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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 이미지에서 ‘몸’으로

윤진섭

이미지에서 ‘몸’으로


김태호의 <내재율(Internal Rhythm)> 연작은 자연에 대한 유비로서 독자적인 문법에 의해 구축된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작용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시험’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몸’의 미학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수행적(performative) 양상을 띤다. 마치 발화(發話) 상황처럼 다양한 음소(音素)들이 어우러지면서 ‘무의미에서 의미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과도 같다. 자연에 대한 유비는 가령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보리밭이 정작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 다양한 색들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듯이, 단색으로 보이는 작품이 그 이면에 다채로운 색면을 함유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렇듯 시력의 한계를 극명하게 시험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써 김태호의 작업은 ‘본다’고 하는 지각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칼날에 의해 예리하게 깎여나간 물감의 살점이 분명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나 멀리서 볼 때는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증명해 준다. 그래서 김태호의 작품은 멀리 혹은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감상을 해야 제격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촉각적 성질은 때로 눈을 캔버스의 표면에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그럴 때면 어떤 사람은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물감이 통통하게 살이 쪘구먼.” 흑은 “칼에 벤 상처가 너무 깊어.”이러한 발언들은 김태호의 작품이 지닌 ‘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몸이 얇은 피부로 덮여 있어 그 안에 감춰진 살의 조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오직 하나의 피부색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다룬 대부분의 평자들이 그의 그림을 모노크롬 회화의 범주에 넣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단색이면서 동시에 다색이기도 하다. 이는 ‘거기에 그렇게 있는’ 다색 물감의 존재와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그것들을 단색으로 인식하는 감상자의 지각작용 사이에서 야기된 이율배반이다. 김태호의 <내재율> 연작이 야기한 이러한 현상은 ‘단색화(Dansaekhwa)’의 정의를 어렵게 만든다. 통상 단색화를 ‘한 가지 색만을 써서 그린 그림’으로 정의할 때, 과연 그의 작품을 이 범주에 넣어도 되겠는가 하는 상식적인 질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물감의 존재론적 측면에 입각해서 본다면 분명 다색화에 속할 것이나, 작품의 표면에 기인한 지각작용에 즉해서 본다면 단색화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양면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쟁점이 아니니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006년에 발간한 두툼한 화집을 살펴보면서 나는 김태호가 매우 논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이지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8년, <형태(Form)>연작으로 출발한 그의 화풍은 처음부터 기하학적인 엄격성을 지니고 있었다. 셔터를 모티브로 한 <형태> 연작은 검정색조의 바탕에 가로로 일정한 띠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이다. 그것은 일견 상점의 문을 가리는 셔터를 연상시킨다. 테이프를 사용하여 스프레이 작업에 의존한 <형태> 연작은 표면이 말끔하게 처리돼 있어 매우 깔끔하고 정갈한 인상을 준다. 이는 작가의 기질에 연유한 것으로 이러한 인상은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태호 회화의 특질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형태> 연작에 나타나고 있는 인체의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돼 있는 가로의 줄무늬에 역행하며 캔버스의 전면에 걸쳐 중첩돼 있다. 인체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들 역시 선 처리가 매우 깔끔하며 기하학적인 구조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인체의 이미지들이 연상시키는 ‘몸성’의 발현에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80년대를 거쳐 최근에 올수록 몸성의 구체화가 이미지에서 물감이란 구체적인 물질로 치환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이행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시기의 그림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정체란 단지 캔버스의 평면에 그려진 ‘도형(figure)’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셔터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가로의 줄무늬를 세로로 종단하며 화면을 수놓고 있는 인체의 이미지들 역시 허상에 불과하며, 단순히 인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허사(虛辭)’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의 그림이 얼핏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구상화로도 읽힐 수 있는 소지는 바로 이 인체의 유기적 형태소(形態素)에 기인한다. 80년대로 넘어가면서 김태호가 화면에서 이 구상적 형태소를 분해하여 기하학적인 선으로 환원, 조립과 해체를 반복한 것은 바로 이 점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선과 곡선을 이용한 화면상의 다양한 실험은 아무리 순수한 추상을 지향한다하더라도 둥근 곡선이 갖는 인체의 이미지에 대한 연상 작용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김태호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재로서 한지의 가치를 새로이 인식, 한지작업에 몰입한다.

그러나 나는 김태호가 매재로서 한지의 가치에 주목한 것은 현재의 작업으로 이행하는데 거쳐야 할 중간 단계로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지야말로 ‘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적합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한지 특유의 가소성(可塑性)은 풍부한 물성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거니와, 그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김태호는 한지를 붙이거나 밀고, 짓이기는 행위를 통해 종전의 이미지를 풍부한 ‘몸의 언어’로 치환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지작업은 일견 이전의 캔버스 작업이 보여준 기하학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결코 ‘그리드’라는 자신의 문법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김태호는 한지작업을 수행하면서 초기에는 유기적인 인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화면이 잘게 파편화하면서 거기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턴화’는 김태호의 의식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일종의 원형(prototype)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시 화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어느 사이엔가 다시 부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김태호의 화면에 변화를 주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김태호는 한지작품의 화면을 잘게 파편화하는 동시에 다양한 색을 첨가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한지의 풍부한 물성과 색이 결합하면서 화면을 다채롭게 수놓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작업은 70년대의 셔터 작업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의 방편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인체를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화면은 순수한 색과 한지의 물성을 통한 ‘몸성’이 발현되는 장소였다. 또한 색과 한지가 벌이는 물질의 중첩은 현재 보는 것과 같은 <내재율> 연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화면은 더욱 균질적으로 변하며 ‘전면 회화적(all-over painted)’ 특징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김태호는 한지를 캔버스와 아크릴 칼라로 바꾸고 물감의 층을 두껍게 쌓아가는 기법에 천착해 들어갔다. 이른바 엷은 평면에서 두꺼운 살의 세계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20여 년간 김태호의 화면에는 미세한 변화들이 찾아왔다. 다양한 색의 물감을 중첩하여 여러 겹의 층을 만드는 일, 그것을 칼로 깎는 일 등 변화를 자아내는 여러 기법들이 동원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화면은 점차 정교해지며 격자 형태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캔버스가 두꺼운 살을 지닌 사물로 변해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부는 예리한 칼에 베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숨을 쉬기 위한 숨구멍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전통 옹기 항아리가 미세한 숨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과도 같은 형국이다. 그림이나 항아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인간의 몸에 대한 비유인가. 이처럼 김태호의 작업은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초극의 한 양상으로 ‘몸성’의 회복에 대한 풍부한 암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의 작품을 평면성의 측면에서만 읽지 말고 근대가 폄하한 몸의 측면에서 읽을 때, 그 의미는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김태호의 물감의 살을 깎아내 단면을 드러내는 행위는 모더니티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연을 찾아가는 행위로 요약된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이는 물감이 중첩되면서 점차 얼굴의 표정을 갖춰가는 것처럼, 물감의 기본 단위의 교직(交織)은 무의미에서 풍부한 의미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발화상황을 닮았다. ‘ㄱ, ㄴ, ㄷ, ㅏ, ㅗ, ㅐ’와 같은 음소(音素)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ㅅ’이 ‘ㅏ’를 만나고 거기에 ‘ㄱ’과 ‘ㅗ’와 ‘ㅏ’가 덧붙여 질 때 비로소 ‘사과’라는 사물에 대한 개념화 작용이 발생한다. ‘사과처럼 빨간 뺨’이라는 표현은 사물이 얼마나 우리의 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을 알려 주는 징표이다. 이처럼 사물과 언어 사이에서 파생되는 상사(相似)에 대한 비유를 통해 김태호의 작업은 비로소 몸성을 드러낸다. 회화가 이미지, 곧 허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살을 지닌 실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김태호의 작품은 해석의 새로운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문제는 존재가 아니라 해석인 것이다. 작품은 새로운 해석과 의미의 부여를 통해 거듭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그의 작품은 비로소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부여한 관행적 해석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구의 모노크롬이닌‘단색 (Dansaekhwa)’란 명칭의 사용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나의 의지의 소산이다. 우리의 언어에 의한 개념적 틀로 회화라는 우리 고유의 지적 산물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사상누각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지닌 존재로 땅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김태호의 작업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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