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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일상-극사실회화의 어제와 오늘 / 한회국형 극사실 화

윤진섭

한회국형 극사실 화


Ⅰ. 이른바 ‘극사실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는 사물에 대한 묘사를 사실의 극단(極端) 즉, ‘끝까지 몰고간다’는 의미로 영어에서의 ‘하이퍼리얼리즘(Hyper Realism)’에 대한 우리 식의 번역어다. 흔히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 ‘슈퍼리얼리즘(Super Realism)’, ‘래디컬리얼리즘(Radical Realism)’이라는 말로도 통용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1970년대 중반부터 비롯된 이 경향이 그 원조랄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과 다른 것은 말 그대로 ‘냉엄한 객관성의 유지’와는 다소의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신세대 작가들 중 몇몇은 대상과 그려진 이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형 극사실회화는 ‘정감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정감적 접근’이라고 한 이유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내지는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이성 중심의 객관성과 과학주의를 신봉해 온 서구인들과는 달리 한국인은 비합리성과 극단을 피하는 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타당한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극사실주의의 경향은 서구의 극사실주의를 방불케 하는 묘사의 치열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통해 설명하고 싶다.
이번 전시의 1부 초대작가들과 2부의 초대작가들 중 대표적인 극사실주의 작가들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듯이, 70년대 극사실주의의 경향과 최근의 경향 사이의 차이는 이른바 ‘핍진성(逼眞性)’에서 두드러진다. 주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2부 초대작가의 대표적인 경우는 과일이나 사탕이 든 유리병을 주로 그리는 로베르토 베르나르디(Roberto Bernardi)의 경우처럼, 실물을 방불케 하는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강강훈, 김대연, 김성진, 박성민, 박지혜, 설경철, 오흥배, 유용상, 윤병락, 이목을, 이정웅, 이지송, 최경문, 최정혁, 황순일 등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작가들의 경우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극사실주의’내지는 사실주의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Ⅱ. 이른바 1960년대 후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팝아트의 연장으로서의 극사실주의는 일상의 단면을 소재로 다루었다. 그것은 도시의 일면을 사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묘사력으로 담아낸 리차드 에스테스(Richard Estes)나 인물상을 크게 확대해서 그린 척 클로스(Chuck Close)의 경우처럼, 주관을 적극 배제하는 데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소비 산업사회의 단면을 통해 황량한 허무감이랄까, 인간 소외와 같은 쓸쓸한 감정 등을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은 소비산업사회에서 겪는 군중들의 이러한 고립감을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의 말을 빌리면 ‘타인지향적인’ 사회의 특징이다. 나 자신의 주체적인 삶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 사회, 그럼으로써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이중적 페르소나가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거리의 쓸쓸한 풍경을 그린 리차드 에스테스의 극사실주의 풍경화는 화면에서 인간을 배제함으로써 역으로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할 때, 1970년대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기간을 점유했던 우리의 극사실주의는 이른바 개발도상국가의 성격을 지녔던 당시 한국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공사장 현장의 가림막으로 사용된 베니어합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조상현의 작품이 대변해 주듯, 미국식의 냉엄한 극사실주의가 아닌, 소위 ‘한국형 극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사회는 미국처럼 소비가 미덕이 되는 대량 소비산업사회가 아니었다. 번영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사회였고, 저축이 미덕이 되는, 소위 근대화의 문턱에 진입한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 소외 보다는 인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더욱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날이 늘어나는 공장의 숫자가 말해주듯이, 산업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아파트의 증가와 같은 주거형태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도시의 슬럼화라든지 인구의 밀집에 따른 계층간의 갈등이 드러나면서 점차 인간 소외를 향해 사회 전체가 치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근대화의 과정을 겪은 여느 나라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이번 전시의 1부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경우, 현실에 대한 냉엄한 묘사보다는 정감이 섞인, 다시 말해서 대상에 대한 자의식의 투영을 통해 사물을 해석하는 입장을 보이는 것은 앞서 언급한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




Ⅲ. <또 하나의 일상-극사실회화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이번 기획전의 2부에 초대된 작가들은 다소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에 이르는 연령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 중심을 30대로 잡을 때 이들은 소비가 미덕이 되는 한국의 산업사회를 감수성이 예민할 때 체험한 신세대들이다. 그들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IT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사회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2부의 작가들이 1부의 작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미감과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카메라로 대변되는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난 이 신세대들은 칼라 텔레비전의 혁명적인 시각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40대 장년과는 또 다른 감수성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른바 ‘디지털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세대의 특징은 자연광에 노출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익숙한 아날로그 세대와는 전혀 다른, 스스로 발광하는 빛의 근원, 즉 컴퓨터 모니터를 비롯하여 네온이나 LED와 같은 시각 환경의 변화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카메라의 등장이 당시의 화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듯이, 컴퓨터의 발명이 카메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 오늘의 시각 환경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포토샵에 의한 이미지의 합성과 변조는 가짜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쟝 보들리야르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면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극명한 가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극사실주의가 날이 갈수록 미술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가치 면에서 볼 때 그만큼 타당한 미술사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해묵은 사조의 리바이벌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유행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일단, 기계와 손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비평적 관심을 끄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기술 혁신의 시대에 진부한 일상적 소재를 손의 노동을 통해 재현하는 문제가 새로운 분석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시장의 컬렉터들은 왜 극사실주의 작품에 열광하는가. 그들은 사진에 열광하는 것만큼 극사실주의 작품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과 극사실주의의 공통점이 대상의 재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진이 등장하면서 한때 회화가 존립의 위기를 겪는 듯 했지만, 회화는 죽지 않고 여전히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디오의 등장이 영화관의 존재를 위협하는 듯 했지만, 복합상영관이란 새로운 형태의 극장이 등장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에 비견된다. 예술가의 손이 뿜어내는 회화의 후광(aura)은 일종의 ‘마이더스의 손’이다. 그것은 복제술에 기반을 둔 사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형식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극사실주의의 기법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놀라운 신기술에 힘입어 사이버 상의 근친상간을 행하고 있다. 사진과 회화의 접목은 이제 양자가 적대관계가 아니라 행복한 밀월을 즐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기술은 컴퓨터의 포토샾과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점차 추상화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거꾸로 회화의 영역을 위협하고 있다. 반면에 일부 극사실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반질반질한 표면 질감과 투명한 성질 등등은 점차 사진의 특성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한 특성들은 캔버스의 섬유 조직이 드러난 아날로그 시대의 극사실주의 회화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강강훈, 김명숙, 김성진, 김은옥, 김혜옥, 박지혜, 박성민, 오흥배, 유용상, 최경문, 최정혁, 이지송, 허유진 등등의 작품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Ⅳ. 예술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변신을 해 온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래서 예술의 장르나 범주, 정의는 시대에 따라 늘 변하게 마련이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재료의 발견이나 타 매체와의 융합(hybrid)에 따라 항상 변신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러나 회화는 역시 회화다. 회화는 2차원 평면이라는 조건에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경우에서 보듯이 3차원의 탐색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손에 의한 예술’이란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극사실주의 역시 회화에 속하는 한, 손에 의한 노동, 그것도 가장 집약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분야다.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을 최고의 원리로 삼는 그것은 순전히 수공에 의존할 때 시간의 투여가 가장 요구되는 미술사조다.
그것은 재현을 위한 ‘눈속임기법(trompe-loeil)’의 축적된 기술의 노하우와 작가마다 다른 기법의 개발이 어느 분야보다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이라는 진부한 방법론 때문에 비평의 조명에서 벗어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극사실주의는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비평적 분석의 대상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왜 관객이나 컬렉터들이 극사실주의의 작품에 몰리고 있는가 하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런 현상을 야기한 원인에 대한 비평적 진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대상에 대한 사실적 탐색을 해 온 구자승과 한운성이 포함돼 있다. 연배나 경력을 고려할 때 1부에 포함되었어야 하리라고 생각되나 작품의 성격상 2부에 초대되었다. 사실적 묘사에 의한 초현실적 경향을 보이는 윤병운, 정영한, 김세중과 인형을 소재로 신세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이은, 그리고 풍경화를 그린 사실주의풍의 박창배와 이임호는 폭넓은 의미의 극사실주의에 포함시켰다.
이번 기획전의 2부가 지닌 약간의 결함이라면 자타가 인정하는 몇몇의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참여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회가 한국의 극사실주의 회화를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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