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뮤지엄(Museum) 경영에 있어서 관장의 역할

하계훈

뮤지엄(Museum) 경영에 있어서 관장의 역할
The Role of Director in the Management of a Museum


1. 서론
뮤지엄 1) 영어의 뮤지엄(museum)은 ‘박물관’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미술박물관’을 뜻하는 ‘미술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뮤지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은 역사적, 예술적, 학문적 가치가 있는 수집자료들이 한 곳에 집중되면서 생겨난 문화 기관이다. 이러한 뮤지엄이 탄생하게된 정치, 경제, 사회사적 배경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단 이렇게 집중된 수집자료들은 작게는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전 세계 인류의 역사와 미래 생활에 관련된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집자료들을 보존, 연구, 활용하기 위한 사업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이러한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좋은 인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력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할 때 행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그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이 관장이므로 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칼 거트(Karl Guthe)에 의하면 관장은 ‘뮤지엄 업무 수행의 방법과 목적에 정통해야 하며, 뮤지엄의 이상적인 운영을 위해 마치 전도사와도 같은 정열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 어떤 계층의 인사에게도 친근감을 주고, 사무적으로는 뮤지엄을 원활하게 관리, 운영하고, 전문가에게도 뮤지엄의 기능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뚜렷한 자신과 인내력 그리고 독창력이 필요하다. 뮤지엄의 운영위원회나 평가위원회에서는 그 탁월한 능력과 판단이 크게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2) 이난영, <박물관학 입문> (1993, 삼화출판사) 107쪽에서 재인용

물론 이 말 가운데 일부분은 제도적으로 관장의 임명권을 이사회가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무위원이 갖고 있는 나라의 공공 뮤지엄의 경우와는 다를 수도 있으며 뮤지엄의 탄생과 진화의 단계에서 그 뮤지엄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에 따라서도 관장에게 요구되는 이상적인 능력과 배경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관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본 연구에서는 이처럼 중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는 뮤지엄의 관장이 갖는 의미와 그의 역할 등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의 방법으로서 근대적 뮤지엄이 탄생되기 시작하던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주요 뮤지엄에서 관장직을 맡았거나 현재까지 맡아오고 있는 몇몇 대표적인 사람들의 학문적 배경이나 활동 경력 등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이 소속된 기관에 어떻게 기여해 왔으며, 그들이 처한 정치, 사회적 환경이나 제도의 틀 속에서 어떠한 한계를 갖고 이를 극복하려고 했었는가를 동시에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의 뮤지엄에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본론

2-1 뮤지엄의 관장--그 능력과 역할

뮤지엄의 관장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가 소속된 기관의 소장품과 관련된 분야의 학자로서의 전문성과 뮤지엄이라는 조직을 관리하는 행정가로서의 경영능력을 겸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두 가지 성격 가운데 한 쪽이 모자라거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갖고 있을 경우 그가 이끄는 뮤지엄의 운영은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최근에 와서는 관장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요소로서 기금모금 능력이나 심지어 대인관계에 있어서 무난한 성격 등이 추가로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관장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두루 갖춘다는 것은 사실상 누구에게나 힘겨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점차 제대로 자격을 갖춘 관장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1994년경 비슷한 시기에 10여 개의 뮤지엄들이 관장을 구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오래 동안 공석으로 남겨두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주된 이유가 이처럼 막중한 관장의 임무를 떠맡기를 꺼리는 현상 때문이었다. 3) 동아일보 1994. 4. 7 참조

오늘날 뮤지엄의 관장은 학문적 업적이나 행정 능력 외에도 자신의 기관을 이끌어갈 장기적인 안목과 리더쉽, 고도의 도덕성, 그리고 그의 인품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4) Professional Practices in Art Museums, (Association of Art Museum Directors, 2001) 17-9쪽 참조
이처럼 중요한 직책이기 때문에 외국의 경우에는 관장직이 공석이 되었을 때, 적임자 선발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지며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한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공공 뮤지엄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에는 관장직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해놓은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해당 소장품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게 관심을 갖고 있던 애호가나 예술가, 심지어는 정치가나 관료 등이 관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따라서 뮤지엄의 운영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해볼 때 아쉬운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도 몇몇 대표적인 인물들은 오늘날의 뮤지엄들을 제 궤도에 오르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뮤지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2-2 초기 뮤지엄 관장들의 공로

뮤지엄은 인간의 생활과 이에 관련된 문제에서 파생되는 자료들을 다루기 때문에 비록 그 기본적인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의 생활이 바뀜에 따라 시대적으로 그 성격이나 단기적으로 지향하는 목표, 중점 사업 등이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전쟁이나 혁명 등 사회적 변화가 급속히 벌어지던 시기의 뮤지엄은 적극적이고 신속한 판단력을 가진 활동적인 관장이 필요했고, 안정기에 들어서서 역사학적 관점에 입각한 소장품 수집과 연구가 필요한 시기에는 학자적이고 고도의 감식안을 가진 관장이 필요했다.5) 알마 위틀린(Alma S. Wittlin)은 미국 뮤지엄을 중심으로 뮤지엄의 전개 단계를 남북전쟁부터 제 1차 세계대전끼지, 그 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 이렇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 범위가 1970년 이전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1970년 이후의 새로운 구분이 가능할 것 같다. Alma S. Wittlin, Museums; In Search of a Usable Future, (MIT Press, 1970) 121-201쪽 참조

이러한 시기의 대표적인 관장으로는 프랑스 루브르 뮤지엄의 초대 관장인 도미니크 비방 드농 (Dominique Vivant Denon, 1747-1825)과 독일 베를린 왕실 뮤지엄의 총관장을 지낸 빌헬름 폰 보데(Wilhelm von Bode, 1845-1929)를 들 수 있다. 드농은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에서 루브르를 세계 제일의 뮤지엄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운 초대 관장으로서 오늘날 루브르 뮤지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간이 남아있으며 보데 역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베를린의 뮤지엄들이 한데 모여있는 박물관 섬(Museumsinsel)에 위치한 한 박물관에 그의 이름을 붙여놓게 되었다.

유럽의 뮤지엄들이 계몽군주나 시민혁명 정부의 주도하에 태동, 발전되어 왔던데 반하여 미국의 대표적인 뮤지엄들은 개인 사업가들의 주도와 후원으로 설립, 발전되어 왔다. 미국의 경우에는 제 1차 세계 대전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 성장과 외교적 역할 확대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뮤지엄 문화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며 이러한 도약을 가능케 해줄 관장의 역할이 필요했던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 근대미술관을 이끈 알프레드 바아(Alfred H. Barr, 1902-1981)였다.
아직까지 분야별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러한 초기 뮤지엄의 관장들은 대부분 관장으로서의 역할 이외에도 오늘날의 큐레이터나 전시 디자이너, 교육 담당자 등 여러 사람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독선적 운영도 종종 나타났지만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젼이 있는 관장의 경우에는 그의 독선이 강한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6) Edward P. Alexander는 그의 저서 Museum Masters-Their Museums and Their Influence에서 유럽과 북미의 유명한 미술관 관장들에 대한 전기적 연구를 수행하여 그들의 헌신과 열정의 결과로 오늘날의 뮤지엄들이 바로 세워질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Edward P. Alexander, Museum Masters-Their Museums and Their Influence, (1983)


2-2-1 루브르와 도미니크 비방 드농

1789년 시민혁명의 결과로 1793년부터 대중에게 완전 개방된 루브르 박물관(당시에는 중앙 박물관)에서 1802년부터 1815년까지 초대 박물관장을 지낸 도미니크 비방 드농은 화술과 사교술이 뛰어났으며 여행을 좋아하던 미술품 컬렉터이며 판화가였다.
루브르 박물관은 1793년 개관 이후 몇 명의 원로화가들에 의한 위탁운영 체제로 이어져 오거나 로마에서 초빙된 전직 큐레이터 비스콩티(E. Q. Visconti)에 의해 운영되다가 1802년 드농에게 처음 관장직을 맡기게 되었는데 이 자리는 화가 다비드(David)나 화가 겸 화상이었던 쟝 르브렁(Jean Lebrun)도 탐을 내던 자리였다. 7) 루브르 박물관은 시민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황폐화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건물보수를 위하여 몇 차례 폐쇄되었다. 초기의 루브르의 상황에 대해서는 <서양 박물관의 역사>(Germain Bazin저, 백승길 번역, 한국 박물관 협회) 168-192쪽 참조

정치적 변화가 심한 시대를 살아간 드농은 이러한 환경에서 눈치 빠르게 행동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원래 법학을 공부했으나 그 분야에 흥미를 못 느껴 고민하던 차에 스승 노엘 할레(Noel Hall)를 만나 미술에 관심을 돌렸으며, 젊은 시절 루이 15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루이 16세 치하에서 한때는 마담 퐁파두르(Pompadour)의 보석과 메달을 관리해주기도 했으며 나폴레옹 치하에서는 황비 조세핀을 통해 나폴레옹 황제의 눈에 띄어 1802년 루브르의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관장으로 임명된 후 드농은 미술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폴레옹을 부추기기 위하여 당시 중앙박물관으로 명명된 루브르를 나폴레옹 박물관(Muse Napolon)으로 바꿔 부르도록 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전시실을 개조하여 여러 가지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사각의 방(Salon Care)을 당시 살롱전을 통해 활동하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였는데 가끔씩은 이 곳에서 특별전을 기획하거나 국가의 경축행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8) Edward P Alexander의 책 90쪽 참조

그는 또 나폴레옹을 따라 전쟁에 나아가 전리품으로 미술품들을 루브르에 가져오는 역할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루브르 궁전에 입주한 정부 기구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나갈 때마다 공간을 발빠르게 확보하여 박물관 시설을 넓혀갔고 정부가 프랑스 각 지방에 15개의 미술관을 설립하도록 유도하였다. 드농은 정치, 군사적 실세인 나폴레옹을 이용하여 루브르를 세계 제일의 뮤지엄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드농은 학자형 관장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감각과 신속한 판단력이나 수집가로서의 감식안을 잘 갖춘 인물로서 오히려 그 시대에 더욱 적합한 관장 또는 큐레이터의 재질을 지니고 있어서 루브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업적 가운데 하나는 그의 재직시절 많은 미술품들이 세척과 보수 과정을 거쳐서 작품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9) 소장품의 수복에 대한 요구는 삼부회의의 제 3 신분 대표 500인 가운데 몽블랑 출신의 마린(Anthelme Marin) 의원에 의해서 1797년 강력하게 요구되기도 하였다.
Andrew McClellan, Inventing the Louvre, Art, Politics, and the Origins of the Modern Museum in Eighteenth-Century Pari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31쪽 참조

그 자신이 미술품 컬렉터였던 드농은 미술품의 보호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며, 정치가인 나폴레옹이 외교적, 정치적 관점에서 내린 결정이 미술품들을 위험에 빠지게 할 때마다 슬기롭게 이를 잘 넘겨갔다.
수집된 미술품들에 대한 드농의 집착은 나폴레옹의 실각 후 프러시아군이 빼앗긴 미술품을 되찾아 가는 과정에서 온갖 방법으로 이를 저지하다가 투옥될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로 잘 알 수 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1815년 11월에 끝난 미술품 반환조치 완료 후에도 많은 작품들이 프랑스에 남아있게 되었으며, 프러시아 측의 반환 담당자였던 폰 리벤트롭(von Ribbentrop) 남작은 나중에 드농에게 편지를 보내서 비록 적국인이지만 드농의 미술품에 대한 애정과 학자적 관심에 감동했다는 존경의 편지를 보냈다. 10) Edward P. Alexander, Museum Masters, Their Museums and Their Influence, (1983) 103쪽 참조


루브르의 관장직에서 은퇴한 후 드농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들을 정리하며 지냈는데, 그는 관장 재직시절에도 공과 사를 잘 구분하였으므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작품 구매에 이익을 취하거나 편의를 도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비록 약탈행위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은 드농을 통해 루브르에서 전개된 미술품 수집과 전시활동이 촉발시키는 국민계몽의 힘과 정치적 유용성은 미술품을 반환해 가는 각 나라마다 뮤지엄 설립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드농이 보여준 전문가적인 감식안과 행정가로서의 정열은 오늘날의 루브르가 있게 된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루브르의 초대 관장으로서의 드농의 공로를 인정하여 프랑스 정부는 현재의 루브르 뮤지엄의 남쪽 긴 회랑 부분을 드농 회랑(Denon Wing)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2-2-2 독일 미술관과 빌헬름 폰 보데

나폴레옹에 의해 전리품들을 빼앗기고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이를 다시 찾아오고 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군주들은 미술품에 대해서 이전 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루브르를 통해 뮤지엄이 갖는 국민적 통합의 힘과 정치적, 외교적 힘을 실감하여 자신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뮤지엄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프러시아의 경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드농의 나폴레옹 뮤지엄에 영향을 받아 1815년 자신의 왕실 마구간을 개조하여 소장품 전시관을 설립하였으며 그후 1821년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와겐(Gustav Friedrich Waagen, 1794-1868)을 왕립 갤러리의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왕은 자신의 소장품을 가지고 건축가 칼 프리드리히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1830년 구미술관(Altes Museum)을 개관하였는데 이것이 베를린에서 최초로 문을 연 공공 미술관이었다. 그후 다시 1859년 신미술관(Neue Museum)이 개관되었으며 이렇게 전개된 것이 오늘날 베를린의 박물관 섬을 형성하게 된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11) C.Stonge, Making private collections public. Gustav Friedrich Waagen and the Royal Museum in Berlin, Journal of the History of Collections 10, 1998, (1): 61-74.

프러시아는 이렇게 설립되어 온 여러 뮤지엄들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통합 관장을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보데였다. 1870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은 빌헬름 폰 보데는 원래 법학을 공부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였는데 이러한 경력은 그가 1872년 베를린 프러시아 왕립 갤러리의 보조 큐레이터를 거쳐 1890년 관장을 지내고 1904년 당시 카이저 프리드리히 뮤지엄(지금의 보데 박물관)의 관장으로 일하는데 있어서 미술사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1905년에 모든 프러시아 왕실 뮤지엄의 총 관장으로 임명되어 1920년 은퇴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1871년 비스마르크의 지휘 아래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금화 5백만프랑을 전쟁배상금으로 받았으며 산업, 금융, 경제면에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의 조세수입이 넉넉한 편이었다. 12) 1870년대에 베를린은 뮤지엄에 대한 지출을 5배 이상 증가시켰으며, 이와 별도로 소장품 구입 예산을 특별히 책정하였다. James J. Sheehan, Museums in the German Art World, From the End of the Old Regime to the Rise of Modern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08쪽 참조
이러한 재정을 바탕으로 빌헬름 1세와 그 후계자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왕실의 미술품을 확장시키는데 주력하였으며 이 때 왕실의 자문 역할을 한 것이 보데였다.

학문적으로 보데는 스위스 출신의 미술사가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자신의 전문분야인 렘브란트, 17세기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회화,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각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장식미술에 관한 논문도 많이 남겼다. 학자로서 그는 평생동안 5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하고 5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데는 학문적 연구자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유럽 각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훌륭한 작품들을 직접 살펴보고 구입하기도 했으며 국가 재정이나 관료주의적인 행정 절차상의 이유로 발빠르게 작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국의 사업가들을 설득하여 이러한 작품들을 구입하게 하였다. 보데의 전문성을 신뢰한 사업가들은 기꺼이 그가 추천하는 작품을 구입하였으며 그 작품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나중에 국립 미술관에 기증 또는 유증(遺贈)되었다.
1896년 보데는 카이저 프리드리히 뮤지엄 후원회를 결성하고 회원들에게 매년 500마르크씩 회비를 걷어 뮤지엄의 재정에 기여하였으며 재력이 있는 컬렉터들에게 상과 작위를 받도록 하고 그 대가로 작품을 기증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국립 박물관의 소장품을 늘려가기도 했다. 기부자에 대한 보답으로 보데는 오늘날 뮤지엄에서 실시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이미 그 당시에 실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보데는 기부자들을 위해 강연회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전시장 안내관람(guided tour)을 실시하고, 기부자들의 기부 행위를 널리 알려 또 다른 기부자를 자극하려는 언론 보도도 빼놓지 않았다. 13) James J. Sheehan, 앞의 책 155-6쪽 참조

그는 후학 육성에도 힘을 쏟아서 1902년에는 독일 대학의 미술사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베를린에 있는 뮤지엄에서 2년제 큐레이터 교육과정을 열어 이들을 미래의 독일 뮤지엄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스파르타식 맹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보데는 개인적으로 비유럽권의 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카페트나 이슬람 미술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들 소장품중 대부분은 나중에 그가 근무했던 뮤지엄에 기증되었다. 그는 또 자신의 개인 장서를 매각한 자금을 베를린 시 남서쪽의 달렘(Dahlem) 지역에 아시아 뮤지엄을 짓는데 기부하기도 했다.
보데에 의해 베를린의 뮤지엄들은 유럽의 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보데 개인의 높은 안목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컬렉터들에게서도 자문요청이 쇄도하게 만들었다. 그는 미국의 거물급 미술품 수집가들인 모건과 프릭, 와이드너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보데가 주도하는 베를린의 뮤지엄들은 단계적으로 소장품을 수집해가며 그 발전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패전국의 입장에서 독일의 뮤지엄들은 프랑스와 벨기에에게 많은 미술품을 빼앗기게 되었고 그후 1920년대 초반에 닥쳐온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많은 개인 소장품들을 국외로, 특히 그 가운데 대부분은 미국으로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1904년 베를린의 박물관 섬에 세워진 카이저 프리드리히 뮤지엄의 초대 관장이었던 보데는 50년 넘게 베를린의 뮤지엄들을 위해 봉사해왔으며 1929년 여든 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카이저 프리드리히 뮤지엄에서 실시되었고 1945년 이 뮤지엄은 보데뮤지엄(Bodemuseum)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독일 뮤지엄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뮤지엄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그의 흉상이 설치되었다.



2-2-3 뉴욕 근대미술관(MOMA)과 알프레드 바아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가 뉴욕시민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에게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후 10여 년 동안 미국에서는 현대미술에 대한 이렇다 할 움직임이 눈에 띤 것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29년 록펠러가의 애비(Abby)가 릴리 블리스(Lillie P. Bliss)와 매리 퀸 설리반(Mary Quinn Sullivan)과 함께 뉴욕 맨하튼에 근대미술관을 설립할 것을 합의하고 젊은 미술학도 일프레드 바아를 관장으로 영입하면서 당시의 미술계에서 유럽에 대한 미국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바아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마친 후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웰슬리(Wellesley) 대학에서 20세기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동시에 폴 삭스(Paul J. Sachs, 1878-1965)교수에게서 박물관학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근대미술관 설립이사회의 7명의 이사 14) Abby Rockefeller, Lillie Bliss, Mary Quinn Sullivan, A. Conger Goodyear, Frank Crowninshield (editor of Vanity Fair magazine), Mrs. W. Murray Crane (a supporter of the experimental Dalton School), and Paul J. Sachs (Professor of Fine Arts at Harvard).

가운데 한 사람인 하버드 대학의 폴 삭스 교수는 이러한 인연으로 27살의 젊은 청년 바아를 새로 태어나는 근대미술관의 관장으로 과감하게 추천하였다.
삭스 교수는 박물관학 과정에서 바아가 12개월간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볼 수 있는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하였으며, 바아는 이때 무엇보다도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방문하고 새로 지은 현대적인 건물 안에서 모든 종류의 미술이 종합적으로 교육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현대 미술을 바라보는 이러한 종합적인 시각은 그가 프린스턴에서 수학했던 찰스 루퍼스 모레이(Charles Rufus Morey, 1877-1955)교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며 바아 자신이 웰슬리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도 이러한 방법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근대미술관의 관장으로 임명된 뒤에 미술관의 현장에서도 나타난다. 15) Nancy Eunreinhofer, The American Art Museum: elitism and democracy, (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7) 152-4쪽 참조

그리하여 그는 근대미술관의 목표를 ‘근대미술 연구를 돕고 그러한 연구를 실생활에 적용하게 하는 것’에 두고 다양한 장르의 미술을 다루고자 하였지만 이사회의 보수성에 부딪쳐 처음 2년 가량은 회화와 조각 분야에 한정된 전시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점차 건축, 사진, 디자인, 영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1943년 그가 관장직을 물러날 때에는 이미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미국 시민들이 현대미술을 보다 가깝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위하여 바아는 재직 기간 동안 100회가 넘는 전시회를 조직하였으며 그 때마다 대중들이 읽고 이해하기 쉬운 카다로그를 출판하였다. 미술관 설립 후 처음 2년간을 미국 사회에서 현대미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기간으로 설정하고 그는 한해에 약 10회 정도의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는 반면에 소장품 확보에는 신중하였다. 16) 근대미술관은 소장품이 없이 기획전 위주로 출발하였으며 최초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Lillie Bliss가 1931년에 사망하면서 유증한 작품들을 시작으로 점차 소장품들을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Christoph Gruneberg, 'The Politics of Presentation: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rt Apart : Art Institutions and Ideology Across England and North America (1994) 192-211쪽 참조


그는 현대미술에 대한 자신의 예리한 직관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마티스, 피카소, 반 고흐 등의 유럽미술의 거장들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잭슨 폴록, 쟈스퍼 존스 등의 미국 미술가들을 발굴하여 근대미술관의 소장품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바아는 근대미술관의 운영 목표를 미술에 대한 지식과 비평, 학술, 이해, 취미 등을 생산(production)하여 이를 보급(distribution)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이전의 전시가 유파별, 시대별로 분류되어 한 권의 미술사를 기술하듯이 관람객에게 제시되던 방법을 뛰어넘어 미학적 자율성에 입각한 새로운 전시방식을 도입하였다. 17) 상게서 197쪽 참조

바아는 1943년 관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1947년부터 1967년까지 근대미술관의 소장품 부서의 책임자로서 미술관 소장품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근대미술관을 통하여 알프레드 바아는 소장품의 보존과 분류에 역점을 두어 오던 미술관 사업을 교육과 소통 그리고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쪽으로 바꾸었으며 이러한 가운데에도 자칫 대중화에 따르는 수준의 저하를 견제하여 왔다.
실제로 근대미술관이 본격적인 영구소장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53년부터였다. 이 때까지는 현대미술 연구에 필요한 작품을 구입할 때에도 이 작품들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비롯한 다른 뮤지엄에 이관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18) 뉴욕 근대미술관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Sam Hunter의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Abrams, 1993)와 Nancy Einreinhofer의 The American Art Museum : elitism and democracy, (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7)의 150-169쪽을 참조할 것

근대미술관은 설립 당시 프랑스의 뤽상브르(Luxemburg) 궁과 루브르의 관계처럼 근대미술관이 당대의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작품 소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뮤지엄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구도를 계획하였었다.
오늘날 뉴욕 근대미술관이 서양미술사를 연구, 정리하여 전시로 연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은 알프레드 바아와 같은 학자이면서 교육자이고 행정가인 관장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 배후에는 프린스턴의 모레이 교수나 하버드의 삭스 교수 같은 학자들과 록펠러 가문과 같은 막강한 후원자가 젊은 미술사학자를 믿고 뒤를 밀어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2-3 뮤지엄 활동의 변화와 새로운 관장의 역할

과거 시민혁명을 통해서 수립된 정부 시대나 계몽 군주와 절대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시대에는 뮤지엄을 설립하는데 있어서 예산을 포함한 전반적인 여건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고 소장품의 확보나 추가 확보도 지금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대중 교육과 예술품 향수에 있어서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실천과 국민계몽이라는 대의 명분은 어렵지 않게 기부자들을 참여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의 뮤지엄은 소장품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대중들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를 수용하여 그 역할을 확대시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발빠르게 성장한 미술 시장이 미술품 가격 상승을 부채질하여 소장품 구입을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뮤지엄 프로그램과 경쟁하여 제공되는 대체 문화상품의 확산으로 오늘날에는 뮤지엄의 설립과 운영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는 초기의 행정가나 학자적 자질을 갖춘 관장의 역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기존의 관장의 자격 조건 외에도 미술 시장에도 맞설 수 있으며 경영감각을 갖추고 국제적인 정보에도 능통한 그야말로 팔방미인격의 관장을 요구하게 된다. 실제로 외국의 국제적 규모의 뮤지엄에서는 이러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관장들이 국적을 초월하여 임명되기도 하였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스포츠의 감독이 외국에서 영입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뮤지엄들도 어느 단계에서는 필요하다면 국적의 제한 없이 관장을 선발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뮤지엄의 운영에 있어서 재정적인 측면이 전면으로 부상될 경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자칫하면 뮤지엄의 본질이 도외시되거나 가볍게 여겨지고 비영리 기관인 뮤지엄에 기업이나 다른 영리 기관처럼 손익을 저울질하는 경영 개념이 지나치게 부각될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종종 발생하여 현재 외국의 국제적 규모의 뮤지엄을 이끄는 관장들 가운데 일부는 학문적 업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경영성과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19) 예를 들어 몇 개월 전 갑자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의 관장직을 물러난 데이빗 로스(David Ross)의 경우 1971년 시라큐스 대학 미술관 큐레이터로 시작하여 보스턴 ICA, 휘트니 미술관 등의 관장을 거쳐오면서 학자적이기보다는 항상 시류에 편승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그는 최근에 보다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미술관과 관련 없는 기관으로 아무 대책 없이 떠나버려 또다시 비난을 받고 있다.
2001년 12월 4일자 San Francisco Chronicle의 David Bonetti의 글 ‘SFMOMA moves carefully as it looks for a new director’ 참조


뮤지엄의 경영에 있어서 학문적 성과와 이러한 성과의 대중적 보급이라는 사명과 경영학적 관점에서의 수입과 지출의 균형 유지라는 양립하기 힘든 목표는 때때로 관장과 이사회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현명한 관장은 변화하는 뮤지엄의 환경 안에서 대중성과 엘리트적 예술성을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학문적 성과와 재정수입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아내느냐에 그의 능력이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3. 결론-우리 나라 뮤지엄의 미래를 위한 제언

미셸 푸코(Michell Foucault; 1926~1984)가 말했듯이 뮤지엄은 19세기 서유럽의 특징적인 사회현상의 산물이라고 볼 때, 20) Tony Bennett, The Birth of the Museum, History, Theory, Politics. (Routledge, 1995) 1쪽 참조

우리 나라는 뮤지엄이 탄생해야 할 역사적, 사회적 원인이 강하게 발생한 적이 없다. 18세기 말 프랑스처럼 계몽 사상의 세례를 받은 시민들을 중심으로 혁명을 통해 구체제를 폐기처분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대중 계몽을 위해 뮤지엄을 대중에게 자유롭게 개방하는 과정이 우리의 근대사에는 전례가 없었으며,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 개발과 이에 따르는 자본의 축적이 국제 박람회와 과학 기술 분야의 뮤지엄 시설을 만들어 낸 것과 같은 근대사를 가지고 있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남을 침략하여 빼앗기보다는 빼앗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유럽에서처럼 계몽 군주가 강력한 문화적 관심을 보이며 상당한 정열을 문화사업에 투입해 온 역사도 별로 없다. 게다가 자본의 축적 과정이 정치적 혼돈에 휩쓸려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자본을 축적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산업 자본가들 역시 외국에 비해 사회에 대한 기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인식이 정착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상 198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 나라의 뮤지엄 사업은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문화의식이 부족한 관료들이나 자본가들에 의해서 소극적으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전문적인 관장들이나 큐레이터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 볼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국제적 정보가 초고속으로 유통되는 시대를 맞아 백년 넘게 앞서 출발한 서양의 뮤지엄들과 발걸음을 같이 해야하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외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어 오면서 축적해 온 여러 가지 일을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경험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상황을 잘 헤쳐 나아갈 수 있는 관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별로 길지 않은 뮤지엄의 역사지만 그 가운데에 우리도 훌륭한 선구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의 식민지 시절의 간송 전형필 선생이나 해방 후의 초대 국립 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와 같은 사람들은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나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가며 우리 나라 뮤지엄 문화의 기초를 세운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 나라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 건국 초기의 박물관 상황에 대해서는 김재원의 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탐구당, 1992)을 참조할 것

우리가 앞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프랑스의 도미니크 비방 드농이나 독일의 빌헬름 폰 보데, 그리고 미국의 알프레드 바아는 우리와는 다른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활약하던 관장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사례를 참고로 하여 우리의 뮤지엄들을 비추어 보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 가능한 요소들을 빌어올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역사에 남은 관장들은 학자적 연구 성과와 함께 그 시대의 어려운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적극적인 시도를 해 온 점이 눈에 띤다. 우리는 드농의 사례를 통해 소장품에 대한 애착과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전문 직업인의 도덕성, 그리고 예술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있는 정치인등과 적절하게 협상하는 수완 등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데의 경우에는 그의 학자적 열성과 몸소 자료를 쫒아다니던 적극성, 그리고 자신의 소장품을 기꺼이 국가에 환원시키는 필란트로피의 정신이나 뮤지엄의 후원자가 될 수 있는 자본가들에게 신뢰를 주어 그들을 뮤지엄 사업에 끌어들이는 설득력 등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알프레드 바아의 경우는 학자적 소신과 그 소신을 펼치는데 있어서 후원자와의 조화로운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과 치밀한 계획성 등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나라의 뮤지엄의 좌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당면한 문제점과 현실적인 제약 요소들을 파악하여 그 인식을 바탕으로 출발은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뮤지엄의 관장으로서의 본분을 져버리지 않는 훌륭한 관장이 우리의 시대에도 탄생하기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앞에서 살펴본 외국 뮤지엄 관장들의 예에서 본받을 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The Role of Director in the Management of a Museum

Ha, Kye-hoon
Adjunct Professor of Dankook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define the role and the qualification of director in the management of a museum in order that Korean museum society may set a desirable model of the directorship of a museum. Methodologically this study looked into the examples of European countries and the United States wh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eir institutions.
Three directors--Dominique Vivant Denon, the first director of the Louvre Museum, Wilhelm von Bode, the pioneer of German museums, and Alfred H. Barr, the founding director of the 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were taken for examples of successful directors.
As has been emphasized by Carl E. Guthe in 1957, the personality and ability of a director can either make or mar the success of a museum. At the beginning stage, however, directorship has been frequently assumed by such people as connoisseurs, artists, and even bureaucrats who are less professional but relatively freer from the financial threat upon museum management than most of todays directors.
Nowadays the function of museum has changed from collection-focussed to visitor-oriented operation, and the importance of financial stability for a better service for visitors is emphasized more than ever. It consequently requires more active and sociable attitude and ability of museum directors aside from their scholarship.
Situation in Korea has not been far different from this. As Korean society has short history of managing museums in comparison with museum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it is, in a sense, lucky to make reference to preceding trial and error of other countries.
From an affirmative point of view, we also have such exemplary people as Dr. Jaewon Kim, the first director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Mr. Hyungpil Joen, the founding director of the first private museum in Korea at the early stage of museum history.
What is common in those people is that regardless of their respective economic and socio-political environments, they have devotedly tried to overcome the present difficulties for the better future of their museums. Upon the lessons from them we can set a desirable directorship for the present and the future of our museums.


- 출처 / 제1회 예술경영연구학회 발표원고 (2001.5)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