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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전 / 전통 인물화에 바탕을 둔 현대적 회화공간의 해석

하계훈

비단에 전통채색 기법을 응용하여 긴장된 붓끝으로 정확하고 치밀하게 인물을 묘사해내는 백지혜의 작품을 대하면 관람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며 그림 속으로 빠져들 듯 화면 가까이로 다가서게 된다. 대부분의 화면에서 한 명의 소녀가 다양한 포즈로 등장하는 작품 속에는 머리카락이나 눈썹 하나하나, 심지어 머리띠의 바느질 한 땀 한 땀까지 정밀하고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정밀한 표현은 인물과 함께 등장하는 꽃이나 머리핀과 같은 소품에서도 동일한 수준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학창시절부터 채색화와 인물화에 관심을 가졌던 백지혜는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의 초상화 기법을 심도있게 연구하였고 이를 응용하여 현대적 인물화를 시도해오고 있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초상화에서는 묘사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사회적 중요성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러한 초상화의 기념비적 혹은 경배적 성격 때문에 실물과 거리가 있더라도 이상화된 표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백지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러한 성격의 인물들과는 거리가 먼, 일상의 평범한 환경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주로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들을 과장하여 표현할 이유도 없고 그럴 만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것같은 인물들의 실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람객의 공감을 얻는 효과가 더 두드러진다. 백지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으나 결국 작가가 모델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다.

백지혜가 묘사하고 있는 인물이 사실적인 느낌을 더해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미술사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배채(혹은 복채)법이라는 기법 때문이기도 하다. 배채법이란 고려시대 불화에서 많이 쓰이던 기법 가운데 하나로서 그림을 그릴 때, 종이나 비단 깁의 뒷면에 물감을 가볍게 칠함으로써 맑은 중간 색조의 투명성이 강조되고 뒷면에 칠한 색깔이 앞면으로 우러나온 상태에서 앞면에 음영과 채색을 보강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법으로 인물을 묘사하면 붓자국에 의한 화면의 얼룩과 번짐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인물의 미묘한 표정이 극도로 세련되게 표현될 뿐 아니라 작품을 오래 동안 보관하여도 변색이 잘 안되는 실용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배채법의 전통은 수묵화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청록산수나 화조·영모화, 인물 초상화 등 채색화에서 많 쓰여 왔다.

백지혜는 전통적인 화법에 의해 탄탄한 조형훈련을 받고 이를 충실하게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전통회화의 구성에서 찾아보기 힘든 작가만의 대담하고 독특한 작품의 구도와 공간의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작품의 공간 구성에서 흔히 적용되는 조형적 공식이 대담하게 전복된 작가의 작품에서는 인물이 화면의 중앙에 놓이기보다는 화면 한쪽 구석으로 깊이 치우쳐있다거나 넓은 여백의 공간을 등지고 화면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꽃단장>과 <봄이 오는 소리>와 같은 작품에서 이러한 구도와 공간 처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꽃단장> 속의 어린 소녀는 머리에 분홍빛 리본을 꼽아 멋을 내려는 데 몰두하며 진지한 표정을 연출하여 자기 등 뒤로 넓게 열려있는 공간의 모호함을 충분히 상쇄시켜주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에서는 활짝 핀 진달래 꽃 봉우리에 귀를 바짝 붙이고 뭔가 들려오는 소리에 열중하는 십대 소녀의 표정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도 소녀의 어깨 너머로 넓은 빈 공간이 펼쳐져 있지만 소녀의 표정과 행동에 몰입해보면 관람자가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신비스런 소리로 공간이 가득 채워진 듯하다. 이러한 작품에서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에 비하여 배경의 공간은 아무런 묘사가 없이 은은한 배경색만을 표현함으로써 장소를 특정해주지 않는 중성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관람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이 전해준 이야기>와 같은 작품에서는 인물의 배경으로 초점이 흐려진 나뭇잎 형상을 표현하여 인물에 시선이 집중되는 효과를 강조하고 있으며 초점 심도가 낮은 카메라의 장면처럼 화면 속에서의 공간의 깊이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백지혜는 전통 채색화에서 터득한 고도의 묘사력을 응용한 인물묘사 기법과 함께 공간 운영과 구성력을 능숙하게 발휘하여 개성 있고 뛰어난 화면을 구성한다. 이번 전시회에 백지혜는 특히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과 함께 그들의 손놀림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표정을 읽는 방법 가운데 얼굴 다음으로 인물의 심리나 감정 상태를 잘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손일 것이다.

이제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갖는 백지혜로서는 신예작가로서의 실험과 탐구를 정리하여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나서는 출발점에 선 기분으로 전시회를 갖고 있다. 한국화의 상대적 침체와 집중도 높은 공력을 투입하는 작품이 흔하지 않은 오늘날의 미술계에서 백지혜의 작품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관람자의 사려 깊은 관심이 기울여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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