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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하계훈

정재호는 주로 캔버스보다는 대형 벽면을 대상으로 작업을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일 수밖에 없으며 작가의 아틀리에가 아닌 비교적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현장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작품의 보존성도 일반 평면 작품과 다르게 창작의 결과물이 전시된 상태 그대로 회수되기 어렵고 전시 종료 후에 영상기록으로만 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과 공간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흰 벽을 이용하여 정재호가 쏟아 놓은 조형언어는 다양하다. 주로 물감 대신 각종 테이프로 선과 색, 그리고 여러 가지 기호를 표현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단어나 천체물리학 또는 수학의 복잡한 공식을 쏟아 놓아 전체적인 화면은 일견 매우 혼란스러워 보인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카오스적인 이야기 지도(Story map)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며 작가는 이러한 개인적인 가상의 공간에서 의식과 기억 그리고 상상력의 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스런 화면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벽면 전체를 조망할 때 관람자는 화면 위를 크게 흐르는 굵은 선들의 소용돌이와 강렬한 색채의 유동적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우리에게 낯익은 대중적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거나 단순 도형이 연속적으로 표현되어 작가가 순수조형의 표현과 함께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정재호가 사용하는 조형도구는 일명 시트지와 색테이프 그리고 커터(칼)이며 붓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리지 않고 형상을 오리고 자르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 기법과도 유사하다. 그리고 우리 생활의 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값싸고 대량생산된 비닐 테이프를 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부분적으로 미국 팝아트와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화면 속에 미국 팝아트 대표작가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커다란 벽면에 한 눈으로 들어오는 작가의 작품은 일견 혼잡스럽고 수다스럽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재호는 색채에 대한 감각이 발달한 작가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미술대학에서 모노크롬 회화의 세뇌를 받은 상태에서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유학 장소로 찾은 조건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지 않은 곳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한국에서 받은 조형 훈련과 밝고 화려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미국 서부지역으로 유학한데서 오는 차이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서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언어적으로도 소통력이 떨어지고 작품의 차이에서 오는 예술적 혼란과 자기정체성의 불투명성,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의 유학시절 초기의 캔버스라고 볼 수 있다.

이 시절 그의 화면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마치 길을 잃은 운전자가 지도를 찾지만 그마저 분명하게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 혼란과 헝클어짐을 보는 듯하다. 유학시절의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돌파구는 작가가 재료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색테이프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작가는 이국땅에서의 자신의 새로운 환경을 조금씩 풀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오스 그 자체였던 화면은 조금씩 질서와 리듬을 갖게 되고 색채도 밝아졌다. 재료의 속성상 화려하고 강렬한 원색이 빠르고 힘차게 커다란 화면을 가로지르는 wall drawing은 이제 생동감이 가득 차 있다.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서 작가는 충분한 밑그림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강의 구도를 정한 후 작업에 들어서서 사다리를 이용해 넓은 벽면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작업현장에서 공간의 특성을 살려 즉흥적으로 표현이 가미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혼돈스러움을 넘어서 강렬한 색채와 선의 리듬, 해독 불가능한 언어와 기호가 가미된 상상의 공간, 그리고 자유로움이다. 최근 작가는 이제 이러한 자유로움의 형식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고심하고 있다. 한국에서 조형훈련을 받고 미국 서부지역으로의 유학생활을 거쳐 다시 돌아온 원점에서 작가는 이제 보다 심층적인 자기정체성과 동양의 정신성을 찾아 거대한 벽면과 마주하고 있다.


- 고양스튜디오 오픈 세미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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