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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림 / 회화적 생명의 잉태와 성장의 에너지

하계훈


안혜림의 작품은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의 생활주변은 물론이고, 일시적으로 방문한 여행지나 그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잠시 스쳐간 순간적인 인상과 풍경에 대해서도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스케치로써 자신의 기록을 남겨 놓는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작가에게 사물을 관찰하는 눈썰미는 좋은 작품을 낳기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작가들보다 국내, 외로 여행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 안혜림은 그때마다 연필과 스케치 북을 잊지 않고 들고 다니며 자신의 심상에 창조의 씨앗을 심듯이 방문지의 인상을 풍부한 스케치를 통해 기록해왔다. 회화 창작 과정을 생명체의 잉태와 성장을 거친 출산의 과정과 비유한다면 그녀의 관찰과 스케치는 자신의 작품 탄생을 위한 출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전부터 작가에게 스케치는 창작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보통 ‘밑그림’이라고도 불리는 스케치는 창작의 기초과정으로 여겨지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점차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아간다.
그런데 안혜림의 스케치는 이러한 스케치와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녀의 스케치는 보다 자유롭고 독특하며 기록적 성격을 갖기는 하지만 대상의 사실적 기록보다는 작가의 주관적 인상과 내면의 감정을 강조하고 있다. 중경이 생략되고 근경에서 급작스럽게 원경으로 넘어가는 화면의 배치나 인물과 공간과의 비례가 무시되는 과감성이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면에서는 작가의 스케치가 일정한 경지에 다다른 것을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그녀의 스케치 드로잉에서 원근법을 따지거나 재현의 과학성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착안점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안혜림은 다작의 작가이며 누구보다도 창작의욕과 에너지가 넘쳐나는 작가다. 지금까지 자신의 집과 부산 시내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실을 운영해 온 그녀는 작품제작 의욕이 생기면 자다가도 작업실로 달려가 밤새도록 창작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 태도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녀의 화면은 사전의 치밀한 구도나 밑그림 없이 순간적 영감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커다란 화면을 꾸며 나아가는 동안 과거의 스케치에 담아두었던 작가의 기억과 상상력이 순간의 영감과 결합하여 탄생하는 작품은 화려한 원색의 아크릴 물감에 의해 폭발하듯이 캔버스 위에 펼쳐진다. 말하자면 이 순간이 바로 그녀의 회화적 생명의 잉태와 성장의 에너지가 폭발하듯 분출되는 시점인 것이다.

원색의 아크릴 물감을 묻힌 붓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작가의 필법에는 비록 그녀가 아크릴이라는 서양적 재료와 소재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전통의 산수화나 기명절지, 또는 선종화나 민화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한 붓의 움직임과 과감한 색상을 연상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미술대학 교육은 그녀의 이러한 조형감각을 몰개성적이고 아카데미적인 조형적 규범에 묶어놓았을 지도 모르는데, 이런 점에서 그녀가 한국에서 미술대학 교육을 받지 않고 오늘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개척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안혜림의 작품 화면에 드러나는 이국적이고 강렬한 원색의 폭발적 효과는 그녀의 기질적 특성과 함께 미국 서부지역 체류시기에 수학했던 미술학교의 스승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화려하고 밝은 색채가 화면 속에 대담하게 어울린 작품이 주는 활력과 충격은 작가의 작품이 원숙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그녀의 작품은 얼핏 보기에 잘 균형잡힌 화면을 보여주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부분적으로는 소박하기도 하고 격정적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색채에 관한 조형어법의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대담한 표현은 작가만의 독특한 화면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면서도 관람자들에게 공감받기 쉽고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안혜림의 작품은 에너지가 넘치며 대담하고 파격적이면서도 친근하고 소박하기도 하고, 하나의 작품 안에서 미술사의 전개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가지 경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로서의 연륜에 비하여 보통의 작가들보다 전시회를 가진 경력이 많지는 않지만 지난 해 서울의 노암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진 안혜림이 이제 본격적으로 중심 무대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야수파적 표현성과 소박파적 천진성, 또는 우리 민화에서 볼 수 있는 색채의 강렬하고 대담한 대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요소들과 작가의 내면에 잠재해있는 고유한 색채감각과 조형욕구가 잘 조화를 이루는 자율적이고 대담한 작품들을 맞게 되어 관람자의 한 사람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화가로서의 안혜림의 앞으로의 활동과 회화적 발전방향에 대해 낙관적인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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