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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전 - 심정은

하계훈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관찰해 본 결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전과 쾌락을 추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전을 위해서는 불안감이 제거되어야 하고 이렇게 불안감을 일으키는 요소들이 제거된 상태가 되면 우리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넘어 일종의 정신적 쾌락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현대인들의 일상생활 환경 속에서 어느 정도의 불안감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동반자 이며 그 정도가 미약한 경우에는 불안정한 심리상태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안감의 원인이 불분명하고 실제 생활의 스트레스와 분명한 관련이 없으면서도 심하게 오래 지속되는 만성적인 불안은 정상적인 감정상태의 범주를 넘는 모종의 심리적, 정신적 이상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이 정당한 이유 없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사물에 의해 유발될 때 우리는 이를 공포증(phobia)이라 한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에 따라 외국인(이방인)에 대한 공포를 Xenophobia, 일반적인 사람에 관한 대인관계의 공포를 Anthrophobia라고 부른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가벼운 경계심과 두려움을 갖는다. 만일 그 지역이 자신의 본거지와 크게 다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나 행동 양식이 자신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경우 이러한 경계심과 불안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감은 주변에 대한 관찰과 경계심을 더욱 부추겨 그곳을 찾은 이방인들 사이의 결속력을 높여주기도 하고 그들의 관찰력과 감수성을 크게 증가시켜 주기도 한다.

심정은의 작품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불안감(anxiety)은 뚜렷한 원인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막연하고 근거가 희박한 근심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초조함이 그 원인인 경우도 있다. 그녀의 이러한 정서가 작품 속에 부각된 것은 미국 유학시절을 전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낮선 곳에서의 이방인이 느끼는 정서를 퍼포먼스를 통해 표현하기도 하고, 그 결과물들을 영상과 설치로서 공간에 배치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하나하나의 작품에 대한 조형성보다는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하나의 공간에 배치되어 연출되는 전반적인 환경 또는 상황적 공간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가방이나 그 가방을 변형시킨 인체의 토르소 형태의 가방 등으로 구성된 전통적 조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들과 <어머니의 방>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영상 설치작업이다. 나무 조각 작품의 경우 작가는 나무의 결을 공들여 다듬으며 형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무라는 재료의 본성과 교류하는 한 편 완성된 가방이라는 상징적인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행이나 낯선 곳에 대한 방문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부적응을 떠올리고 있는 듯하다.

여행자가 지니는 가방은 그 내용물로부터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들이 가득 들어있는 컨테이너다. 작가는 이러한 가방을 살짝 열어놓음으로써 낯선 타자와의 교류를 희망하는 뜻을 비치기도 하고 소극적인 자기 노출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는 경우에 따라서 가방 표면에 인공적으로 만든 머리카락이나 다른 신체부위의 털을 부착하여 좀 더 가방 소유자로서의 방문자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작가가 자기 정체성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 유학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듯하다. 유학 생활 이전의 작가의 작품이 다분히 고전적인 조각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미국 유학시절의 작가의 작품은 다분히 자기응시적이고 명상적인 것이 두드러진다. 영상 설치물인 <어머니의 방>은 이러한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외국 유학생활에서 오는 향수와 모성으로의 회귀 욕구 등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외벽에 관람자의 눈높이로 설치된 화면 속에서는 작가가 관찰한 자기 외부의 모습과 풍경이 역으로 들여다보이도록 비춰지고 있으며 공간 내부는 모체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붉은 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유학시절 뉴욕의 중앙역에서 피부질감의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방인의 상황에 대한 퍼포먼스를 했던 것처럼 이제 고국으로 돌아온 심정은의 눈에 비치는 이 땅의 또 다른 낯설음을 앞으로 그녀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소화해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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