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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김치

윤진섭

밥과 김치


이제 겨우 32살 밖에 안 된,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우리의 문화예술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우리 사회의 수치스런 단면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 병폐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사태에 직면하여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파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댓글이 들끓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등 잊는 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번 사건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비록 영화계의 고질적인 구조적 모순에서 배태된 것이긴 하지만, 미술계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2의 최고은 사건이 미술계에서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수 만 명에 달하는 전업작가들 대부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구비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에 의존해서 창작에 임해야 하는 절박한 현실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뇌관입니다. 몇 년 전 전업작가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업작가의 약 60%가 연 5백만 원 미만의 작품 판매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단 한 점도 팔아보지 못한 작가가 상당수에 달한다고 합니다. 라면도 제대로 못 먹으며 창작에 임해야 하는 현실은 작가들을 생활보호대상자로 내몰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존심이 무척 센 사람들입니다.

'김치와 밥' 좀 달라고 이웃에게 쪽지를 붙였던 최고은 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녀의 이 마지막 메시지가 유언처럼 여겨지는 것은 생리적 고통 앞에 예술가로서의,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무너지는 현장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으로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제도적 병폐에 대해 가장 무력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던진 마지막 항거였습니다. 전시회 오프닝에서 호화판 부페 음식들이 넘쳐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들은 가차 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화판 잔치의 이면에 불기조차 없는 싸늘한 작업실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많은 전도유망한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로만의 문화대국,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허울 뿐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을 두루 살피고 현실에 적합한 문화예술정책을 펼쳐나가는 혜안입니다. 그래야 제2의 최고은 사태를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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