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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헌

하계훈

강정헌은 주로 아쿠아틴트(Aquatint) 기법을 이용하여 판화작업을 해오고 있다. 동판화의 한 종류인 아쿠아틴트 기법은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즐겨 사용한 표현기법으로서, 부식 방지 물질이 동판 표면에 적용되는 상태에 따라서 미묘한 표면 상태를 구성함으로써 수채화와 같은 부드러운 화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에서 물을 뜻하는 ‘aqua라는 접두사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판화 가운데 목판화가 미술의 한 장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을 8세기경으로, 동판화가 등장하는 것은 15세기경으로 생각하고 있다. 동양에서도 불교 경전의 제작과 같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일찍이 목판화가 이용되었지만 펜에 잉크를 묻혀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온 서양인들에 비하여 붓을 사용하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온 동양권에서는 동판화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늦게 대두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에 대한 전기를 저술한 조르지오 바자리는 이탈리아의 금속세공사였던 마소 피니게라(Maso Finiguerra)를 최초의 동판화 제작자로 보고 있다. 그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많은 작가들이 목판화나 동판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우리에게 낯익은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 고야, 로트렉, 르동 등과 같은 작가들도 목판화와 동판화를 즐겨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판이나 아연판을 부식시킨 뒤 잉크를 바르고 종이를 압착하여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아쿠아틴트 판화는 부식의 정도 차이에서 오는 화면의 톤을 조절하고 에칭이나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응용하여 화면에 다채로운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강정헌은 이러한 아쿠아틴트 기법의 특성을 살려 한 화면 안에서 10여 단계 이상의 상이한 톤을 조절하며 단색이지만 조형성이 풍부한 화면을 구성해오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경우 아쿠아틴트는 단색으로 제작되므로 화면에서 미세한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명암과 톤의 조절이나 미세한 선의 표현 등으로 제한되는데 강정헌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테크닉과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적절하게 적용되어 사진의 맛과 회화의 맛을 효과적으로 절충하는 판화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강정헌은 여러 가지 시각적 표현 매체 가운데 판화만큼 작가의 노력과 땀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판화를 영화 필름에 비유하며 아날로그적인 손의 흔적과 시간의 축적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판화 작업에서 강정헌은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서적이고 개념적인 측면을 함께 전달하여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동판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강정헌은 판화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사진이미지를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는 화면에서 10 차례 넘게 판을 부식시키면서 형성되는 표면의 거친 정도와 화면의 밀도, 부식 방지액의 사용에 따라 형성되는 명암의 콘트라스트 등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가 다루는 소재는 여러 차례의 부식을 거치면서 사진이나 회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작가가 흑색이나 갈색 잉크 한 가지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탄생되는 작품의 화면은 빛바랜 흑백사진의 느낌을 주며 의도적으로 스크래치를 가한 표면의 거친 효과들은 작가가 도입한 이미지를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준다.

지난 몇 년간 강정헌이 관심을 가져 온 주제는 화면의 구성상 마이크로크즘(microcosm)과 매크로코즘(macrocosm)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이크로코즘은 일상의 우연한 조우에서 촉발되는 단상들을 표현한 정물화 형식의 작품들로 나타나며 매크로코즘은 주로 뉴욕이나 도쿄, 서울과 같은 거대한 도시의 풍경들을 부감법적으로 바라보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마이크로코즘의 작품들은 대부분 정물화 형식을 띤다. 창가에 놓아 둔 수생식물을 담은 그릇이나 낡은 시계, 빈 술병 등 작가의 생활 주변에서 발견되는 평범한 소품들은 딱히 수선스런 미화작업을 거치지 않더라도 작가의 손에 의해 인생의 의미와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거대담론의 단초로서 화면에 등장한다. 작가는 여기에 대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낀 소감과 상념을 글로 표현하여 작품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사적 영역을 좀 더 공개적으로 우리들에게 드러내주는데 이러한 작가의 소통방식 때문에 강정헌의 작품은 관람자가 작가와의 교감에 있어서 보다 빠른 시간 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밀감을 높일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된다.

작가 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강정헌은 그림을 또 다른 언어로서 간주한다. 작가에 의하면 그림이라는 언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며 소통의 결과로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매체인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상황을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립된 것으로 보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여 따뜻하고 즐거운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역할이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잔잔한 소품이 화면에 가득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시각적 언어로 성공적으로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매크로코즘의 작품에서도 작가가 관심을 갖는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정물화 작품에 비하여 좀 더 현실 비판적이고 그러한 사고와 상념을 촉발하는 대상이 주로 풍경화 형식으로 화면에 도입된다는 것이 그의 정물화 작품들과 차별된다고 볼 수 있다. 과잉(overflow)을 키워드로 제작한 거대 도시의 풍경 연작들 역시 주로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제작되는데 작품들은 아쿠아틴트 기법과 주제의 표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사진이 보여주는 사실주의보다 더 사실적으로 깊이 있게 다가온다. 강정헌이 바라보는 도시에는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건물들의 융기와 지붕과 옥상의 무질서한 방치, 그리고 그 건물들 사이에 어지럽게 얽혀있는 골목길 풍경이 도시를 과잉으로 넘쳐나게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풍경에서 넘쳐나면서도 삭막하고 메마른 도시의 명암을 지적하며, 그 안에서 발견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져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의 결핍을 아쉬워한다.

강정헌은 주변의 일상 풍경들을 사진으로 찍고, 그렇게 채집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판화작업을 한다. 사진으로 찍은 도시의 모습은 한 화면 안에서 중첩되고 삭제되며 편집되기도 한다. 어느 지역의 언덕이나 고층 건물에서 바라본 주택들이 형성하는 수없이 많은 지붕들, 골목길,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량과 그로부터 퍼져나오는 소음, 엄청난 규모로 한꺼번에 높이 솟아 올라가는 공사현장, 이렇게 강정헌은 대도시의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을 화면에 도입한다.

최근 작가는 동판화 작업이 이루어진 화면 위에 채색을 가하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이것은 판화가 갖는 단색의 제약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유효할 수 있으며 본격적인 채색 회화와 달리 사실적 묘사에 치중하기 보다는 화면의 표현성을 높이는 구성 방식의 확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판화와 채색의 과정은 기계와 사람의 손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이미지를 완성시킴으로써 판화의 조형적 효과를 높여주기도 하지만 현대적인 이미지의 범람에 의해 마비되어가는 관람자의 서정적인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도구로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강정헌이 관심을 갖는 주제인 삶의 진실과 일상의 공간에서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내용은 이제까지 미술과 문학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중복되어 다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헌의 동판화를 통해 관람자가 느끼는 서정적인 공감대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솔직하고 진실되게 대상을 바라보고 그로부터 지극히 평범하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와 정서를 성공적으로 끌어내고 있고, 그렇게 끌어낸 주제를 동판화의 한 종류인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완성도 높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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