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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바라보는 깊은 시선

윤진섭

Ⅰ. 1990년대 신세대 미술의 등장과 그 배경

이용백에 관해 논할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이른바 신세대의 등장이다. 1987년, <뮤지엄> 그룹으로 대변되는 ‘신세대’ 논의는 전후 한국 화단의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등장과 맞물려 신세대 미술에 관한 담론의 단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용백은 정확히 말해서 <뮤지엄> 그룹의 멤머들인 고낙범, 노경애, 명혜경, 이불, 정승, 최정화, 홍성민 등등과 비슷한 연배이면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선후배 관계로 맺어져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 태생인 <뮤지엄> 그룹 멤버들과 중반에 태어난 <황금사과> 멤버들 사이에는 그 어떤 미감적 단절이 놓여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편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용백은 한 인터뷰에서 이기범, 박기현, 백광현, 백종성, 윤갑용, 이상윤, 이용백, 장형진, 정재영, 홍동희 등등이 결성한 <황금사과> 그룹이 이미 1987년 무렵에 태동되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비록 이 그룹이 공식적으로 데뷔한 때가 1990년(관훈미술관)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전에 이미 발아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신세대 미술, 그 반항의 상상력>이란 글을 통해 이 두 그룹이 지닌 화단사적 의미를 밝힌 바 있다. 이른바 ‘신세대’ 혹은 ‘X세대’, ‘압구정동 문화’ 등등으로 부르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두 그룹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그 이전 세대와는 미감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단정하고 그 내용을 소상히 밝힌 바 있다. 그 내용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적어도 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진행 과정에서 이들 신세대 작가들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미적 특질은 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을 점유한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양분된 대립구도를 초월할 수 있는 창작방법론을 수용했다는 데 있다. 퍼포먼스, 컴퓨터, 멀티미디어, 인쇄, 테크놀로지, 키치적 오브제와 같은 각종 매체에 주목한 것이다. 매체가 지닌 특성에 주목하면서 매체를 자의식 표현의 유일한 도구로 간주했던 이들의 담론 내용은 탈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1)

이 시기에 등장한 또 하나의 실험 집단인 이 1980년대의 화단 공간을 가리켜 ‘흑백 텔레비전’으로 묘사한 것처럼, <황금사과>는 당시 선언문을 통해 이 시기의 이념적 대립을 “다양성의 공존과 내부적으로는 양분된 극단적 측면이 내재된 모순을 안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중심에 이용백이 있었다. 그는 십여 명에 이르는 <황금사과> 멤버 중에서도 유독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화단의 ‘문제작가’로 굳건한 위상을 확보했다. 그 동안 다른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져 붓을 꺾거나 회화 중심의 작업을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오브제, 퍼포먼스 등등의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포괄하면서 미술의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Ⅱ. 독일 유학과 방황, 그리고 정신적 성숙

이용백은 1990년대 초반에 <황금사과> 그룹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기획전을 가진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에 이른다.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1996년, 한국에 전대미문의 IMF 사태가 터지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유학을 떠나기 전, 한국 사회 특유의 경직성과 좌우의 이념적 대립에 의한 이분법적 사회 구조, 질식할 듯한 학교 분위기에 끼어 방황을 하던 그는 마침내 독일에서 정신적 해갈을 하게 된다. 이용백은 요셉 보이스, 백남준, 빌 비올라, 브루스 나우만 등등의 대형 전시를 보면서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기에 이른다.

그가 오늘날 사십대 중반의 촉망받는 미디어 아트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에는 이 같은 유럽 화단 체험이 중요한 모멘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여러 대담을 통해 당시 독일에서의 화단 체험이 자신이 한 사람의 작가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는 다년간에 걸쳐 자신의 설 자리를 둘러싼 내포와 외연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용백의 인터뷰와 글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사회 현상이나 미술계에 대한 투명한 통찰과 깊이 있는 분석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들이 지닌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용백은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한국 사회 특유의 경직성에 관한 심리적 ‘트라우마(trauma)’를 지니고 있다. 이는 비단 그의 세대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세대에서도 보이는 심리적 특징이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이를 내면화하면서 의식적인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어머니에게서 ‘데모’하지 말라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노라고 한 인터뷰에서 술회한 바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사회는 작품이 탄생되는 모태이다. 미술의 경우, 가장 순수한 조형적 실험조차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소거돼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사회적이라는 역의 모순을 지닌다.

1996년, 독일에서 돌아와 가진 첫 개인전(1999, 성곡미술관)의 경우, 240평에 이르는 드넓은 공간을 메우느라 트럭 6대분의 작품이 운송되었지만2), 이상스러울 정도의 화단적 무관심과 비평적 침묵 속에서 한때 그는 깊은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설치와 미디어 아트의 ‘인터랙티브’가 중심이 된, 당시 화단 사정으로는 새로운 시도임에 분명한 이 전시를 전후하여 가진 일련의 발표에 대한 국내 화단의 무관심은 이용백이 비평에 대해 불신을 갖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2002년에 이용백이 발표한 <증발된 사물들(Vaporized Things)>(2채널 비디오 인스톨레이션:7분)은 IMF를 맞이하여 방황하는 한국의 젊은 직장인을 소재로 한 퍼포먼스 작품이다. 그는 물이 가득 채워진 수영장 풀에 압축 공기통을 입에 문 정장 차림의 한 남자를 등장시켜 대 사회적 발언을 가했다. 이 퍼포먼스에서 명퇴자를 상징하는 검정색 물안경을 쓴 남자 행위자는 노란색 소형 산소통을 입에 문채 검정색 가방을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간다.

수중 카메라는 이 행위자가 물의 압력을 거스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행위를 좌우전후, 위 등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하였다. 행위는 풀의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졌지만, 단순한 만큼 행위의 상징적 의미가 주는 반향이 매우 컸던 작품이다. IMF라고 하는, 한국 사회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국면을 앞에 놓고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 담긴 수작(秀作)이다. 특히 행위자가 허리에 찬, 마치 폭탄을 장착한 것처럼 보이는 노란색 허리띠는 불길한 느낌을 주면서 ‘자폭 사회’에 대한 강렬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지속되는 비평적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용백은 꾸준히 작품을 구상하고 발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용백은 그런 점에서 볼 때 ‘매체확산형’적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는 매체에 빠져 자체의 실험을 즐기는 작가라기보다는 열린 의식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매체나 장르에도 개의치 않는, 매체활용적인 작가다. 그가 비단 미디어 아트뿐만이 아니라 필요하면 전통적인 장르에 속하는 회화와 조각에도 손을 대는 것을 보면 이 점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물론 실험적인 태도는 이 경우에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Ⅲ. 도전과 실험의 시기:2000년 이후의 활동

<예수-부처>(1994-2000, 싱글채널 비디오, 5분)는 1993년에 제작된 것을 2002년에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피를 흘리는 고난의 예수상과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다양한 스틸 이미지 컷으로 만들어 모핑(morphing) 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 존재하는 예수와 부처의 이미지를 촬영하여 수많은 사진들을 컴퓨터 작업을 통해 합성해 예수의 모습에서 부처의 모습으로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중성적인 상을 구현해 낸 것이다. 이용백은 이 동영상의 이미지를 구현한 후에 본래의 스틸 이미지는 삭제하였다고 말한다.

작가 스스로 이 점은 이 작업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그 이유는 관객이 보는 것은 예수도 부처도 아닌, ‘디지털화한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디지털화한 시뮬레이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정관념화한 성인(聖人)의 이미지에 대해 던지는 그 나름의 질문이 아닌가. 그것은 박제화한 예수나 부처가 아닌, 고뇌하고 살아 숨쉬는, 즉 감정을 지닌 인간상에 더욱 가깝다. 즉, 이용백은 컴퓨터 합성 기술을 통해 인간적인 성인의 상을 구현해 낸 것이다.

대상, 즉 작품과 관객 간의 상호작용(interaction)을 시도한 작품으로 <인공감성>(2000, ASTA)을 들 수 있다. 5채널 인터랙티브 설치작업인 이 작품은 박제된 소와 관객이 나누는 대화가 주축을 이룬다. 물론 이 때의 대화는 소와 인간이 나누는 직접적인 대화가 아니다. 전시장 한 가운데 박제된 소가 선반 위에 누워있고, 그 반대편에 다섯 개의 호흡기가 달린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소의 가슴뼈에는 모터, 아랫배에는 풍선, 눈에는 스테핑 모터가 장착돼 있어서 자극을 주면 움직이게끔 설계돼 있다. 이 작품은 관객이 호흡을 하면 소의 각 부위에 연결된 장치를 통해 반응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한 점이 특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예술의 실험을 통해 작품에 관객참여적인 성격을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이용백에게 있어서 군사문화의 잔재는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늘 붙어 다니는 일종의 화두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독일에 갔더니 유럽의 친구들은 늘 소재에 궁한데, 변화무쌍한 한국에서 자란 자신은 그래서 그런지 소재만큼은 다양해서 늘 자신이 있더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사-군인(Angel-Soldier)>은 군사문화의 소산인 한국 사회가 낳은 작품이다. 1966년생인 작가 자신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늘 접했던 군인에 대한 이미지가 이 작품의 저변을 관류하고 있다. 그는 천사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상정한다. 그는 “온 세상이 꽃이라면”이란 가설 하에서 이 작품이 출발한다고 말한다. ‘천사’와 ‘군인’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 두 단어의 대위법적 관계는 그래서 의미의 전복을 그 중요한 전략적 목표로 삼는다.

2005년도에 발표한 이 <천사-군인>은 싱글 채널 비디오를 중심으로 디지털사진, 오브제,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가 동원된 역작이자 이용백의 존재를 화단에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먼저 퍼포먼스를 보자. 수영장의 대형 풀에서 수중 촬영한 이 작품의 배경은 각종 꽃으로 장식돼 있다. 벽면을 온통 뒤덮은 화려한 꽃 더미를 배경으로 꽃무늬 위장복을 입고 꽃으로 위장한 군인들이 천천히 움직이며 걸어 나온다. 화면에 하나 둘 나타난 군인들은 차례로 정렬하며 전방을 응시한 채 사주경계 자세를 취한다. 군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총도 역시 꽃으로 뒤덮여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컴퓨터에 출중한 실력을 갖춘 젊은 해커들이 기업에 들어가 회사 컴퓨터의 방호벽을 치는 직업을 갖기도 하는데, 이러한 직업을 일러 ‘엔젤’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친구로부터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3) 강하고 남성적이며 공격적인 군인의 이미지를 꽃무늬를 통해 친화적이며 여성적인 이미지로 바꿔놓고자 시도한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중의적이다. 그것은 60년대 이후 우리나라를 점유해 온 군사문화의 폐해를 에둘러 비판하는 동시에 1990년대 이후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의 생활세계를 하나의 은유를 통해 성찰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작품은 오브제로도 제시되었는데 군복에 중장 계급장을 붙이고 명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백남준 등의 이름을 써놓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꽃무늬 전투복에 세계 예술계 거장들의 이름을 새긴 것은 일종의 유머러스한 상황의 설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고정된 이미지의 전복을 통해 예술사를 풍자한 것으로 새길 수도 있다. 예술가가 거장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곧 수많은 전투적 상황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는 1980년대로 대변되는 격변의 정치적 시기를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보냈다.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는 자신의 작품이 80년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90년대에 접어드는 동안, 그의 말을 빌리면 사회 각 분야가 게으름을 피며 어슬렁거릴 때 한국 사회는 고도의 정보화 사회 속으로 편입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미디어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용백이 매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은 이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 아트에서 매체의 기술적 실험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철저히 예술 표현의 도구로 삼기까지에는 매체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첨단의 미디어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경우는 허다하다. 컴퓨터에 의해 조종되는 미사일에서부터 전자오락에 이르기까지 최첨단 미디어는 대량살상과 정신적 황폐화라는 해악을 인류에게 가져다주었다.

컴퓨터 병기를 다루는 벙커 속의 병사는 자신이 쏜 미사일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마치 게임을 하듯이 전쟁을 수행한다. 반면에 테크놀로지의 순기능은 예술의 경우 미적 체험의 확장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관객이 작품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가운데 보다 직접적이며 호소력이 있는 예술상황이 발생하는 ‘상호작용적(interactive)’ 국면은 미디어 아트가 올린 개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미디어 아트의 상황은 기술 자체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보다 진지한 피드백(feedback)이 없는 상황에서 매체 자체의 실험에 몰두한다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이용백은 미디어 아트가 지닌 이러한 맹점을 깊이 통찰하며 자신의 작업을 수행해 나간다.

2007년도 작품인 는 가상과 실제의 간격을 허문 작품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하나의 아이콘으로 표시되는 사각형의 폴더는 무게가 0그램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400킬로그램에 달하는 인조대리석으로 조각되었을 때, 그것을 끄는(drag) 데에는 거기에 합당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는 중국 아이들을 동원해 퍼포먼스 작품으로 이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가상공간과 현실공간 사이에 서 발생하는 상호작용과 변형의 측면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 바 있다.4)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디지털 문명과 아날로그 문명 사이의 간극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보인다. 기호와 정보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디지털 폴더는 경우에 따라 아날로그, 즉 현실 속의 400 킬로그램짜리 인조 대리석 안에 담을 수 있는 재화보다 더 큰 값어치를 생산할 수 있다. 정보를 담은 폴더는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전송된다. 그러나 폴더 모양의 대리석 통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해 운송된다. 그것은 7천년 전 이집트의 피라미드 조성에 소용된 거대한 돌을 끄는 노예를 연상시킨다. 이용백도 그 점을 염려했는지 한 인터뷰에서 중국의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졌노라고 술회한 바 있다.

주지하듯이, 사이버 상의 재화의 교환가치는 현실상의 화폐의 교환가치와 동일하다. 그렇다고 할 때, 헤지 펀드를 통한 강대국의 제3세계에 대한 경제적 침탈은 사이버 상의 폴더로 상징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용백의 작업을 바라볼 때 그의 미디어 아트 작업이 지닌 의미는 더욱 증폭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아라리오 천안에서 열린 이용백 개인전은 거울을 소재로 한 미디어 작품 외에도 회화, 조각 등 아날로그 장르로 간주되는 표현술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의 전방위적 활동 영역을 살펴볼 수 좋은 기회였다. 이 전시에는 라는 제목의 조각 작품이, , 라는 제목의 회화 작품들이 출품돼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는 예수를 앉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것인데, 높이 4미터, 너비 3미터 40센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이 조각상은 소조(塑造) 제작과정에서 캐스팅한 마리아의 틀을 버리지 않고 예수의 몸으로 재활용함으로써 동형이체(同型異體)의 모습으로 변조한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아무튼 이 작품은 합성수지로 만든 지름 2미터의 원형 입체물에 여인의 눈을 그린 , 낚시용 플라스틱 가짜 미끼를 화려한 색상으로 재현한 대형 회화작품들인 연작과 함께 이용백의 미디어에 대한 개방적인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Plastic’이라는 주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이용백이 말하고자 한 것은 ‘시뮬라크르(simulacre)’로 대변되는, 즉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워진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인식의 재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주도하는 현대사회는 자칫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기 쉬운 문화적 환경에 노출돼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성형 수술은 가짜 미인을 양산하는 동시에 미의 획일화 현상을 낳고 있다. 가짜 미인이 진짜 미인을 구축(驅逐)하는 가치 전도의 시대에 이용백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산비엔날레와 난징트리엔날레, 그리고 최근에 해외 순회전을 마치고 돌아온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박하사탕>전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화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용백의 작품세계는 개방적인 작가의 작업태도에 힘입어 향후 그 작업 반경의 범위를 더욱 넓혀갈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약력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1, 3회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저서: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미진사), 한국 모더니즘미술 연구(재원), 몸의 언어(터치아트), 한국의 팝아트(에이엠 아트), 미술관에는 문턱이 없다(재원), 행위예술감상법(대원사)외 다수.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호남대 교수.


주석

1) 윤진섭, 신세대 미술, 그 반항의 상상력,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미진사, 1997, 37쪽.
2) 한국의 젊은 미술가들:45명과의 인터뷰, 김종호, 유한승 지음, 다빈치 기프트, 2006, 155쪽.
3) 미술평론가 이안과의 인터뷰.
4) 이용백, 이안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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