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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적 이미지로서의 소나무와 매화, 폭포

윤진섭

소나무를 그린 이재삼의 근작들은 달빛에 노출된 것들이다. 따라서 밝은 대낮에 보는 소나무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재삼의 소나무 연작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처럼 흑백으로 사물의 이미지 표현을 제한적으로 설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이번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이전에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한 인물화를 비롯하여 대나무, 매화 연작에 이르기까지 목탄을 주 재료로 한 그 특유의 단색화를 시종일관 그려온 것이다.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를 소재로 한 이재삼의 그림들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전통 문인화에 젖줄을 대고 있다. 매란국죽(梅蘭菊竹)이라는 소위 사군자와 소나무가 포함된 십장생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그림들이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면서도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것이 주는 느낌이란 곧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한국이라는 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낀 그러한 정서와 맞닿아 있다. 달빛은 세계 모든 나라, 모든 문명권을 고루 비추되, 인심과 역사, 문화, 그리고 주변 풍경과의 조응 속에서 독특한 감흥과 정서를 낳는다. 그것들은 오랜 역사를 두고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이재삼이 그리는 소나무는 한국이라는 풍토 속에서 형성된 한국만의 소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아시아라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만의 소나무인 것이다. 한국의 독특한 기후와 토양이 만들어낸 한국만의 소나무, 그것이 이재삼 회화의 소재다. 그럴진대, 그의 그림이 한국의 독자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소나무와 얽힌 각자의 추억과 사연을 회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서적 감응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그의 그림들이 지닌 의미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이재삼 소나무 그림의 특징은 군집이 아니라 단독의 대상을 그리는데 있다. 그는 소나무들이 집단적으로 서식하고 있는 숲보다는 독야청청하듯이 홀로 서 있는 노송을 즐겨 그린다. 그는 마음에 드는 대상을 찾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닌다. 여기저기서 정보를 수집하고 조사한 후 직접 발품을 팔아 현장을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소재들이 이번 <달빛> 연작에 반영된 것이다. 자세히 보니 <달빛>에 부제가 붙어있다.

‘심중월(心中月)이라!’ 마음속의 달이란 뜻이다. 이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마음씨를 닯고 있지 않은가. 강릉에는 경포대가 있는데 거기에는 5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즉, 실제 하늘에 뜬 달, 경포대 호수에 비춘 달, 술잔 속의 달, 사랑하는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달, 그리고 마음속의 달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일러 한국의 정서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러한 정조를 우리의 선인들은 숱한 시문과 그림 속에 담아냈다. 그렇다면 내가 이재삼의 소나무와 폭포 그림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의 넉넉한 정서와 풍류를 연상한 것도 매우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전통을 거론하지 않되, 전통을 오늘의 문맥에 접목시키는 일은 곧 현대화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변죽을 쳐 가운데로 진입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외국인의 눈에 한국의 독특한 자연과 예술의 향기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곧 성공한 예술임에 틀림없다. 이재삼의 작품을 보면서 답답할 정로로 치밀한 묘사, 그림의 전면을 덮은 흑백의 콘스라스트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 또한 작가의 개성이요 화풍이라 치부하면 그만이다. 일례로 그의 소나무 둥치에 대한 묘사는 양식화돼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만의 개성이요, 독자적인 양식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은 보는 자들의 기호에 따른 것으로 굳이 거론할 이유가 없다.

그의 소나무 그림에서 발견되는 이 양식화는 가령, 폭포를 그린 그림 속의 암벽이나 물의 묘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의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재현이 아니라 마음속에 비친 사물의 이미지 곧, 심상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는 작가 스스로가 작품의 명제를 ‘심중월’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달빛이 사물에 고루 비추는 자연 현상을 받아들이되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마음에 투영되는 바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소나무, 그리고 폭포로 이어지는 그의 회화적 행렬이 다음에 머물 곳은 과연 어디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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