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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선 / 사물들의 이면에 내재된 서정적 의미의 탐구

하계훈

윤정선의 그림에는 개인적 경험과 추억이 짙게 담겨있다. 그녀는 자신이 체류한 장소의 이곳 저곳을 세심히 관찰하며 기억을 주워 담듯이 영상을 채집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 유학시절의 기억은 파스텔 톤의 아크릴화로 조목조목 기록되었고, 그 그림들 하나하나에는 작가와 주변인들이 그곳에서 공유한 추억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기에 작가의 설명이 약간 더해지면 평범해 보이던 화면에서는 그녀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실타래 풀리듯이 술술 풀려나오게 된다. 이렇게 감수성 풍부한 그녀의 시각적 기억채집의 노고는 2005년도에 석남미술상 수상이라는 낭보로 이어졌었다.

지금 중국에 머무르며 작업해오고 있는 윤정선이 이번 전시(금호미술관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들 역시 이러한 기억채집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면서도 우리가 그리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중국을 좀 더 알고 싶어서 작년 말부터 북경에 머무르면서 작업해오고 있다. 그녀에게는 끝없이 지적(知的) 혹은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노마드(nomad)의 모험적 기질이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업 장소의 이동은 곧 작가의 시각적 경험의 확산을 의미하며 새로운 장소에서 그녀에게는 작가 특유의 감정이입과 의미발견의 기제가 발동한다. 영화의 주무대였던 북경의 자금성에서 그녀는 비운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흔적을 추적하기도 하고 그가 썼던 안경을 그리며 영화를 매개로 자신과 인연을 맺게 된 중국 황제의 추억을 채집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거대한 역사의 현장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스펙터클한 장면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골목에 걸린 등 하나, 고궁의 담장을 배경으로 늘어진 한 줄기의 나뭇가지, 붉은 페인트가 떨어져나간 문설주 등 사소하지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은 소품들도 그녀의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윤정선의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이다. 장소성이 두드러지는 그녀의 작품에는 명암의 대비가 뚜렷이 나타나며, 풍경화에서는 측면으로부터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작품을 형이상학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녀가 묘사하는 일상의 장면들이 평범한 장소의 낮 풍경이면서도 그 곳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이탈리아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작품처럼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환상적이고 있음직하지 않은(improbable) 표현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한편으로 평범하고 사실적이면서도 기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다.

윤정선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따라서 그녀가 화면에 묘사하는 공간은 그녀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곳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자주 다니던 카페의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나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던 숙소 근처의 모퉁이 길은 그러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가 묘사하고 있는 공간과 사물들은 우리의 서정적 감각을 자극하는 평범한 사물들로 구성되어 작가의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주는,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속세적인 사물들의 이면에 내재된 서정적 의미(lyric significance behind the surface of mundane objects)를 보여주는 것이다.
윤정선의 작품이 평범하고 사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이며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이 제시하는 시각의 보편성을 교묘하게 가공하며 민감한 색채의 조작에 의해 자신의 화면을 좀 더 특이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원색이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모든 색채는 흰색에 의해 숨이 죽여지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지닌 지점으로 되돌려진다. 그녀가 묘사하는 사물의 평범한 모습은 그 이면의 내적 실재를 드러낸다. 마치 햇빛에 장시간 노출된 사물의 빛이 바래듯이 그녀의 작품 속의 사물들은 하얀 색에 의해 표백되고 탈색됨으로써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이 의식 아래 숨어있는 잠재의식이나 추억과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낮의 황량한 공간과 같이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감수성이 포착한 장면들은 우리를 꿈꾸는 듯한 경험으로 인도한다. 꿈이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녀가 제공해주는 환상의 공간에서 친구를 만나고 중국 황제를 만나며 때로는 피터팬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러한 낭만적 환상을 현실도피라는 방어기제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낭만적 환상은 도피와는 거리가 먼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 속세적인 사물들의 이면에 내재된 서정적 의미의 탐구 작업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의 채널이 되는 셈이다. 런던에서 서울, 그리고 다시 베이징으로 이어진 그녀의 시각적 탐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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