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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의 시간전

하계훈

미술에 관한 역사를 살펴볼 때 작가들이 집단적 창작공간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은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근대에서부터 보더라도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에 하나 둘씩 둥지를 틀면서 이 지역이 오늘날과 같은 미술의 명소로까지 발전한 것이나 20세기 초 피카소나 샤갈과 같은 작가들도 입주하였던, 일명 벌집(La Ruche)이라고 불리는 집단창작 공간이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들이 서로를 가까이에서 필요로 한 것은 현실적으로 상호의존하며 공동생활에 의해 모델비용이나 전시비용 등을 절약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이 당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되던 시기에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사회변화 속의 불안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작가들의 집단적인 거주와 창작의 역사는 1980년대부터 서울 근교와 지방의 몇몇 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요즘처럼 창작 스튜디오라는 형태로 정부나 재단 등이 나서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시작되었다. 초기에 작가들은 농촌지역의 축사를 개조하거나 창고 등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공간 이용문제를 놓고 지방 행정관청의 몰이해와 싸워야 했고 도시 개발에 의해 자신들의 공간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업공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점에서 오늘날과 같은 작가들의 창작 스튜디오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2000년에 시작된 영은미술관의 창작 스튜디오도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면서 이제 여섯 번째 작가들의 입주가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입주기간을 1년으로 시작한 미술관 스튜디오 프로그램은 이번 작가들이 입주한 2006년부터 그 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여 작가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창작기반을 조성해주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다른 국립 창작스튜디오나 사설 스튜디오로 확대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영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창작스튜디오에 2년간 입주했던 아홉 명의 작가들이 스튜디오를 떠나면서 작가 개개인의 그 동안의 성과를 하나로 모아 종합적으로 결산하는 성격의 전시다.

참가 작가 열 명은 각 장르에서 돋보이는 활동을 펼쳐 온 작가들로서 작품의 성격이나 개인적인 활동 배경, 연령, 성향 등에서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들 작가들은 스튜디오에 입주해 있는 지난 2년 동안 이미 한차례씩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영은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중간 결산하는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같은 시기동안 외부에서도 국내외의 각종 전시회나 아트페어, 아트 옥션 등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상당한 성과와 자기발전을 이룩하였다.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창작공간을 마련하고 작업을 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영은미술관의 창작 스튜디오처럼 한 곳에 모여 함께 작업함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나 또는 서로 상이한 성향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 간의 상호 교류를 통해 정보의 소통을 실천하고 창작의 영감을 얻는 기회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입주작가 가운데 맏이격인 강형구는 대형 화면에 극사실적인 인물의 얼굴을 표현하는 작품을 통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얼굴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나 유명인의 초상을 단색의 화면이나 인물과 배경이 강하게 대비되는 색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인물의 눈빛이며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이지만 대형 화면에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한 테크닉으로 표현된 인물이 주는 감흥은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홍성철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나 주변의 인물의 모습 또는 그들의 신체의 일부분을 표현하는 작업을 평면이 아닌 수직으로 반복된 선(고무줄)에 부분 착색을 가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규칙적으로 이루어진 배열에 착색을 가한 선 하나하나는 구체적 재현성을 띠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드러내는 전체의 형상은 비교적 사실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그 이미지는 정지된 형태가 아니라 관람자의 시점 이동에 따라서 움직이는 듯한 착시효과를 준다.

홍성철의 또 다른 작품은 직사각형 형태의 액정 유닛을 비정형적인 화면에 배열하여 빛이 비추는 효과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점멸하여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고무줄과 첨단적인 디지털 액정화면이라는 재료를 사용하는 두 작품이 재료나 표현에 있어서 상이한 듯하지만 결국 홍성철이 추구하는 시각효과는 대상의 고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 포착되는 순간마다 변화하는 이미지의 비정형성이 가져다 주는 시각적 경험인 것이다.

화면에 인물이나 인체의 일부분이 직접 도입되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남경민이나 이소영의 작품에서는 화면 속에 부재하면서도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모종의 존재감을 표현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곳에 다시 그들 작가들을 초대하여 관람객들과 만나는 장을 펼쳐주는 남경민의 작품은 풍부한 상상력의 공간과 내러티브를 생산해낸다.

남경민의 경우는 작가들의 이러한 작품을 차용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직접 화면에 써넣는 방식으로 화가의 아틀리에나 환상의 공간의 다양한 표정을 그려내 관람자들이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화면에 빠져들게 만드는 재미와 상상력의 풍요로움을 준다. 그녀의 작품에는 베르메르, 세잔, 반 고흐, 마티스, 몬드리안 등 수많은 작가들이 때로는 작품으로 또 때로는 그들이 사용하던 기물이나 그들이 작업하던 공간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이렇게 형성된 공간에서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공간과 외부세계의 경계를 상정해주는 창을 설정하기도 하고 화면 가득 날아가는 나비를 도입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남경민의 화면 속에서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적인 교류와 소통이 있고 환상과 꿈, 그리고 미술사적 추억이 복합적으로 얽혀진 가운데 파스텔 톤의 화려하고 경쾌한 색채를 통해 관람객이 화면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소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는 건축물의 내부 공간이다. 작가는 건축물의 모형을 제작하고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인테리어 요소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으로 촬영하여 디지털 프린트 작업으로 연결시킨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공간에 실재하지 않는 구(球)형이나 과거 미술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그녀의 작품 속 공간은 현실적인 공간과 비현실적인 상상의 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적이고 모호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자아내준다. 이러한 공간에서 관람자는 작가 개인의 사적인 기억과 감정을 추측하고 의자나 책 등을 통해 이 공간에 머물렀던 누군가의의 존재감을 감지해낼 수 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은 그녀가 2년 동안 드나들었던 영은 미술관의 공간을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안의 공간을 촬영하는 작업에 미술사에서 익숙하게 알려진 몇몇 이미지들을 접목시키는 프로세스를 거쳐 제작되었다. 모형과 사진으로 제작된 작품 속에서 작가나 다른 인물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두 해 동안 작가가 자신의 전시와 동료 작가들의 전시를 위해 공간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것을 알고 있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공간이 주는 각별한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기범은 동양화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수양버들 가지와 같은 자연물에서 모티브를 도출하여 작업을 해왔다. 적색과 흑색의 화면이 대조를 이루었던 초기작에서 다시 자연과 인공이라는 대비항을 설정하여 화면의 구성이 좀 더 복잡하고 조밀하며 색상이 다양해지는 변화를 보이는 그의 최근작들은 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직선과 곡선, 반복과 겹침, 번짐과 흘러내림 등이 하나로 어울려 화면을 풍성하게 만든다.

권기범이 작품을 통해 바라보는 오늘날의 사회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도시적인 것과 전원적인 것이 상호 침투하고 촉진하거나 저지하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화면 속에서 콘트라스트를 통한 커다란 하모니의 결정체를 형성하게 해준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선과 면, 색이라는 조형요소가 겹침과 번짐을 통해 공간감과 디자인적인 질서를 보여주기도 하고 도시적 긴장감과 그러한 감정의 해체, 그리고 그 이후의 재조합과 이 과정에서의 자연과의 조우 등을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진 다양한 상황과 현실을 작품 속에서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코발트색 화면에 아교를 가지고 저부조 형식으로 커다란 꽃잎과 같은 형상을 정밀하게 그려나가는 나진숙의 작품은 지극히 노동집약적이다. 글루건(glue gun)을 이용하여 한줄 한줄 그어 나아가는 작가의 손길에 담긴 기억과 사연을 쫒다 보면 관람자는 작가의 내면으로 조금씩 다가서면서 그녀의 경험과 삶의 흔적을 어느 정도 공감하여 함께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작품은 이렇게 아교의 조밀한 선적 배열이 집적되어 형성되는 일정한 크기의 화면이 여러 개로 결합하여 전체를 이루지만 그 화면의 배열이 어긋남으로 인해 본래의 이미지가 해체되고 파편화된 추상적인 유기체 형상이 푸른 배경을 바탕으로 해파리처럼 넘실거리는 듯이 드러난다. 작가는 이러한 화면 위에 빔프로젝터를 이용하여 희미한 동영상을 비춤으로써 화면의 아교층에 난반사를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서 화면에는 반짝거리는 움직임이 흘러가는 효과가 일어나 마치 심연으로부터 드러나는 작가의 의식이 화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입체 작업을 하는 김건주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의 물성이나 작가와 대상과의 상호 반응과 교감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에 관심을 갖는 작가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연의 사물과 인간이 어떤 한 순간에 어떤 장소에서 서로 조우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관계를 조형적 내러티브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여러 가지 형태의 동물들의 실루엣을 퍼즐처럼 맞춰놓은 대형 부조형식의 흰색 작품은 이러한 관계의 긴밀한 얽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 작품의 부분부분에 드러나는 이음새를 건너가며 표면을 누비는 검은 선들과 이 선들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면들은 결국 한 공간 안에 긴밀하게 묶여버린 개체들을 연결하는 신경망이며 의미와 생명의 운송로인 셈인 것이다. 몬드리안의 선과 색면의 구성을 연상시키는 전체 화면의 조화 속에 중앙에 위치한 의자는 안정적이고 안락한 결합의 통제소로서의 작가 혹은 관람자의 위치를 암시해주는 듯하다.

이진혁은 현대문명을 대변하는 다양한 자동차들을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집적시킴으로써 현대사회의 허망한 풍요와 물신주의적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도시의 강박증을 비유적으로 표현해왔다. 그가 표현해 온 각종의 자동차들은 어쩌면 그 자동차를 몰며 도시의 바쁜 삶을 쫒던 인간의 모습이 자동차로 치환된 것일 수도 있다. 장지에 주묵으로 수없이 그려진 자동차가 붉은 먹을 핏물처럼 뚝뚝 흘리는 화면은 우리가 사는 이 거대도시가 치유와 구원의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동차를 소재로 작업해오던 이진혁이 이번에 출품한 작품은 이전의 재료와 표현에서 얼마간의 궤도수정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캔버스에 아크릴을 사용하여 이전처럼 수많은 자동차를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이전처럼 질식할 듯이 무질서하게 겹쳐진 공간에 널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구획된 제 자리에 군인들이 사열받듯이 질서있게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자동차들의 표정이나 색상이 다시 그 자동차들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다양한 사람의 표정으로 읽혀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되고 질서가 잡힌 표정들이다.

정교하게 배합된 아크릴 물감의 색띠가 수평으로 배열된 화면을 구성하는 이경의 작품은 구체적 이미지를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추상적이지만 작품의 영감의 원천을 자연의 풍경과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점과 작품 제목에서 구체적인 장소와 상황을 지정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재현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경은 자신의 생활 반경 안에서 표현대상을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자신의 내부로부터 해석의 메커니즘을 가동하고 그 속에서 포착된 대상의 분석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작품을 제작한다.

이경의 최근작들에서는 화면을 가로지르는 색띠의 길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강물이나 구름, 또는 해안이나 섬과 같은 자연의 사물이 좀 더 구체적으로 암시되는 표현이 나타난다. 하지만 여전히 이경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섬세한 색채의 집적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낭만주의적 상상력과 순수한 색채의 변주를 읽어내는 예민한 시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조병왕은 유제처리된 인화지 표면에 날카로운 칼끝을 이용하여 가느다란 직선을 반복하여 그어감으로써 이미지가 드러나게 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의 작업 프로세스는 재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해보았음직한 스크래치 기법을 연상시킨다.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여러 가지 색을 칠한 뒤 전체 화면을 검은 색으로 덧씌우고 나서 뽀족한 물건으로 화면을 긁어내면 검은 배경 위로 바닥의 색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스크래치 기법은 작업 과정에서 감춰진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충족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조병왕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하여 모호하거나 감춰진 이미지가 드러나는 과정에 개입되는 관람자들의 기대와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과정을 주도하는 작가의 행위의 기하학적 반복의 흔적이 가져다주는 긴장감과 이미지의 날카롭고 속도감 있으며 미니멀한 속성이다. 바탕이 채색된 그림을 사진으로 찍고, 인화된 화면을 칼로 그려내고 나서 그것이 화집 속의 사진 이미지로 다시 환원되는 장르간의 교차 순환 과정도 조병왕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측면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작가들의 집단 창작을 위한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선도하는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영은미술관에서 지난 2년 동안 입주하여 작업해왔던 열 명의 작가들이 펼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개별 작가들의 도약과 영은미술관의 작가지원과 후원 사업이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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