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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들은 그만(No more sons)!

윤진섭

이제 아들은 그만(No more sons)!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서 우선 나의 집안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1908년생인 나의 선친은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1919)을 고향인 아산에서 열두 살에 직접 목격했다. 선친은 스물네 살 때 네 살 연하인 나의 어머니(1912년 생)를 아내로 맞이하여 내리 딸 다섯을 두었다. 이 전시의 제목처럼 “이제 딸들은 그만, 난 아들이 필요해(No more daughters & Heroes)”하고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훗날, 내가 장성했을 때 어머니는 무슨 말끝엔가 “휴-”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시앗을 봐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는데, 그냥 고마울 따름이지 뭐.” 나의 어머니는 여섯 번째에 드디어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고, 그 뒤로도 두 명의 아들을 더 둬 형제는 모두 팔남매가 되었다.

유교에서 비롯된 가부장적인 관습이 채 가시지 않았던 당시 젊은 아낙이 겪었을 가슴조림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이처럼 한국의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은 핏줄 잇기와 농업인력의 확보라는 미명아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관습이다. 세월이 흘러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에서 이러한 일화는 이제 흘러간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공공연하게 남자들 입에서 나오고, 딸 한명 낳고 단산을 하는 가정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이른바 ‘영웅주의’의 소멸인 것이다. 1960-70년대 산아제한을 장려한 국가정책은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의 유명한 문구를 낳았다. 그런데 1973년에 제정된 모자보건법이 여성의 건강과 권리를 위한 여성운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한 남성중심주의 사고에서 이 법의 입법 이면에는 인구 감소를 통한 1인당 GNP의 증가라는 산술적 계산이 있었지만, 여성의 건강과 영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법 제정이란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처럼 남자선호에서 남녀평등으로의 선회는 훗날 호적법의 개정으로 인한 호주제의 폐지로 구체화되면서 여성의 인권이 향상되기에 이른다.이제는 페미니즘 미술사의 정전이 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는가?(Why Have Been There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글에서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위대한 여성작가를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여성들이 재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남성 주도의 제도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또한 <보다 공정한 시각을 향하여: 페미니즘이 미술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방법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Toward a Juster Vision: How Feminism Can Change Our Ways of Looking at Art History)라는 글에서 파블로 피카소가 만일 ‘파블리타(Pablita)라는 이름의 여자로 태어났다면 과연 오늘날 그렇게 천재적인 예술가로 칭송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흥미있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예로 브루클린미술관에서 본 한 소녀의 경우를 들고 있다. 재능있는 아이들을 위한 한 수업에 참여한 그 소녀는 자신이 볼 때 분명 피카소에 버금가는 소질을 지녔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라면 필경 식당에서 접시를 닦거나 여자 판매원이 되는 게 고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린다 노클린이 이 글을 쓸 때의 사정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그녀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이 아트 뉴스에 최초로 실린 때가 1969년 9월임을 감안하면, 그 때와 비교하여 지금 여성의 권리는 놀라울 만큼 신장되었다. 여성운동의 불을 당긴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1934- )의 <성의 정치학(Sexual Politics)>은 급진적인 여성운동가들로 하여금 억압의 상징인 브레지어를 벗어던지는 과감한 행동을 촉발시켰는데, 현재 여성들이 누리는 권리의 향유는 바로 이처럼 남녀평등을 위한 줄기찬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한숨을 생각하면 그 안에 응축된 조선 여인들의 애환이 떠오른다. 그러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엄격히 지켜진 남녀유별의 신분적 차별 속에서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숱한 범부(凡婦)들에 비하면 매창을 비롯하여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등등은 그래도 행복한 편에 속한다. 근대 이후에 한국의 미술사에는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등의 이름이 등재되었지만, 조선시대 여성 문인들의 행렬을 잇는 이 화가들의 이름 뒤에는 감정 한번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스러져간 숱한 여인들이 존재한다. '이제 딸들은 그만(No more daughters)'이라는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들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은 부모의 성을 같이 쓰는 것이다.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특히 문화예술계에 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김최철수’, ‘이박영희’와 같은 이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를 동등하게 대함으로써 뿌리깊은 부계의 전통과 권위에 저항한다. 남녀평등을 위해 던지는 이 침묵의 저항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 특유의 교육열에 힘입은 바 크다. 1970년대 이후 촉발되기 시작한 이러한 현상은 현재 여성의 두드러진 사회진출이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미술계에 나타난 최근의 변화는 이를 말해준다. 외무고시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보도가 말해주듯이, 80년대 이후 국내의 미술과, 미술사학과, 예술학과, 미학과 등 미술관련 학과에 진출한 여성들은 수적으로 볼 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공립미술관 관장을 비롯하여 학예연구실장, 큐레이터 직에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 커미셔너나 전시감독의 명단에서 여성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이제 흔하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이제 아들들은 그만(No more sons)”이라고 외칠 날이 온다면 너무 지나친 엄살일까? 아람누리미술관이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사회에서 남녀 양성이 지닌 사회적 의미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화두이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12명의 작가는 독일의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출신이 다양한 외국작가들과 한국작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작품세계가 내포한 의미는 주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것이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든, 아니면 여성의 권리신장을 위한 선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젠더(gender)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묻는 일과 관련돼 있다. 이번 전시는 특히 외국인 거주자 인구가 120만 명을 넘어서면서 다문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이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는 그동안 금기시돼 온 쟁점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면서 공론화된 사실을 상기할 때, 시의 적절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동성애자 문제를 비롯하여 국제결혼, 이민, 외국인 거주자, 해외입양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된 혼성문화 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은 한국 사회가 이젠 더 이상 ‘흰색 일색의 사회’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남녀의 미래(No more daughters & Heroes)>라고 명명한 이번 기획전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앞으로 도래할 한국 사회의 초상에 대한 예비적 조망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권에 침투하여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상기할 때, 모든 문화적 경험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된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든, 아니면 상호 호혜의 균등한 기회에서 비롯된 기분 좋은 경험이든지 간에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으로서 한 문화 공동체의 다채로운 피륙을 구성하는 실이다. 따라서 ‘백의민족’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문화적 특질이 실은 이데올로기가 낳은 허구임을 인정할 때, 우리의 의식은 더욱 자유로울 수 있고 다양한 문화 향유에 대한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주제 가운데 ‘영웅들(Heroes)’은 여성, 즉 딸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아들(남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그 의미는 남성과 여성이 벌이는 타이틀 매치는 아닌 것 같다. 두 낱말의 관계를 대등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나는 이 점이 이번 전시기획이 지닌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남녀의 두 성(性)이 이 전시회를 통해 평등과 상호 호혜의 지평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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