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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기‘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2

윤진섭

Ⅶ. 끝맺는 말

본 연구는 1967년에서 1970년까지 약 4년 동안 전개된 해프닝 중에서 급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골라 당시의 해프너들이 어떤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 이유는 워낙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차에 사건이나 사실(史實) 중심의 통사적 접근보다는 해석적 차원에서 각론적으로 다룰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해프닝을 다룬 이 글에서 ‘급진적’ 혹은 ‘급진성’이 가리키는 의미는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급진주의(radicalism)와는 다른 개념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급진주의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의 ‘급진적’ 혹은 ‘급진성’은 예술 활동에 따르는 작가들의 성향이나 기질,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나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시도한 급진적 경향의 해프닝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행위미술은 4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술사에서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48)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행위미술의 속성상 저널에 의해 뉴스거리로 다루어지거나49) 미술계조차 이들을 일종의 변방이나 별종의 외인부대로 취급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만든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개척기에 활동을 하다 작고한 작가들의 경우, 사진이나 기록 등 미술사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료조차 확보된 것이 많지 않다. 특히 정찬승의 경우50) 오랜 미국 생활 탓인지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 실제 작품이나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미술사 분야에서 이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학술적 접근이 요구된다 하겠다. 현재 국내에는 약 1백 여 명에 이르는 행위예술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위예술제만해도 대략 10여 개에 이른다. 51) 이들에 대한 지원과 보다 깊은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예술논문집, 대한민국예술원, 2010>



<주석>

1) 행위미술에 해당하는 영어명은 ‘performance’이다. 따라서 ‘퍼포먼스’라고 국어로 써야 하나 여기서는 ‘행위미술’로 통일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미술계에서 행위미술이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또 ‘행위예술’이라고 할 경우 그 범주의 폭이 넓어져 연극이나 무용, 음악, 마임 등 공연예술 분야에서 행해진 퍼포먼스까지 포괄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분야를 다룬 다수의 글에서 ‘행위예술’이라고 쓴 적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혼선이 빚어질 개연성이 있으나, 미술에 국한해서 기술하게 될 이 글에서는 ‘행위미술’이라는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2)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것.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155-181쪽.

3)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역어이다. 이 말 속에는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해 취하는 일정한 태도가 함유돼 있다. 후위(後衛)에 대한 반대 개념인 전위(前衛)는 ‘-의 앞’이라고 하는 접두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다. 이 점은 아방가르드가 전투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전쟁용어에서 차용됐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 의미가 보다 명료해진다. 이를테면 적진을 향해 행군해 나아갈 때 대열의 맨 앞에서 전방을 관측하는 척후조가 바로 전위에 해당한다. 유렵에서 아방가르드는 매우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특히 불어권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돼 왔는데, 전쟁용어로서의 기원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문화사의 측면에서 볼 때, 아방가르드라는 이 다분히 논쟁적인 메타포는 정치학, 문학, 예술, 종교의 영역에서 자기의식적으로 앞선위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H.R 야우스의 정의에 의하면 근대를 의미하는 ‘모던(modern)’은 “오늘의 것과 어제의 것 사이, 시시각각의 새로운 것과 옛것 사이의 경계”를 표시해 주는 말이다. 경계란 일종의 구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의 각기 다른 신념을 구분시켜 준다. ‘모던’ 혹은 ‘모더니티’란 말은 오늘이란 의미에서 어제를 의미하는 ‘고대(antiqui)’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며, 이 말은 후위와 대를 이루는 전위와 유사한 함의를 지닌다. 무엇에 앞섰다는 것은 곧 ‘새로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세력은 그 특유의 호전적 자세, 비타협주의, 과감성, 도전의식, 시간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확신 등을 무기로 구세대를 위협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로부터 진보의 개념을 차용한 아방가르드는 혁명정신을 토대삼아 정치적 문화적으로 급진적인 노선을 걸어왔다. 윤진섭, 앞의 책 20-21쪽에서 재인용.

4) 원제는 Teoria dellarte davanguardia, Bologna, II Mulino, 1962.

5) 레나토 포지올리, <아방가르드 예술론>, 문예출판사, 박상진 역, 1996, 22쪽.

6) 레나토 포지올리, 앞의 책, 22쪽.

7) [청년작가연립전]은 1967년 12월 11일부터 17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다. 홍대 출신의 신진작가들이 주축을 이룬 <무동인>의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등을 비롯하여 <신전>의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 그리고 <오리진>의 최명명, 서승원, 이승조, 김수익, 신기옥(김택화, 이상락, 함섭은 불참) 등이 참가하였다. 이 전시회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화단을 지배해 온 앵포르멜에 반발하여 오브제, 설치, 해프닝 등 ‘탈(脫) 회화’ 내지는 실험적 경향에 주력하였다. 이 그룹 중에서 회화를 추구한 것은 ‘기하학적 추상’을 시도한 <오리진> 그룹이 유일하다.

8) 이 해프닝의 대략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자동인 한 사람(김영자)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비닐우산을 펴는 것과 동시에 전원이 의자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마치 강강수월래와 같은 움직이는 바퀴는 합창을 시작했다. 곡목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그런 다음 의자에 앉은 여자의 우산 위에 남녀들이 달려들어 촛불을 꽂았다. 우산을 든 여자는 의자에서 내려 그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남녀들도 그녀를 따라 돌았다. 합창이 다시 시작됐다. 한참을 그렇게 떠든 다음 우산을 든 여자가 다시 의자에 앉자 남녀는 다시 달려들어 촛불을 불어 껐다. 그 때 미친 듯 남녀들은 비닐우산을 가련할 만큼 찢어버렸다. 갈기갈기 형태만 남은 우산을 그들은 한꺼번에 달라붙어 휴지와 새끼줄로 똘똘 감기 시작했다. 다시 합창. 땀이라도 흘릴 듯이 그들은 휴지와 새끼줄로 뭉쳐진 우산의 찌꺼기를 지근지근 밟아버리고 있었다......”, 주간한국, 1967. 12. 17. <특집-67 화제작-미술, 청년작가연립전>.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사, 2003, 71-73쪽에서 재인용. 미술사가 김미경이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이 해프닝의 실연 장면을 기록한 동영상 자료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녹화 테이프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07년의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국립현대미술관)에서였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이 이 전시담당 큐레이터인 김경운 학예사에게 테이프의 존재를 알려줘 공개가 가능했다. 이 테이프의 발견은 전혀 뜻밖이었다. 이의 출현으로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당시 해프닝의 전모를 알 수 있었고, 한국 최초의 해프닝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윤진섭, 행위미술과 자료발굴의 중요성, 서울아트가이드. 2007년 10월호 참조.

9) 김미경, 앞의 책, 73쪽 참조.

10) 김미경, 앞의 책, 73-5쪽 참조.

11) 당시 시위는 시청 앞에서 세종로를 거쳐 종로 2가, 삼일로, 소공동으로 이어졌으며, 그 와중에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교통경찰에 걸려 참가자 가운데 일부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김미경, 앞의 책, 47-50쪽을 참고할 것.

12)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85-6쪽.

13) 1968년 당시 17회 국전을 앞두고 기존의 예술행정이 문교부에서 문화공보부로 이관되면서 다음과 같은 국전개혁안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1. 경복궁 미술관을 개수해 국전이 끝난 후 현대미술관으로 발족시킨다. 2. 경복궁 미술관의 상설전시 및 현대미술관 겸용 사용. 3. 우수작을 낸 추천작가에게도 대통령 수상자와 같은 유럽여행 특전을 준다. 4. 심사위원 선정절차의 변경. 김미경, 앞의 책, 48-9쪽.

14) 김구림(1936- )에게 붙는 수식어는 매우 다양하다. ‘미술의 이단아’, ‘전위예술가’, ‘한국의 아방가르드’ 등등다양한 별칭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는 1960년대 후반이후 국내 최초로 메일아트를 시도한 것을 비롯하여 <24분의 1초의 의미>(1970)와 같은 실험영화, 그리고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을 비롯한 해프닝과 함께 판화, 대지예술, 설치, 오브제 등 미술 외에도 실험연극, 무용,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전영백 엮음,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자화상>, 궁리, 2010, 중에서 ‘김구림’편을 참고할 것.

15) 필자와 김구림과의 인터뷰, 2010. 10. 4. 오전 9:30-10:17. 여기서 1주일이라고 한 것은 당시 이를 보도한 신문자료에 근거한 오기(誤記)인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김미경 앞의 책 104쪽을 참고할 것. “김구림은 김차섭과 함께.....우편 시스템을 이용해 80명의 화가와 20개 신문사 앞으로 3번씩 총 300여 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16) 전영백 엮음,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자화상-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궁리, 2010, 84-5쪽에서 재인용.

17) 신용카드 번호 등 개인정보를 알아낸 뒤 이를 범죄에 이용하는 전화금융 사기 수법을 일컫는다. 피싱(Phishing)은 ‘개인정보(private data)’와 ‘낚시(fishing)’의 합성어이다. 국세청이나 검찰, 경찰, 우체국 등 공공기관을 사칭하여 사기를 치는 다양한 유형들이 발생하고 있어 최근 들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18) 레나토 포지올리, 앞의 책, 22쪽.

19)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78-9쪽.

20) 윤진섭, 앞의 책, 67쪽.

21) 신현준 외, <한국 팝의 고고학 1970-한국 포크와 록, 그 절정과 문화>, 한길아트, 2005, 19-20쪽.

22) 선데이 서울, 법당에 사이키와 고고춤을, 1970. 6. 28, 김미경, 앞의 책, 125쪽.

23) 제4집단 결성 당시 ‘초고’(김구림 소장).

24) 전영백 엮음, 앞의 책, 85-9쪽에서 재인용.

25) 1970년 8월 15일 오전 11시, 사직공원에서 가진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을 가리킴.

26) 전영백 엮음, 앞의 책, 88쪽.

27) 전영백 엮음. 앞의 책, 88쪽 참조. 당시 <제4집단>의 정관 제4조를 보면, 서울특별시에 본부를 두고 각 도, 시, 군, 읍, 면, 동, 리 등 행정구역에 해당하는 ‘집단’을 둔다고 명기돼 있으며, 또한 제6조 7항에는 상원, 중원, 하원위원 등 마치 의회 제도를 연상시키는 구조로 돼 있어 의심을 살만한 요소가 있었다.

28) 윤진섭, 김구림과의 인터뷰(2010. 10. 4). 단체가 해체된 후 얼마 안 있어 여권 신청을 위한 신원조회를 했는데, 하루는 용산경찰서에서 호출, 서로 갔더니 담당 형사의 얼굴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형사 왈,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는데, 요원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얼굴을 때리면서 “제4집단‘이 수괴를 ‘통령이라 부르고 지방에 지부를 둔 것을 보니 국가 전복을 기도할 위험이 있는 자들인데 그냥 뒀느냐?”면서 때렸다고 말했다. 김구림은 또 서장이 자신을 융숭하게 대접한 이유는 신문사 국장들 몇이서 남대문경찰서장에게 빗발치듯 전화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29)미술계에서 급진적 정치성이 앙가주망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0년대 초반 ‘현실과 발언’ 그룹의 창립에서 비롯되지만, 그 이전에 현실참여적 경향을 표방한 그룹으로는 1969년, 당시 서울대 미대 학생이었던 오윤, 오경환, 임세택 등이 주동이 된 ‘현실동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카탈로그에 수록된 <현실동인 제1선언>(김지하 지음)과 작품도판 일부가 관계기관에 의해 문제시되자 서울대 교수들의 만류에 따라 개막 직전에 자진 철회되었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158쪽.

30) 미술인들이 작품의 표현 내용과 관련하여 구속을 당한 경우는 주로 반공법 위반이 중심을 이루었다. 1987년 [반(反)고문전], [한국 민중판화전] 등에 참가한 홍성담은 1989년 ‘민족민중미술 전국연합’이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사진을 북한의 평양축전에 보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이적 표현물 제작, 유포)으로 구속돼 3년간 옥살이를 한 바 있다. 한편 같은 해에 ‘모내기’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린 신학철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개월 간 구속되었다. 1991년 서울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평론분과 회원으로 활동하던 최열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안양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다. 당국에 의해 작품압류와 작가 연행, 구류 등 <20대의 힘>전 사태가 일어난 것은 1985년이었다. 민중미술은 이를 계기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31) 이 해프닝에 대한 반응은 매우 다양했다. 비난과 찬사가 엇갈렸다. “문명비판적 경향일 것이다. 외국에서는 직업화된 일이다. 우리도 비판하기 전에 이해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기백이 가상하지 않은가.”(미술평론가 이일), “외국에서는 벌써 쇠퇴되어 가고 있는 일이다. 무시는 못하지만 모방이라면 비평해야 한다.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거야 없지 않는가?”(화가 남관), “일종의 깡패일 것이다. 어줍잖은 발언권의 과시이며 욕구불만의 발산이다. 그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정신병자가 되어 입원하든지 자살하고 말 것이다.”(동국대 이기영 교수) 등등이 당시 지식인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한편, 신문을 비롯한 언론은 “날씨도 추운데 이 무슨 미친 젓이냐?”는 관객의 반응을 전했으며(1968. 10. 19. 경향신문), “찬 강바람의 모래 속에 몸을 묻고 동료로부터 찬물 세례까지 받으며 매저키스틱한 감흥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1968.10.19, 중앙일보)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정강자, <꿈이여, 도전이여, 환상이여>, 소담출판사, 1990, 51-2쪽.

32) 정강자, 앞의 책, 50쪽.

33)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낙청의 주도로 <창작과 비평>이 창간된 해는 1966년이었다.

34) ‘한강변서 해프닝 쇼’, 조선일보, 1968. 10. 18. 김미경, 앞의 책, 97쪽에서 재인용.

35) 윤진섭, 김구림과의 인터뷰, 2010. 10. 5.

36) 윤진섭, 김구림과의 인터뷰, 2010. 10. 5.

37) 이 연행을 빌미로 김구림은 ‘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남대문경찰서에서 형사들로부터 밤새 취조를 받았다. 혹시 간첩과 접선한 것은 아니냐, 거사 자금은 누가 대 줬느냐 라고 물으며 뒤를 대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단지 예술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새 시달린 뒤 아침이 되자 서장이 부르더니 융숭하게 중국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한편, 정강자는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뒤, 하루 밤을 거기서 보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Ⅲ장을 참고할 것. 다음은 같이 연행된 정강자의 증언.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된 우리는 따로 나뉘어서 보호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는 여자 보호실로, 그들(김구림, 정찬승, 손일광을 가리킴, 필자 주)은 남자 보호실로 들어갔다. ....(중략)......이튿날 우리는 시커먼 닭장 트럭에 실려서 영등포 지원(支院)으로 끌려갔다. 직결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통금위반자, 좀도둑, 술 취해서 싸운 주정뱅이, 보건증이 없어 끌려온 창녀.....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판사는 우리의 죄목이 군중들을 선동한 것이며, 앞으로는 절대 대중 앞에서 이상한 행위를 해서 군중을 선동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고는 훈방해 주었다. 정강자, <꿈이여, 환상이여, 도전이여>. 소담출판사, 1990, 52-3쪽.

38) Jose Ortega y Gaseet, , 53쪽.

39) 오르테가가 사용하는 비인간화의 예술, 추상예술, 새로운 예술, 젊은 예술이란 용어는 곧 아방가르드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레나토 포지올리, 앞의 책 제3장 낭만주의와 아방가르드를 참고할 것.

40) 윤진섭, 앞의 책, 62-3쪽.

41) 선데이 서울, 1970. 8. 16. “해프닝 情報, 琯 메고 藝術하니 警官이 웃기지마”, 김미경, 앞의 책. 131쪽. “행진은 사직공원에서 광화문, 남대문을 거쳐 용산 제1한강교 밑 백사장까지 이어져 마지막에는 화장식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대지미술’과 ‘해프닝’을 한다는 이들의 항변은 관을 발로 차며 ‘웃기지 마쇼’라는 경찰들의 대꾸만 들었을 뿐이었다.”

42) 오르테가에 의하면 현대예술(전위예술)은 본질적으로 비통속적일 뿐만 아니라, 반통속적이기 때문에 공중을 두 부류로 갈라놓는다. 첫째는 ‘현대예술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는 소수’요, 둘째는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다수’이다. Jose Ortega y Gaseet, <예술의 비인간화>, 박상규 역, 덕문출판사, 1979, 21쪽.

43) Donald Kuspit,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2.

44)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재원, 2000, 60-1쪽.

45) 이는 가령 김구림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가 1970년 6월에 ‘제4집단’을 결성한 이래 대표격인 ‘통령’이 돼 경찰서에 연행된 일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 그가 채 두 달이 못되는 기간동안 경찰의 미행에 시달려 기자간담회를 갖고 ‘제4집단’을 해체한 일은 사회개조나 사회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의 의지가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를 비롯한 초기 행위예술가들에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그로 인한 그들의 행동은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문화비판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수동적인 허무주의(passive hihilism:F. 니체)는 페터 뷔르거의 용어를 빌리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로서 사회에 대한 저항적 가치를 잃고 표류하게 된다.(페터 뷔르거, ,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 최성만 역, 심설당, 1986, 98쪽 참조)

46) 해프닝을 포함하여 이 시기의 실험미술에 대한 미술사 분야의 연구로는 김미경의 <한국의 실험미술>(시공사, 2003)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한 이 책은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돼 준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는데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한국의 실험미술이 전개된 60-70년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고 일본을 비롯한 해외 미술과의 영향관계를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론 오류나 오기(誤記)로 여겨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이 책이 지닌 장점에 비하면 말 그대로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개정판이 나온다니 더욱 심화된 연구 성과를 기대해 본다.

47) 민중서관 판, 엣센스 국어사전에 따르면 급진주의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정체, 사회 제도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주의’를 가리키며, 네이버 백과사전은 ‘현존하는 정치체제나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온건한 개량, 수정주의를 부정하는 주의’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는 ‘특히 정치에서 급진적인 성향이나 상태’로 간단히 풀이하고 있다. 원래 ‘뿌리’를 뜻하는 라틴어 ‘radix’에서 유래한 이 말은 현재의 사회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이 경우 ‘래디컬’이 급진이라고 칭해지는 이유는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제조건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고 서둘러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급진주의는 겉으로는 혁명적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사회 변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반면, ‘급진적(radical)’이란 말의 의미를 ‘목적, 이상 등을 급격히 실헌하려는 경향(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근본적이거나 혹은 극단적인 변화를 선호하는, 특히 사회 혹은 경제적 구조에서 기본적인 변화를 선호하는(a) favoring fundamental or extreme change; specif., favoring basic change in the social or economic structure) 등으로 풀이할 때, 이 글에서 다루는 해프닝 작가들의 성향이나 태도는 정치적인 의미를 띤 ‘급진주의(radicalism)’와는 대체로 무관한 편이다.

48)미술사에서 1970년대의 행위미술을 다룬 연구로는 김미경의 <70년대의 실험미술> 외에 강태희의 <우리나라 초기 개념미술의 현황:ST 전시를 중심으로>, <70년대의 행위미술 이벤트>, 윤난지의 <김구림의 해체> 등이 있으며, 비평적 접근으로는 김영재, 장석원 등이 쓴 몇 편의 비평문이 있다.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한 미술사적, 비평적 접근이 더욱 시급한 때이다.

49) 이 점은 해프닝의 탄생지인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에 의하면 초기에 해프닝을 둘러싸고 숱한 오해가 빚어졌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84쪽을 참고할 것.

50) 정찬승은 국내 활동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브루클린의 그린 포인트라는 동네에 살면서 ‘정크 아트’에 몰입했다(김구림과 필자와의 인터뷰, 장석원, <체험의 예술론-삶과 예술의 열정적 보고서>, 미술통신, 1990. 12쪽)). 그러나 현재 그의 작품이나 자료는 전해진 것이 없으며 유족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다.

51)한국에서 행위예술이 정기적인 대규모 국제 페스티벌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를 필두로 [한국실험미술제], [부천국제행위예술제}, [김천국체행위예술제], [삼천포국제행위예술제], [전주국제행위예술제], [고령국제행위예술제], [월미도행위예술제], [Pan Asia Performance Network] 등 10여 개가 넘는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한국 행위미술의 두드러진 변화는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구축이다. 이는 한국의 행위미술이 한국이란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페이스북(Facebook)이나 트위터(Twitter)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ing Service:SNS)이 유행하고 있는 요즈음, 이는 미술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형태의 창작과 감상, 소비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미디어 아트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영상작가 이이남은 요즈음 애플사의 앱 스토어를 이용한 동영상 작품의 모바일 서비스를 시도하고 있다. 이제 미술은 비단 전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공간 어디에서나 예술의 향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최근의 한 논문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이제 창조는 손끝에서 나온다.(Now creation comes from ones fingertips)“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한 바 있다. 모바일폰 사용자들에 의해 전개될 새로운 형태의 예술작품의 감상과 창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에 따라 행위예술 역시 보다 광역화하고 개념화한 형태의 작품이 등장하게 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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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토 포지올리, <아방가르드 예술론>, 박상진 역,
1996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전시도록,
2007


ABSTRACT

Yoon, Jin Sup(art critic/prof. Honam
university)

The history of Korean performance art is not long. After the
first happening in 1967 , Korean
performance art has been known by several different names, for example,
Happening in 1960s, Event in 1970s, Performance after 1980s. Western artists,
curators and art critics normally use the term Performance Art to describe all
eras in this genre, they may find the other names confusing. Korean art critics,
however are aware and accepting of these various names most Korean art
historians and art critics use all three terms in their papers to discuss this
genre.This paper deals with several early Happenings and the avant-garde art
movement that evolved around the same time.

Investigating particularly
from late 1960s to early 1970s with a focus on
their radical characteristics. In this discussion it is important to be aware
how radical can differ from radicalism. I would like to state that in my
viewpoint the early Happenings were not using radicalism as an attempt to
present views in a political way but was more a the radical trend particularly
shown by a group of performance artists, such as Kulim Kim, late Chan-seung
Jung, late Kuk-jin Gang, Kang-ja Jung.

In late 1960s and 1970s, Kulim
Kim, Chang-seung Jung and Kuk-jin Gang, Kang-ja Jung performed radical
Happenings in many public spaces such as cafes, city streets, on the riverside.
These Happenings were very aggressive and confronting both to the general public
and the city authorities. The events sometimes evoked social scandals and often
strong public reactions. In fact several times Happening artists were arrested
by the police due to provocative nature of their performances . The Happenings
and the subsequent cultural demonstrations that followed affected Korean
contemporary art and stimulated many artists. In this paper I intend to describe
the artists involved in these events, their activities, the relationship they
had with avant - garde art and the effect of their activities and interactions
on the general audi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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