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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실험예술제, 무엇이 문제인가?

윤진섭

얼마 전에 홍대 앞 일원에서 열린 <제 9회 한국실험예술제>(2010. 7. 24-8. 1)는 예술이 일상과 어떻게 만나고 대중이 예술 속에서 어떻게 재미를 느끼는가 하는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 뜻 깊은 행사였다.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설치미술, 현대무용, 부토, 벨리 댄스, 마임 그리고 마술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끌어들인 이 행사는 일단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행사의 규모에 비해 결코 많다고만은 할 수 없는 공적 자금을 바탕으로 약간의 기업 후원금을 보태 치러진 이 행사는 이제 횟수를 거듭할수록 자리를 잡아가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행사의 성공여부를 점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왜 그럴까?

우선 행사의 방만함을 지적하고 싶다. 작품의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맞춘 듯한 느낌이 짙다. 9일 동안에 무려 19개국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행사는 공연장만 해도 씨어터 제로를 비롯하여 명월관, 클럽 oi, 표현갤러리 요기가, 제너럴 닥터 등 14개가 넘는다. 주최 측이 배포한 전단에는 진수성찬의 상차림처럼 풍성한 메뉴로 가득 차 있다. 한 사람의 관객이 9일 동안 저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정도다. 게다가 <세계 실험예술 아카이브 박물관전>, <예술도시 입주작가전>, , , <황환일의 하늘 풀장 설치미술전>, <거리 배너사진전> 등등의 부대행사까지 겹쳐 명목상의 화려함은 극을 달린다.

여기서 기획자에게 한 가지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좀 차분해 지라는 것이다. 가령, 홍대 앞 피카소 거리에서 열린 는 명칭만으로 볼 때 독립적인 행사로 치러도 성공을 점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한국실험예술제>의 부대 행사로 선정하여 LED 차량 한 대에 배치했는가. 관객들은 바로 그 앞에 마련된 주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려면 결국 이 단편 영화들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행사에 대한 정보도 빈약해서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이 단편영화제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서교아트센터 지하전시장에서 열린 역시 내용은 볼 만한 것이었으나, 정보 부족으로 인해(주최 측은 하다못해 복사물이라도 비치해서 행사의 개요를 알려줄 의무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한국실험예술제>의 부대행사인지 조차 가늠이 안 됐다. 게다가 이따금씩 작동을 멈춘 프로젝터들은 관객이 찾질 않아 가뜩이나 썰렁한 전시장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나의 이러한 쓴 소리는 그나마 <한국실험미술제>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이 행사를 준비해 온 기획단의 이루 말 할 수 없는 마음고생과 육체적 노고를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퍼포먼스가 중심이 된 ‘실험예술제’에 왜 기타연주와 탱고, 마술이 들어가야 하는가. 아마도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기업의 후원을 이끌어내려면 퍼포먼스처럼 알아듣지 못할 난해한 것이 아닌, 게다가 퍼포먼스라고 하면 언제나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물감을 집어던지는 등 해괴한 짓거리나 하는 집단쯤으로 인식돼 온 기존의 이미지를 희석시키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 지도 모른다. 그 사정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과 애정이 일천한 한국의 풍토에서 퍼포먼스와 같은 고도의 전위예술 행사만으로 기업의 후원을 이끌어내는 것이 난망한 일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주최 측은 왜 ‘실험예술제’란 용어를 고집하는가. 이 문제는 행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 ‘실험’은 말 그대로 철저한 형식의 탐구와 연계될 때만 그 쓰임이 유효하다. 현대예술사는 실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구한 실험의 역사로 이루어져 왔다. 다다(Dada)를 비롯하여 초현실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 전후의 플럭서스 운동에 이르기까지 현대예술의 역사를 구성해 온 과격한 전위적 실험은 모두 예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탐구로 점철되었다. 퍼포먼스는 이러한 전위적 운동의 핵을 이루면서 가장 첨예한 매체로 첨단적 의식을 지닌 예술가들로부터 각광을 받아왔다. 대중과의 괴리는 그 와중에서 늘 발생되었고, 지금도 그 상태는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행사의 주최인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출발했단 말인가. 어쩌면 하다보니 어려워서 전략적으로 약간 방향 수정을 하려 한다고 변명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쯤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차분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실험’이란 명칭에 걸맞는 행사인가를.

물론 이번 행사가 전부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령 개막일 홍대 앞 일대에서 열린 아트 퍼레이드는 기발한 예술적 상상과 행동들이 어우러져 대중에게 예술의 흥취를 한껏 북돋아주었다. 아마도 <한국실험예술제>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라면 국내외의 퍼포먼스 작가들을 초대하여 다양한 전위적 레퍼토리를 선사한 점일 것이다. 또한 매년 벌어지는 개막 퍼레이드 행사는 볼만한 축제가 없는 우리의 풍토에서 다같이 참여하여 즐기는 소위 ‘난장’ 문화의 모델로 삼을 만 하다. 놀이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한 판의 문화적 형식이라는 호이징가의 정의에 가까이 다가간 비근한 예로 이 개막 퍼레이드와 논그라타(NonGrata)를 중심으로 행해진 외국작가들의 퍼포먼스를 들 수 있다. 서교아트센터 옥상에서 황환일의 설치작품을 이용하여 벌어진 퍼포먼스는 예술이 삶 속에서 하나의 놀이 형식으로 전개될 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뛰어난 작품이었다. 여기서 가면을 쓰고 물이 채워진 대형 컵(이것은 황환일 작가의 수영장 아이디어에 기인한다.) 속에 들어간 대여섯 명의 행위자들이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물총을 쏘거나 데킬라를 마시는 등 기발한 행위를 보여주었다. 이들이 벌이는 즉흥성이 강한 퍼포먼스를 보면서 전반적으로 경직된 우리 문화예술계의 풍토와 작품을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것도 이번 실험예술제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무릇 예술행사는 행사의 지향점이 분명해야 한다. 그것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하는 목표 설정과 수요층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하고, 지난 행사에 대한 냉철한 반성을 통해 단점을 보완하려는 열린 자세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실험정신’이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한국실험예술제>는 9년이란 연륜에 상응하는 내면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다소 산만해 보이는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실험’이란 명분에 보다 근접한 행사로 거듭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그 동안 노력과 고생에 상응하는 명예를 얻을 수 있도록 심기일전하는 자세를 필요하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기보다는 예술사에 기여한다는 대의명분이 그 언젠가는 ‘실험예술정신’이 보여준 그 동안의 노고를 보상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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