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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혹은 가상? 소셜 네트워킹(Social Networking)과 미디어 아트의 확장 최근의 페이스북(Facebook) 경험을 중심으로

윤진섭

1. 꿈이냐, 생시냐?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의 고사는 미디어 아트와 관련해서 흥미있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하루는 장주(莊周)가 꿈을 꿨는데, 자신이 나비가 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잠에서 깨어난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의 꿈을 꾼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꿈속의 나비가 원래 나인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내가 진짜 나인가 하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와는 성격이 좀 다른 끔찍한 일이 실제로 벌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게임에 빠진 20대의 젊은 부부가 사이버 상의 아기를 키우는 일에 재미를 붙인 나머지 4개월짜리 아기를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컴퓨터 게임에서의 ‘몰입(absorption)’은 때로 이처럼 심각한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테크놀로지가 지닌 양면성-잘만 활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게 되면 전갈의 독이 되는-을 재고하게 만든다.

이 젊은 부부의 일화는 인간의 의식에 관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그리고 재미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보다 더 소중한 것일 수 있는가. 사이버 공간이 제공하는 가상의 세계에 빠져 현실을 잊는 현실 아닌 현실. 아마 이 부부도 처음에는 현실이 가상 보다 더 중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상 세계의 재미에 빠져 점차 현실에서 멀어져 갔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투명 막처럼 현실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사이를 오가는 컴퓨터 게임은 얼마 전에 상영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Avatar)’를 연상시킨다.

최첨단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기법이 총동원된 이 영화는 가상현실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아바타’란 용어의 대중적 전파가 바로 그것이다.
감독인 제임스 카메론은 14년 전부터 이 영화를 구상하였으며, 실제 작업에 착수한 이래 4년의 세월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을 만들어 영화에 나오는 인물과 배경, 무기 등등에 이르는 세세한 사항들에 관해 토의했으며, 그 결과 가상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미적경험(aesthetic experience)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새로운 미적경험을 유발하는가.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서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새로운 미적경험의 계기를 이룬다. 회화에서 느끼는 미적경험과 미디어 아트의 그것이 같을 리 없다. 회화가 주로 시각에 의존한다면 어떤 설치작품은 후각과 촉각, 그리고 심지어는 ‘관객참여(audience participation)’를 통해 미각의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퍼포먼스(performance art)는 그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가장 개방적인 매체일 것이다. 퍼포먼스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여러 매체를 자유롭게 결합하고 작업의 성격에 따라서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미적경험의 영역에 있어서도 시각은 물론이요,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근육운동 감각 등 신체의 전 감각에 걸친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

퍼포먼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관객참여는 필연적으로 ‘접촉’의 개념을 가져다주었다. 작가와 관객 혹은 관객과 관객간의 신체적 접촉은 예술의 대중적 친밀화와 개방화를 야기하였는데, 이는 미디어 아트에서의 ‘상호작용(interactive)’과 함께 미적경험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2. 페이스북(Facebook)과의 만남에서 얻은 색다른 경험들
내가 페이스북에 가입한 것은 작년 9월 무렵이었다. 어느 날 미국의 작가 한 사람으로부터 친구 요청이 와서 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와 유사한 몇 번의 제안이 있어서 일일이 응하기 귀찮아 거절을 할까 하다가 승낙을 해서 가입을 하게 되었다. 내 사이트가 만들어져서 핫메일(hotmail) 계정에 저장된 주소록을 이용해 친구 요청(add) 메일을 보냈는데, 그럭저럭 한 50명 정도의 친구들이 모였다. 그러던 중 블로그의 형식을 갖춘 이 소셜 네트워킹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최근 약 한달 동안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ing)’은 페이스북과 쌍벽을 이루는 ‘트위터(Twitter)’와 함께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에 있다. 가위(可謂) 통신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신매체의 등장은 메시지나 이미지의 실시간 전송을 통해 거리나 국가, 시간, 장소에 관계없이 다중이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페이스북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경우는 내 생일과 관련된 일화다. 애초에 페이스북에 등록을 할 때 생년월일을 ‘1955. 4. 3’으로 적었는데, 사실 이는 음력이었다. 괄호 속에 그것이 ‘lunar calendar’라고 밝혔어야 했는데, 그만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생일 이틀 전부터 세계 각국에 산재한 친구들(friends)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가 답지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재개한지 약 한달 만에 친구가 급격히 불어 그때는 이미 칠백 명을 육박한 상황이었다. 그 중에 한 여자 친구가 꽃다발을, 한 남자 친구가 케이크를 보내왔다. 그 케이크는 이층으로 된 것인데 아래 단은 무지개 색을 띤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답신을 보내던 중 갑자기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친구들에게 한국의 무지개떡을 답례로 보내자. 그래서 구글에서 무지개떡 이미지를 검색하여 그 중에 맛있어 보이는 것 몇 개를 골라 한 세트로 묶어 보냈다. 페이스북에는 담벼락(Wall) 기능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공지하기에는 썩 그만이다. 조선시대 공고문의 일종인 방을 연상시키는 란이다. 그랬더니 금방 몇몇 친구로부터 답신이 왔다. “매우 맛있었어. 냠냠(They were delicious, Yum, Yum),”, “고마워요, 진...대단해. 칼로리도 전혀 없고.(Thanks, Jin....this is great, no calories!).

사이버 상에서 벌어진 이 이색적인 미적경험의 예는 ‘World Wide Web(www)’으로 대변되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인류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어를 포함, 70개의 언어로 서비스되고 있는 페이스북에는 전 세계에 걸쳐 약 4억 명이 가입해 있으며, 한국인은 약 2만 7천명이 가입하고 있어 소셜 네트워킹이 한국에서만은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 일화를 통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퍼포먼스(Social Performance)에 관한 것이다.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도 말했듯이,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공연장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일상적 퍼포먼스다. 일상 공간은 여러 개의 가면이 필요한 일종의 무대이며, 각 개인들은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와 상호작용을 통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또한 오스틴(John Lanshow Austin)은 화자와 청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언어행위를 ‘수행성(performative)’ 개념으로 파악한 바 있다. 언어행위에서는 상황이 매우 중요한데 상황이 소거된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가 모바일 폰을 이용해 문자를 교환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신혼의 단꿈에 빠진 신세대 가정의 한 남편이 회사에서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문자를 보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남편:“어디”
아내:“집,ㅋㅋ”
남편:“넘 보고 싶다. 자기”
아내:“ㅉㅉ. 나두”
남편:“엄만 가셨구?”
아내:“아니 테레비..”
남편:“그건 내일 온 댓잔아”
아내:“누가 언제? 방에 잇는데...”
남편:“돈 줬어?”
아내:“원래 안 받잔아”
남편:“그럼 굳었네 ㅋㅋ”

위의 대화는 딸이 사는 모습이 궁금하여 딸집에 놀러온 친정어머니를 두고 부부가 나눈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만 놓고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된다. 다섯 째 줄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그런데 문제는 텔레비전이다. 아내는 (엄마가 지금)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는 의미로 문자를 보냈는데, 남편은 고장이 나서 얼마 전에 맡긴 텔레비전이 문뜩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텔레비전 수리 센터의 사장은 남편의 친구다. 텔레비전은 내일 배달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신랑은 위와 같이 물었고, 대화의 전개는 결국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이는 언어의 발화행위에서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페이스북은 원래 친구사이에 정보를 교환할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지금도 가장 주된 기능은 역시 정보의 교환과 친교다. 생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돼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제목처럼 ‘멋진 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이버 공간에는 국경이나 피부색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페이스 북의 담벼락은 자신의 생각이나 공유하고 싶은 자료를 연속적으로 올릴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친구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채팅(chatting)과 포스팅(posting), 링크(link)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폭넓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은 한국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터넷 채팅이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물론 한국인끼리 한국어를 사용하여 소통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 갖추고 내용은 바뀌지 않은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페이스북에서 사용 되는 언어 수가 70개에 이르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가히 세계화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현재 페이스북의 담벼락은 420자로 제한되고 있는데, 이 숫자는 의견을 개진하기에 충분한 분량은 아니지만, 코멘트를 통해 보완할 수 있기 때문에 120자로 제한하고 있는 ‘트위터’보다는 편리한 점이 있다. 물론 페이스북의 친구들은 트위터의 추종자들(followers)‘처럼 고정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결속이나 참여의 면에서는 많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페이스북에서 문자에 의한 의사전달은 위에서 사례를 든 것처럼 모바일 폰의 제한된 경우보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높다. 물론 모바일 폰도 동영상으로 통화를 할 경우에는 상황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진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문자언어가 지닌 한계를 놓고 보면 그렇다.

나는 지난 한 달간 몇 차례에 걸쳐 올린 담벼락의 코멘트를 통해 그때그때 떠오른 다양한 토픽이나 미술계 이슈들에 대한 친구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선(禪)을 비롯하여 강릉의 경포대를 둘러싼 다섯 개의 달 이야기, 현재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의 퍼포먼스 장면을 공유(share)해서 인도의 한 요기가 행하고 있는 고행과 한국의 선승들이 수행 정진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세계 친구들의 의견을 듣는 등 매우 흥미있는 경험을 했다. 그 중에서도 미디어 아트에 관한 여러 친구들과의 다양한 의견 교환은 나의 생각을 살찌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 토론에서 나는 미디어 아트의 현재적 상황을 가리켜 “이제 창조는 사람들의 손가락 끝에서 나온다(Now creation comes out from ones fingertips.).”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이 발언은 전철이나 공원, 집, 학교 등 그 어떤 곳에서도 아이폰(iphone)이나 스마트폰(Smartphone) 등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다운 받거나 변형하거나 생산하는, 그래서 가령 유튜브(Youtube)에 올린 동영상을 다시 페이스북으로 가져와 전파하는 등 일체의 생산/소비/감상/유통/참여 등등의 예술적 활동이 디지털 단말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아방가르드를 다룬 또 다른 토론에서 “오늘날 아이폰이나 컴퓨터 모니터는 일종의 축소된 동굴벽이다.(Nowadays iphone or computer monitor is a kind of minimized cave wall.)” 라고 오늘의 디지털 미디어가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소셜 네트워킹을 통해 이제 인류는 ‘땅속줄기(rhisome)’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면서 연결된다. 영화 아바타의 대사 중에 주인공인 제이크가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1조개의 나무들과 연결돼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말은 리좀을 연상시킨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사이버 상에서의 연결은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선사인들의 동굴에서의 삶은 제의(ritual)를 통한 환상의 세계와 생존이 위협을 받는 절박한 현실이 결합된 삶의 한 축도이다. 그들은 동굴 벽에 죽여야 할 대상인 소들을 그리고 거기에 창을 꽂음으로써 소를 실제로 죽인 것으로 믿었다. 이성으로 무장한 근대인(modern man)은 상징과 신화, 설화를 죽인 장본인이다. 문명의 장구한 진보의 결과물인 종이는 이제 인간의 상상력을 만화의 작은 칸막이 속에 가둔다. 어린이나 원시인은 팔이 잘린 만화의 컷을 보면 실제로 팔이 잘린 것으로 믿는다. 이는 선사인들이 동굴 벽에 소의 모습을 누대(累代)에 걸쳐 겹쳐 그린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나는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상상력이 살아 숨쉬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상상의 공간이 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처럼, 선승(禪僧)이 던지는 법어(法語)처럼, 한 마디의 말이 진리의 경지를 보여준다. 가령, 위에서 예로 든 젊은 부부간의 대화를 논리적으로 다시 풀어보자. 그러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남편:“지금 어디에 있어?”
아내:“집에 있어. 쿡쿡....”
남편:“너무 보고 싶다. 자기.”
아내:“나도....”
남편:“엄만 가셨구?”
아내:“아니, 텔레비전 보셔.”
남편:“그래? 그럼 뭐 맛있거라두 해 드리잖구......”
아내:“응, 그렇지 않아도 그럴려구 해.”
남편:“그럼, 이따 봐.”
아내:“응 알았어. 자기, 차 조심해.”

이러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아마 이 부부가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됐을 것이다. 만일 이 대화가 모바일 폰의 동영상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더욱 구체적으로 실감이 났을 것이다. 위에서 보듯 문자의 대화에서 텔레비전을 둘러싼 남편의 오해는 대화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 간격의 폭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화를 좀 더 진전시켜 보자.

아내:“굳은 건 어찌 알아.”
남편:“뭐가.”
아내:“문에 페인트 칠한 거.”
남편:“알았어. (굳은 돈으로) 딸기나 사갈께.”

이오네스코는 <대머리 여가수>에서 주인공 부부가 나누는 동문서답식 대화를 통해 존재의 진리를 보여주었다. 그는 낯선 상황의 설정을 통해 사물이 원래 지녔던 싱싱한 비의(秘儀)와 생명력을 복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아꾸다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 <하동(河童)> 속의 갑빠가 작은 구멍을 통해 땅 위와 땅 속을 들락거렸던 것처럼. 나는 20여 년 전에 경상도 하동(河東) 출신의 한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섬진강에 ‘갑빠’라는 전설적인 동물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름에서 오는 이 우연의 일치에서 묘한 충격을 받았다. 순간 나의 상상력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마치 거북이 같이 생긴 일본의 갑빠가 두더지처럼 땅속을 뚫고 경상도 하동 땅까지 왔단 말인가. 현실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상상계에서는 가능하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은 능히 세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방향을 알 수 없는 럭비공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그것은 ‘선조적(linear)’이지 않으며, ‘리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익명의 다수 사이의 인터넷 채팅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 보자. 페이스북에 내가 글을 쓰는 순간 다른 친구들도 글을 쓰고 있다. 댓글들은 때로 무질서하게 올라온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전체적인 글의 흐름은 두서가 없어진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 채팅의 이 비결정적인 구조가 좋다. 세계를 매끄럽게 다듬으려 할수록 세계는 우리들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언어를 가지고는 나무 하나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나는 페이스북의 한 토론에서 존재의 비의(秘儀)를 믿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한 적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을 넓혀 언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If then, we should extend the gap between word and word and return to the condition of before word. Is it possible?)'

오늘날 손에 단말기를 쥐고 손가락을 놀리는 ‘아이폰 맨(iphone man)’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땅위와 땅속을 넘나드는 갑빠처럼 현실계와 가상계를 왕복하는 경계인들이다. 그 모습이 꼭 장주를 닮은 게 놀랍지 아니한가.

이제 세계의 많은 가상시민(virtizen: virtual +citizen)들이 마치 굴착기와도 같은 디지털 단말기를 손에 쥐고 두더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땅굴을 파고 있다. 그 난마(亂麻)처럼 엉킨 세계가 향후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유럽문화학회 발제문-

참고문헌
장자, 송지영 역해, 동서문화사, 1975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도록, 서울시립미술관, 2004
Meyer Schapiro, Theory and Philosophy of Art:Artist & Society, George Braziller, 1974
Border of Virtuality:Chinese and Korean Media Art Now, Han Ji yun Contemporary Space, Beijing, China,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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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莊子-莊周, 송지영 역해, 동서문화사, 1975, 82쪽,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⑵ 윤진섭, 게임의 왕국,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서문, 2004.

⑶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된 말로 ‘분신’ 혹은 ‘화신’을 의미한다.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땅에 내려온 신을 의미하였으나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가상현실 게임에서 자신의 분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으로 사용되고 있다.

⑷ 2004년 2월 4일, 당시 하버드 대학생이던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가 설립한 소셀 네트워킹 웹사이트다.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생들만을 위해 개설하였으나 점차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나갔다. 설립자인 마크는 올해 26세인 젊은이로서 2008년도 당시 15억 달러의 재산으로 포브스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785위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또한 유산상속이 아닌 자수성가형 억만장자 중 최연소 기록이기도 하다.

⑸ 이 점에 대해서는 Meyer Schapiro, On Some Problems in the Semiotics of Visual Art:Field and Vehicle in Image-Signs(1969)를 참고할 것. Meyer Schapiro, Theory and Philosophy of Art:Style, Artist, & Society, George Braziller,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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