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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균 : 시퀀을 통한 현실과 허구의 대비

하계훈

노상균의 작업은 대부분 씨퀸(sequin)으로 이루어진다. 씨퀸이 무엇인가 하면, 납작한 원형의 작은 플라스틱이나 금속편으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이용해서 생일이나 기념일, 세례일 등의 특별한 날에 꽃과 같은 액세서리를 만들어 선물하거나, 주로 여성들의 핸드백이나 구두 등의 장식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무도회장과 극장 등에서 입는 화려한 의상을 연출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씨퀸이란 재료는 전통적인 미술표현을 위한 재로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노상균은 이러한 재료를 10년이 넘게 자신의 작품 화면에 도입하여 독특한 예술품을 창조해오고 있다. 재현적인 작품이 아닐 경우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작품의 형상과 재질로부터 연상되는 내용은 다양할 수 있고, 그 내용이 우리 생활의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때 작가와 관람자 사이의 공감과 의식의 교류가 그만큼 더 수월할 수 있다. 그리고 재료의 물질적 특성이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공감되는 속성을 그대로 반영할 때 작가의 메시지는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화면속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작품의 종교적 의미를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며 화면에 부착된 새의 깃털을 통해 비상(飛上)이라는 주제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노상균이 사용하는 세퀸의 모양에서 물고기 비늘이나 여기서 좀 더 확대하여 물을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씨퀸을 통해 생명의 문제나 존재의 부유감과 환상이나 일루전의 문제 등에 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부연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작품에서의 부연적인 설명은 작품에 수반되는 명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균의 초기 작품에 붙여진 <물고기>와 <눈물>이나 후기의 <방향>과 <연속> 등의 명제는 작품의 메시지가 관람자에게 보다 수월하게 전달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노상균의 경우 씨퀸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 가운데 하나는 작가의 어린시절 물놀이중에 익사할 뻔한 사건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전시의 카달로그에서 작가는 어린시절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을 때 느꼈던 물속에서의 침잠의 경험과 그로부터 공감할 수 있었던 물속의 물고기의 부유감을 연상하면서 자신이 씨퀸을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된 근원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초기 작품에서 화면에 도입된 노상균의 씨퀸은 개인적으로 익사할 뻔한 사건의 경험을 반추하는 차원이면서 물고기의 상징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존재의 부유감이나 공간에서의 정지와 침묵 등을 느끼게 해주는 표현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씨퀸이라는 물건의 속성은 지극히 통속적이고 화려한 허영심을 싼 값으로 만족시켜주며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그 표면에서 반사하는 빛의 작용에 의해 오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흥미로운 재료다. 그리고 그것이 집합적으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단일 개체로서의 씨퀸이 갖는 속성이 극대화되며 더 나아가 뜻밖의 환상적이고 인간의 정신을 혼란시키거나 고양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씨퀸이 액세서리나 의상 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유흥업소의 화려한 불빛을 받는 연예인들의 의상으로 쓰이기도 한다. 노상균의 작품이 비록 재료적인 측면에서 싸구려 씨퀸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작품이 예술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씨퀸의 집합적 표현이 주는 확장된 표현효과 때문일 것이다.
노상균은 이러한 씨퀸의 집합적 속성을 반복과 집중으로 표현하여 작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초기의 화면에서 펼쳐지던 작가의 경험과 물고기에 관한 내러티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희석되고 작가가 이야기 전달의 도구로 사용된 씨퀸의 물질적 특성을 추출하여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담론화하는 장을 펼치는 재료로 사용하면서 어느새 씨퀸은 미술계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작가를 브랜드화하는 대표적인 표징으로 도입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씨퀸을 이용한 작품에 작가가 부여하는 의미와 작품을 시장으로 유통시키는 대표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인 장식성이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작가가 이 점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 작가는 당분간 의미 위주로 작품을 고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양자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씨퀸을 주된 작품 재료로 사용하면서 작가도 한 때는 통속적 재료로 우리 삶의 중심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고민에 빠진 듯하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서 작가는 유학시절에 제작한 <마돈나>(1992)와 같은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대중적 주제와 일종의 유머를 담아보려고 하기도 하고, 1960년대 전후의 미국 팝음악 LP 레코드의 자켓과 LP 레코드 판에 씨퀸을 입힌 작품들(2001)을 시도하여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 사이의 전치를 시도해보기도 하였던 것같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작가는 마네킹이나 불상 등의 입체의 표면에 씨퀸을 입혀서 본래의 이미지를 덮어버림으로써 대상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중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여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2001년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한 개인전 도록을 통해 노상균은 씨퀸이 빛과 작용하여 창출하는 착시현상을 자신의 작품의 물질적, 개념적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자연과 생활의 경험에서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의 진실성을 쉽게 신뢰하는 환각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하여 이러한 작업을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씨퀸을 통하여 제시하는 현실이 허구이며 환상적 현상임을 자백하면서 다시 이러한 환상적 현상도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순환적 논리로 자신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과 허구에 대한 대비는 이번에 갤러리 시몬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크게 확대된 콤팩트의 안쪽 양면을 씨퀸으로 덮고 있다. 작가는 화장하는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기의 허상과 현실 속의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를 우리가 씨퀸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작용을 읽으면서 그 씨퀸으로 감싸인 표피의 내면까지 실재로 인식하려는 태도와 비유한다.
이번 갤러리 시몬 전시에 등장한 화장도구인 콤팩트는 작가가 이것을 대형으로 확대시키고 거울 표면에 해당하는 부분에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씨퀸을 동심원이 확장하는 형식으로 부착시킴으로써 거울의 작용과 씨퀸의 작용이 공통적으로 관람자들에게 허구적 환상을 전해준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콤팩트에 부착된 거울을 보면서 파우더를 바르는 화장행위는 자기 존재의 확인과 그 자아의 외형상의 변화, 그리고 다시 변화된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에 사용되는 물건이다. 작가의 말처럼 얼굴 표면에 파우더를 바름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변화시키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물체의 표면에 씨퀸을 덮음으로써 본래 그 물체가 가진 의미가 변화되는 이 두 과정은 허상에 의해 우리의 인식이 혼란을 겪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 이미지를 덮은 시퀀을 통해 새로운 의미 부여

1992년 유학시절부터 시작된 노상균의 씨퀸 작업은 지금까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우선 평면에서는 동심원을 그려오면서 점차 그 규모를 확대하여 마침내 씨퀸들의 연속적인 원운동에 의한 확산(또는 수렴) 작용이 화면에 전개된다. 그의 작업은 씨퀸의 원운동 배열을 통하여 화면 속의 이미지가 확산(수렴)됨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커질수록 그 효과가 마치 수평 또는 수직적인 일정 방향의 운동감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방 전체에 설치된 이러한 작품은 관람자가 그의 작품 앞에서 마치 무중력 상태의 어느 시공을 초월한 공간이나 우주공간에서 부유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작가의 평면 씨퀸 작업은 이후로 원운동에서 수평이나 수직 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좀 더 미니멀하고 평면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간다.

두 번째 작업은 기존의 다양한 레디메이드 입체의 표면에 씨퀸을 촘촘하게 덮어서 본래의 오브제의 속성과 재질을 가리고 씨퀸으로 만든 어떠한 형상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그가 채택한 오브제 가운데에는 마네킹의 하체부분이나 불상, 허공에 매달린 손수건과 텐트 등이 있는데 이러한 오브제들은 그 표면에 씨퀸을 씌우는 작가의 손에 의해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거세당하고 씨퀸으로 형성된 반사체 조각의 집합으로서 제시되는 시각적 오브제로 다시 우리 앞에 펼치게 된다.
조그만 씨퀸 조각들을 수없이 반복하여 캔버스 표면이나 오브제의 표면에 부착하는 행위는 엄청난 육체적 노동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며 이 과정에서 작업에 임하는 작가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인내심과 육체적 능력을 갖춘 노동가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반복되는 단순작업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무사유(無思惟)와 비사유(非思惟), 망상과 무의식들을 작업의 결과로서의 화면에 적용하여 의미를 생성시키는 역설적인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데에서 자신의 작업의 부조리한 상황을 느낄 수도 있다.
완성된 평면작업에서 그 바탕이 드러나지 않는데도 작가가 작품의 바탕 지지대로서 캔버스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나 붓의 표면을 씨퀸으로 감싼 작품을 제작한 사실에서도 작가의 의식의 한 부분을 읽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그다지 예술적이지 않은 단순 작업을 통하여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로서의 그리기에 대한 미련과 그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상균의 작업을 비평하는 필자들이 사용하는 주요 키워드로는 반복 혹은 연속성과 집중, 무중력, 시각적 환영 등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때로는 옵티컬 아트와, 또 때로는 팝아트나 미니멀 아트와 연관하여 분석되기도 한다. 그가 1990년대에 미국 유학 생활을 한 사실도 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미술사조를 접촉했을 것이라는 정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2000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를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노상균은 씨퀸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비전통적이며 그 자체로서 예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물건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지각의 현상을 천착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보편성 위에 우리미술에 있어서 깊게 뿌리박고 있는 서구미술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우리 미술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만 그가 주로 의존하고 있는 기법인 반복은 쉽게 권태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주기적으로 작품의 형식변화를 적절히 가미하거나 작품발표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월간미술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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