 그 자체로서 하찮은 돌덩어리 혹은 고철의 파편이나 기계의 부속품이지만 일단 그것들이 그의 작품 속에 흡수되고 나면 그 안에서 생명의 근원인 인간과 동물 신체의 중요한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주제를 부각시켜주는 소품의 일부가 되어 전체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말하자면 작가의 상상력과 눈썰미와 손재주에 의해서 폐기처분된 물건에 새로운 생명이 부여되는 것이다. 폐품을 있는 그대로의 폐품으로 제시하면서 사회 고발적 주제나 환경보호의 메시지를 다루는 작가들이 보여주는 부정적이고 고발적인 태도와는 달리 그는 폐기된 재료의 기능과 역할, 용도를 살려내는 긍정적이고 생명창조적인 작업태도를 통해 인간과 현대사회의 치부를 밉지 않게 해학적으로 꼬집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동훈은 자신이 작품의 재료에 대한 특별한 선호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재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시멘트 종류로서 그는 10여 종류의 다양한 특수 시멘트에 대한 특성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1995년에 개최된 미술재료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그는 주로 건축이나 산업용 재료로 인식되어 있는 시멘트의 예술적 재료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토대로 하여 자세하게 분석, 발표한 적도 있었다. 발표문에서 그는 시멘트를 통하여 투박스러운 재질감과 무게감을 표현하며 이를 통해서 문명에 대한 풍자적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사실 시멘트는 서양에서 이미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석회와 화산재 등을 물과 혼합하여 서서히 굳게 만듦으로써 중요한 건축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근대에 와서는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주된 건축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는 건축 재료로서의 특허까지 획득하게 되는 중요한 건축 산업용 재료이다. 우리가 흔히 현대 도시의 비정성(非情性)을 표현하기 위하여 도심의 모습을 ‘콘크리트의 숲’이라 말할 때의 콘크리트는 시멘트에 자갈과 모래를 섞은 혼합물이며 건축 현장에서는 철근으로 뼈대를 세운 구조물에 이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 공간의 기본적인 틀을 구축해간다.

이처럼 작가 성동훈이 다루고 있는 재료인 시멘트는 미술재료로서보다는 건축 재료로서 수 천 년 동안 사용되어온 물질로서 정통적 구상조각에서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 않는 재료다. 다만 추상 조각 작품에서 가끔 공간의 중량감과 볼륨을 암시하거나 개념적 물질성을 표시하는 방법으로서 드물게 콘크리트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성동훈처럼 구상조각을 통해 인체와 동물의 신체적 표현을 시도하는 재료로서 본격적으로 시멘트를 도입한 작가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 미술에서도 그 예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점은 작품 재료에 대한 그의 모험적 개척정신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으며, 비록 구상조각대전을 통해 미술계에 등장하긴 했지만 전통적인 구상조각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일반적인 재료들과의 차별을 자처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우리의 구상조각 가운데 상당부분이 보여주는 구태의연한 무기력함과 무개성적 자기번식을 질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대상을 수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의 작가로서의 태생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구상조각가들의 모임을 탈퇴하였었다.

시멘트를 비롯하여 그가 다루는 재료는 무겁고 거칠고 오랜 시간의 용접과 절단, 그리고 연마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성동훈은 이러한 작업을 묵묵하게 진행해 나아가면서 작업과정에서 자신이 다루는 재료와의 무언의 겨루기를 해나간다. 자신이 다루는 재료를 정복하지 못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적인 면에서 보면 작품의 창작과정은 작가와 재료의 기싸움같은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그는 긴 작업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다루는 재료를 정복하고 다스림으로써 그것을 적절한 위치에서 적절한 모습으로 제 기능을 하도록 배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나 오페라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그는 우리들의 눈과 감각이 새롭게 깨어나게 만든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때로는 충격적으로, 또 때로는 해학적으로 발견하게 되며 마침내 작가의 재치와 해학에 감탄사를 보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하찮은 쇳조각과 나무, 돌 등을 의미있는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나 우리들에게 미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마술사와 같은 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방식은 계획적이기보다는 작업 진척과정에서 재료와의 접촉을 통하여 순간순간 발전되는 즉흥적 표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거의 완벽한 스케치나 마케트를 준비하지 않는 편이며 마치 재즈 음악을 연주하듯이 기본적인 틀 안에서 즉흥적이고 자유롭게 변주를 구사하면서 작품의 완성으로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작업 스타일이 대부분의 구상조각 작가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구상조각회를 탈퇴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개념주의적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매체에 대한 논리의 우월적 지위와 다르게 성동훈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물질적 특성에 충실하며 작가 자신도 말보다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 아이디어에 대해 이모저모를 물어보아도 그는 논리정연하기보다는 어눌하게 답할 뿐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가 작품의 재료를 주무르며 자신의 가슴 속에서 떠오르는 조형의지를 상상 속에서 펼쳐나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에 대한 그의 설명은 솔직하고 소박하므로 듣는 이들이 긴장감 없이 그의 작품에 다가가도록 만들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풀어놓음으로써 작품에 대한 친근성과 작가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에는 가식이나 과장, 현학적 위선 등을 찾아볼 수 없고 소박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짚어낸다.


4. 돈키호테를 통해서 본 성동훈의 작품세계의 전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동훈은 돈키호테 시리즈라는 비교적 일반인들에게 낯익고 익살스러움도 느낄 수 있는 주제의 구상조각 작품을 통해 1990년대 초에 미술계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돈키호테는 17세기 초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쓴 공상적 희극 소설로서 당시 유행하던 기사문학의 돌연변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돈키호테는 전,후 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605년 전편의 초판 출판 이후 현재까지 수 백 년 동안 스페인은 물론 유럽과 전세계의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소설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소설 속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를 중세의 기사라고 착각하면서 산초 판자를 시종으로 거느리고 늙은 말 로시난테를 타고 세상을 주유한다. 그 과정에서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대결을 벌이는 등 각종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준 돈키호테는 마침내 그의 환상을 치유하기위해 나선 청년 그라스코에 의해 엉터리 순례를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정신을 차리면서 세상을 떠난다.
성동훈의 작품에서는 주로 돈키호테가 타던 늙은 말 로시난테와 주인공 돈키호테가 여러 가지 기계 부속품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우스꽝스런 모습의 기마상으로 표현되거나 그들이 극단적인 속도로 수직하강 하면서 추락하거나 맥없이 고꾸라지듯이 넘어지는 순간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여기서 주제가 약간 변형되어 말 대신 소를 타거나 심지어 돈키호테가 스케일이 왜곡된 닭을 타는 모습 등, 보는 이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비록 17세기 서양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작품의 제목과 소재로 채택하고 있지만 성동훈이 돈키호테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 백 년 전 서양의 기사들의 연애무용담(戀愛武勇譚)이나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런 행동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돈키호테형의 인간성이 우리시대의 사회에서 겪는 부적응과 광기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그러한 인간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작가가 우리들에게 내미는 거울과 같은 도구일 수도 있으며, 또는 사회에서 혹은 좀 더 작게는 예술계에서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의기충천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의 내부에 잠재된 욕망의 표현을 희화적으로 선동하기 위한 메시지를 풍자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돈키호테주의(Quixotism)라는 단어가 있다. ‘공상적 행위’라고도 번역되는 이 말은 돈키호테와 같은 성격이나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 환상에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비현실적인 인간성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사실 우리 역사의 선구자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미래의 세계를 꿈꾸며 현실엣 수용되기 쉽지 않은 미래지향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는 전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상적 현실, 즉 일종의 이상을 추구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돈키호테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발명왕 에디슨의 기행이나, 하느님의 명령으로 전쟁에 나아간다는 잔 다르크 등의 신들린 듯한 행동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당대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들의 기행이 결과적으로 자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돈키호테적 사고와 행동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세르반테스가 소설 돈키호테를 쓴 까닭은 당시에 양산되던 기사연애담의 내용들이 너무 허황하고 실제 생활과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학적 서술에 있어서 문학상의 기본적인 원칙마저도 무너뜨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돈키호테라는 기상천외한 기사 지망생을 등장시킴으로써 강력하게 반기를 들고 풍자의 펜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 성동훈이 조각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사회와 미술계에 돈키호테를 등장시키는 것에서 우리는 그가 우리 사회와 미술계의 기본적인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기 위한 의도였다는 유추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가 미술대전 등에서 대상을 받았던 1990년대 초의 미술계는 70년대와 8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민중미술의 이념적 지향성이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중심 해체적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이기보다는 실험적이고 현실 극복적인 미술이 다채롭게 모색되던 시기였다. 조각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형태와 볼륨 위주의 조각에서 공간을 재단한다거나 매체보다는 개념이 전면에 배치된다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매체와 테크놀로지의 도입 등으로 조각의 개념이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성동훈은 이러한 시류에 적당히 영합하여 작품 활동의 주류에 편입되면서 편안한 항해를 하기에는 너무 개성과 자기고집이 강한 작가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집과 개성이 그의 예술적 체질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작가로서의 생명을 잘 유지하게 해준 셈이다. 말하자면 그는 돈키호테 연작을 통해 실험성의 이름으로 난립하는 조각에서의 난맥상을 꼬집으면서 자신이 뚝심을 가지고 조각의 정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돈키호테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가하고 달려들은 것처럼 성동훈도 미술계에서 시대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돌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돈키호테를 통하여 우리는 인간성의 부정적인 면을 조롱하고 고발하는 일종의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돈키호테를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게 만듦으로써 인간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인간애의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해주었듯이 성동훈 역시 그의 돈키호테가 우리 예술계 혹은 우리사회 전반에 대한 풍자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예술계와 나아가 사회 전체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예술적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견지하도록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성동훈의 작품이 실험성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을 충실히 반영하는 성격의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선 그가 다루는 재료가 그렇고 그 재료들이 조합되는 방식이 그러하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조형요소의 비례와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지극히 바로크적인 역동성이 자아내는 과장된 동세 등이 그렇다. 성동훈의 작품이 고전적 아카데미즘의 작품들과 차별된다는 점은 역대 미술대전 조각부분의 수상자들의 작품들을 그의 작품과 비교 해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동훈의 직선적이고 때때로 도발적인 작품은 자기 외부의 세계의 문제에 대한 대항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 개인의 사적 감정세계에 잠재된 욕구불만의 표출로 해석되기도 한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감정상태를 표현하고 작품제작 과정을 통해 자기인식과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작품을 통해 솔직하게 반영된다면 그 작품에서 드러나는 설득력은 상당한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동훈의 작품은 이러한 설득력을 바탕으로 관람객들과 공감하며 그들을 감동시키고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 1990년대 중반까지의 성동훈의 작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고 감상될 수 있을 것이다.


5. 본능을 통해 드러나는 가학성과 자연을 통한 치유

1994년에 개최한 그의 세 번째 개인전에서 성동훈은 이례적으로 도록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고 논리정연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작품구상과 주제설정의 과정 그리고 흔히 여기에 개입되는 일체의 사상을 엄격히 배제시키고 되도록이면 생각에 몰두하지 않고 철저하게 본능에 입각하여 작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말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본능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연스런 사고의 흐름으로 파악한 것으로서 여기서도 그가 아카데미즘적인 것과 동행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와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며 본능을 표출하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말은 자신의 작품을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하려는 의도에 대한 거부이며 저항일 수도 있다. 생각하지 않고 손과 발을 움직여 한참을 작업하여 드러나는 작품을 대하는 희열은 작가의 말처럼 ‘고단백질의 본능을 획득하는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작업의 결과가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어서 내일이면 완성될 자신의 작품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전위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자신들이 완성시켜가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과는 사뭇 다른 것일 수 있다. 여기에다 작가는 완성된 작품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나에게 맡겨달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이렇게 작가의 책임 아래 탄생되어 온 작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성동훈의 작품은 작가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조금씩 변화를 일으켜간다. 돈키호테 시리즈와의 지나치게 긴 동반에서 오는 예술적 권태 때문인지 작가의 말처럼 생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본능의 무의식적 행로의 자연스런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돈키호테도 초기의 해학성에서 점차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가학적인 공포나 혹은 보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표정과 동작으로 바뀌어 간다. 어느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1994년 작 <돈키호테-極>과 같은 작품에서는 과거 성동훈이 제작했던 돈키호테와는 사뭇 다른 형식이 등장한다. 1993년에 제작한 <닭을 탄 동키>와 같은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이제까지의 말을 탄 인물의 표정이 다소 우스꽝스럽고 우둔해 보이는 모습이었던 것에 비하여 이 작품에 이르러서는 기마상의 인물이 마치 악령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칼을 휘두르는 돈키호테의 얼굴에서 우리는 더 이상 희극적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령과 같은 모습을 발견한다. 같은 해에 제작된 <무식한 소-極>에서도 이전의 소나 말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얼굴과 몸통에 여러 개의 창(과 같은 물체)에 찔린 모습으로 뒷다리를 접고 내려앉아 초점 없는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보는 힘없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굴과 목 부분에 집중적으로 창을 맞은 소는 앞다리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나는 가엾은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소를 두 겹의 철판으로 된 원형 탁자에 올려놓은 것은 폭력에 의한 소의 희생적 제물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조해준다. 이 무렵의 성동훈은 초기의 돈키호테 시리즈에서 주로 다루던 풍자와 해학으로부터 멀어져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폭력과 희생, 죽음과 같은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듯하다. 그것이 어떤 개인적인 동기였든지 아니면 작가가 인간의 본능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잔인성과 폭력성을 대표적인 속성으로 끄집어내어 작품을 통해 일종의 인간성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에 이러한 속성들이 점차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이러한 삶의 네가티브한 속성에 점차 몰두해가고 이어서 제작되는 <제물>(1997년) 등의 작품에서는 해학성과 함께 일종의 가학적인 성격도 조금씩 발견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비록 크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공포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제작을 통해 관람자가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잔인성에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가학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논리에 따르자면 본능에 의해 표출되는 인간성의 기저에는 이와 같은 혐오스럽고 가학적인 성품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인가? 어쨌든 이 무렵의 성동훈의 작품에서는 공격성과 가학성이 이전보다 비교적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가 돈키호테 시리즈를 통해 처음부터 추구하던 해학성과 이러한 가학성이 결합하여 그로테스크한 해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97년경 그는 이러한 성격의 작품들과 함께 재료를 통한 몇 가지 실험적 작업을 실시한다. 예를 들어 1997년의 <옥황상제의 오른팔>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전의 돈키호테의 모티브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형상에 색채를 도입해보기도 하고 같은 해의 작품 <나의 본능 I>에서는 상이한 요소들의 병치와 거기서 나오는 새로운 효과를 탐구하는 현대적인 디스플레이 기법을 시도해보기도 하며, <공상 II>와 같은 작품에서는 키네틱 아트에서처럼 기존의 기마인물상 모티브를 전기모터와 결합하여 작품에 움직임을 도입해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돈키호테 시리즈가 제작되긴 하지만 <내가 돈키호테인가>(1997)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전의 돈키호테의 기마상에서 볼 수 있었던 재치와 해학, 그리고 형식상의 박진감과 운동성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 무렵 성동훈은 야외에서 개최되는 환경미술 페스티벌이나 환경과 관련된 국내,외의 아트 캠프에 여러 차례 참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자연과 환경에 관심을 두게 되고 주로 자연의 재료를 이용하여 <땅속으로 물이 들어왔다>(1998), <물속에서 9개의 돌탑을 쌓다>(1998), <풀속까지 계단을 만들다>(1999)와 같은 장소 특정적이고 자연환경에 관련된 작품을 여러 점 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관심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이전의 작품에서 보였던 공격성이나 가학성을 누그러뜨려주었으며 돈키호테 시리즈의 형식과 주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작가에게 넓은 야외에 펼쳐진 자연이라는 새로운 작업환경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작가의 본능에 따라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에서 드러난 그로테스크한 풍자의 성격은 자칫 작가의 작품세계를 가학적이고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동훈은 때마침 접하게 되는 야외 조각의 무대를 경험하면서 자연과 환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고 좀더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대해 순응할 줄 아는 낭만적 사색의 기회를 제공받았다. 말하자면 본능에 의한 가학성이 자연을 통하여 치유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성동훈은 7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지속적으로 국내,외의 유명한 조각 심포지엄이나 환경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작업 성향이 야외의 자연에 더 어울리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실내의 작품 전시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니며, 작가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어떠한 재료를 사용하든, 어떠한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든 성동훈은 매우 의욕적이고 자신감 있게 응할 자세를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욕과 자신감을 우리가 뚝심이나 배짱이라고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성동훈의 작업에 대한 적극성은 1998년 청주시에서 개최한 제 4회 대청호 국제환경미술 심포지엄이나 1999년 안성시에서 개최한 국제 로드사이드조각 심포지엄에서 그가 큐레이터 또는 커미셔너의 역할을 해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그는 IHATOV-한, 일 아트페스티벌, 국제 친환경미술전 등의 프로그램에서 매니저나 기획추진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2000년에는 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에서 장애인을 위한 워크숍에 참가하기도 하고 베트남 평화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나 독일 뮨헨의 장애인을 위한 기금 마련전시에 출품하는 등 사회봉사적 성격의 활동에서도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그는 또 건축 관계법에서 시행하고 있는 건축물 장식 혹은 공공미술이라고 불리는 작업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작가는 아파트 단지나 대형 할인매장의 건축물과 어울리는 야외 조형물을 필요성과 예술성을 잘 인식하고서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며 이러한 작업으로 인해 예술적 감각이나 상상력이 손상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별로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가 경기도 병점의 아파트 단지 내에 설치한 작품이나 부산의 대형 할인매장에 설치한 작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건축물 장식 조형물과는 상당히 다른 예술성과 장소특정적 효과를 나타내준다.


6. 다시 돈키호테의 해학성으로

1997년 포스코 갤러리에서 제 5회 개인전을 열고, 같은 해에 다시 사비나 갤러리에서 여섯 번째 개인전을 가지면서 성동훈은 잠시 놓아두었던 이전의 해학과 유머를 다시 회복한 듯하다. 계산되지 않은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력에 의한 작업방식을 장점으로 갖고 있는 성동훈은 성실한 노동력이 바탕이 되는 꾸준한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부조리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간성의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측면을 표현하였는데 이번에는 이전보다 좀 더 다양한 작품들이 시도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전국의 폐품 수집소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여러 가지 기계부품과 금속조각 등을 시멘트와 결합하여 예전과 같은 해학적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동훈은 이 시기에 작품에 색채를 도입하는 문제, 모터를 이용한 작품의 운동성을 통한 해학성의 극대화, 남성과 여성의 성기나 그것에 대한 암기적 표현을 통한 성적 유머 등의 다양한 방법을 실험해보고 있었다. 출품작 가운데 특히 <일심-철팬티>라는 작품은 체온을 감지하는 센서를 이용하여 전시장에서 관람자가 일정한 거리 안으로 접근하면 팬티가 열리고, 버려진 전력공사의 변압기 부품으로 만든 남근형상이 앞으로 밀려나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작품화하여 현대사회에서 남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리사회의 병적인 세태를 희화적으로 꼬집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작품의 시도와 함께 한편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돈키호테 기마상도 2000년 전라남도 광주의 상무조각공원과 2001년 경기도 광주의 세계 도자엑스포 조각공원 등에 지속적으로 설치되어 왔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초기의 돈키호테 기마상에 비하여 인물이 보다 생략되고 추상화 되었으며 그가 타고 있는 동물의 신체도 일부 생략됨으로써 작가가 전체적으로 이전보다 간결해진 조형 어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구조물의 끝부분이나 활모양으로 굽은 철제 받침대 위에 놓인 동물과 인물의 불안정한 동작의 긴장감과 그들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건들의 정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스꽝스러움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관람자의 즐거움은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받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01년 사비나 갤러리에서 개최한 7번째 개인전에서는 그의 이러한 해학성이 장난기 섞인 성적인 유머와 결합하여 관람자들을 더욱 즐겁게 해주었으며 주제의 전달을 더욱 심화시켜주었다.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불편한 주제를 소파나 테이블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가구들로 표현하면서 남녀의 성기를 직설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작가는 성(性)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금기와 파기, 규제와 일탈, 힘과 권력에 의한 남용 등을 비교적 거부감 없이 이야기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입장에서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성동훈의 작품은 새로운 발상을 가미하여 10여 년간의 그의 작업을 종합하는 성격을 갖는다. 처음에 그가 현대사회와 그 사회 속의 각 부분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한 관찰로부터 주제를 선택하여 작품을 제작해왔다면 이제는 그 관심의 범위를 좀 더 농축시켜 인간 본성의 문제를 성을 둘러싼 사회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삶의 현상을 풍자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출품작 가운데 <소파>는 철과 가죽, 그리고 특수 시멘트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소파 등받이 뒤로 대칭을 이루며 굽어진 시멘트 구조물의 형상은 초창기의 성동훈의 작품에 등장했던 동물 형상들을 상기시켜준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두 마리의 수소가 서로 마주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동물의 움직임을 통해 암시하는 공격적 혹은 역동적 남성성과 가죽 소파 부분의 움푹한 함몰과 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드러운 가죽의 촉감을 통해 여성의 자궁을 암시하는 성적인 암시가 동시에 결합된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시 작품집 속의 사진에는 이 소파 위로 철제 속옷을 입은 여성 모델이 도전적인 반라의 자세와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도 주제의 특성을 한층 강화시켜주며 성동훈 작품의 투박한 맛보다는 패션잡지와 같은 정돈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들은 성동훈이 이제까지 즐겨 사용해오던 재료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제작되고 있지만 깔끔한 용접과 접합처리, 좌우 대칭의 구조나 이에 준하는 균형감을 표현하면서 개별적 작품마다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작가의 작품이 좀 더 성숙하고 세련된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초기의 작품에서 흔히 보았던 서술적인 제목들이 <빛>, <유혹>, <선물>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간결하고 추상적인 제목으로 바뀌는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야외 조각공원이나 공공미술관 전시와 다르게 상업화랑을 전시공간으로 이용한 전시이므로 작품의 예술성과 함께 상품성을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성동훈의 이전 작품에 비하여 거칠고 투박한 맛이 상당히 감소되었다. 거칠고 투박한 느낌에서 오는 매력은 주로 시멘트를 이용한 물체의 표현에서 잘 드러났는데, 이 때문인지 시멘트의 사용도 적어졌으며 시멘트를 사용할 경우에도 입자가 거친 일반시멘트가 아니라 특수시멘트를 이용한 까닭에 그 질감이 매우 부드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성동훈의 작품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최근의 작품에도 초기의 돈키호테 시리즈를 통해 표현되었던 세태 풍자의 해학성과 패러디의 성격이 여전히 유효하게 함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돈키호테주의에 대한 해석을 한국적 시각으로 재해석 하여 돈키호테 기마상이라는 풍자적이고 장난기를 가미한 조형을 오랫동안 제시해오고 이것이 인류 보편적 공감을 받으면서 관람객의 찬사를 얻어냈던 정신은 근래의 작가의 성적 패러디 작품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나는 무식한 게 좋다”는 다분히 도발적인 말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말을 앞세우는 위선적 작가와는 달리 여전히 우리 미술계의 현상과 미래를 격려와 염려의 마음으로 관심 깊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수행해가고 있다. 성동훈이 오늘날까지 작가로서 당당히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일관된 태도를 지닌 고집스런 뚝심과 이를 뒷받침해준 성실한 육체노동으로서의 작업량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동훈은 너무 일찍 미술계의 전면으로 부상한 까닭에 이제까지의 작업의 양과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 그는 국내 조각계를 두루 섭렵하고 자신의 활동무대를 국외로 돌려 유럽, 미주, 아시아 등 가히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각종 야외조각 행사를 통해 자연환경의 소중함도 체험하였고 우리 사회에서 소수이고 약자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원조에도 자신의 재능을 베풀어왔다. 최근에 그는 독일의 한 아동보호 시설의 정원에 돌을 이용한 설치작품을 완성시키고 돌아왔는데 아동들의 눈높이에 맞게 작품들을 낮게 설치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공룡 모티브나 그 밖의 친숙한 모티브를 도입하기도 했다.

우리는 작가로서 뿐 아니라 예술 행사의 진행자로서 활동해오면서 예술가를 둘러싼 국가 정책이나 국민들의 예술체험 환경의 중요성도 깨닫고 있는 성동훈의 예술세계가 국내,외의 각종 예술행사 경험에 의해 좀 더 알차고 건강해질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다. 한 작가의 예술적 인생의 항해에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관된 주제를 채택하고 이 주제를 실현하기 위한 표현에 있어서 다양한 재료를 다루며 세계를 두루 섭렵해 온 성동훈이 이제부터 어떠한 변화의 길을 가게 될지 앞으로 관심 깊게 지켜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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