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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합일(物我合一)의 세계-정창섭論

윤진섭

물아합일(物我合一)의 세계-정창섭論



 “나는 흘리고, 번지며, 스며드는 수용성을 통하여 재로와 나, 물(物)과 아(我)와의 일원적 일체감을 소중히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60년대에 나는 서구적 앵포르멜을 동양적 미의식의 논리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면서 ’70년대에 오면서는 더욱 동양적 시공 속에서 어떻게 ‘그림’이 자연스러운 내재적 운율을 지닐 수 있을까에 더 주안하였던 것이다.”

<한국미술의 모더니즘:1970-1979전> 도록 중에서


 정창섭(1927-  )의 이 발언은 약 50여 년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의 요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닥(楮)을 주 재료로 삼은 그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한지의 특성을 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닥은 가소성이 주된 특징이다. 물에 푼 닥을 손으로 건져 올려 화포에 놓고 이리저리 헤치고 매만질 때 닥 특유의 질감이 드러난다. 궁극적으로 그 결과물이 곧 정창섭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정창섭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70년대에 들어서 이 종이와 만났다고 한다. 그 전에는 유채작업을 했는데, 끈적거리는 느낌이 싫어서 다른 것을 찾던 중 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한지(韓紙)를 ‘한지(寒紙)’로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한지야말로 추운 겨울에 만들어야 제격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그만큼 한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또 그런 애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를 가리켜 ‘닥의 작가’, 혹은 ‘한지작업의 선구자’로 부를 수 있는 것이리라. 

 한국 현대미술에서 정창섭이 중요시 되는 까닭은 그가 한국인의 심성에 파고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닥이라고 하는 물성이 지닌 질박한 느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닥을 원료로 한 그의 작품은 매우 담백해서 재료 그 자체의 성질이 잘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는 화장기가 없다. 단색을 사용하길 즐겨하는 그의 성품은 매우 깔끔하고 정갈하여 치장하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환경과 관련된다.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저(楮) 시리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고 나를 형성해 준 고향에서의 삶과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침에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빛입니다.”

-작가의 어록 중에서, 1986. 4. 26-



 빛을 전부 투과시키는 투명한 유리와는 달리, 창호지는 반투명한 재료다. 그것은 모든 빛을 중화시킨다. 강렬한 햇빛도 창호지를 통과하면 풀이 죽는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는 것이다. 정창섭의 뇌리에 각인된 부드러운 햇빛의 느낌은 그런 까닭에 닥 시리즈의 근원이 된다. 그 느낌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50년대 초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유채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던 그에게 한지는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70년대 중반의 <귀(歸)> 시리즈에서 한지는 본격적인 물성의 표출보다는 단순히 화지로 쓰였다. <귀 76-E>(162x130.5cm, 한지에 혼합재료, 1976)와 <귀 76-Ⅲ>(162x130.5cm, 한지에 혼합재료, 1976)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종의 번짐 효과에 대한 실험이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류의 작업은 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는데, 이 시기의 작업에서 주목되는 것은 원과 정방형의 대칭이 여러 조형적 실험을 거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정창섭의 조형 어법은 50여 년에 걸친 장구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매우 단순한 편인데, 그것은 질감의 표현과 형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질감은 닥의 물성 표출이요, 형태는 원과 사각, 그리고 사각의 대칭구조로 요약된다. 그의 작업은 실로 이 두 요소의 다양한 변형인 것이다. 

 질감에 관해서는 우선 초기 작업에 해당하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의 앵포르멜 작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붉은 색과 청색의 단일한 색채를 사용한 것이 주를 이루는데, 화면에는 시멘트처럼 거친 느낌을 주는 질감이 나타나 있다. 이 화면 위에 붙어있는 거친 물질감은 비록 성질은 다르나 80년대 이후 한지 작품에서 보이는 부드러운 질감의 원형(archtype)이다. 그렇다면 한지 작품의 단색과 질감은 앵포르멜 시기의 그것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작업은 서구적 합리, 곧 과학적 시점이나 형식주의적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나의 작업은 현존의 형태, 양식 그리고 탄탄한 논리를 완전히 제거한 때야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작업노트 중에서-


서구적 합리주의 정신을 벗어나 동양적 직관에 의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 바로 80년대의 한지작업이다. 이때부터 그는 명제를 <저(楮)>라고 일관되게 붙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닥(Tak)’ 시리즈가 탄생된 것이다. 시멘트를 연상시키는 앵포르멜 시기의 거친 질감은 이제 부드러운 닥의 질감으로 치환된다. 연한 황갈색에서 노랑기가 있는 베이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색역을 지닌 닥 시리즈는 모두 단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닥을 통해 그가 손에 쥐려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작업노트에 의하면 그는 ‘흘리고 번지며 스며드는 수용성’ 재료를 통하여 재료와 자신 사이의 일체감을 느끼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러운 내재적 운율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내재적 운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닥을 손으로 만질 때 느껴지는 어떤 감각 같은 것은 아닐까? 


 “우선 닥을 반죽하듯 물에 풀어 놓지요. 이때 닥은 얼마나 담가 놓느냐, 섬유질이 긴 것이냐 짧은 것이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요. 그것을 손으로 건져내서 캔버스 위에 펴놓습니다. 닥을 두드리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면서 대화를 시작하지요. 닥 자체가 어떤 표정을 갖고 나올까 기다리지요. 내가 어떻게 하려는 조형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닥이 어떤 표정을 갖고 나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작업노트(김복영, <물아합일의 세계> 중에서 재인용)-


 나의 조형의지가 아닌, 닥 자체의 어떤 표정에 작업이 의존할 때, 그것은 일종의 ‘의지결여성’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충만한 예술의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매재의 자율성에 의존할 때 행위의 무목적성은 비로소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매재에 몸을 의탁하는 행위다. 작가는 매재와의 접촉을 통해 매재와 대화를 나눈다. 그것은 신체를 빌려주는 것이다. 닥을 손으로 건져내서 캔버스 위에 펴놓고, 닥을 두드리거나 만지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닥은 어떤 표정을 띠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체를 빌려줌으로써 사물이 물성을 획득하게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그의 닥 시리즈는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신을 말하게 하라”는 명제를 성립하게 만든다. ‘내재적 운율’은 사물이 물성을 통해 자신을 말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창섭이 말하는 ‘물과 나와의 합일(物我一體)’은 물과 나 사이의 대립 상태를 견지한 서구의 근대주의 정신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사물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동양의 자연관이 아닌가. 일체의 인위성을 배제하는 것, 산은 그렇게 절로 존재하는 것이고, 강은 그렇게 저절로 흐르는 것이다. 그러니 산을 깎지 말고 물길을 돌리지 말라. 즉 자연을 다치게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둬라. 

 정창섭은 평평한 캔버스 표면에 물에 푼 닥을 이리저리 옮겨놓아 물성의 발현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닥이 어떤 표정을 가질 때까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작가의 조형의지가 개입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칭, 사각형의 일정한 구조, 형태의 이지러짐과 적층 등은 작가의 조형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의 <묵고(黙考)> 시리즈는 80년대의 <저(楮)> 시리즈가 보여준 비정형의 형태에서 벗어나 뚜렷하게 사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초기 작업은 먹이나 청색의 바탕 위에 회색, 붉은 색, 청색 등으로 채색을 한 닥을 입힌 것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바탕색과 닥의 본래 색과의 대조에서 벗어나 단색을 지향하게 된다. 

 <묵고> 시리즈 중에서 특히 1993년에 제작한 대작들은 닥의 풍부한 가소성을 실험한 것이다.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풀어진 풍부한 닥의 물성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뭉게구름을 연상시킨다. 병풍이나 혹은 타일로 이루어진 벽화를 연상시키는 이 대작들(<묵고 No. 93697>(585x260cm, 1993), <묵고 No. 93699>(1200x400cm, 1993))은 정창섭이 가장 의욕을 보인 이 시기의 작품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정창섭의 <묵고> 시리즈는 사각형의 형태에 깊이감이 느껴지는 요철의 구조를 지닌 음(negative)과 양(positive)의 관계로까지 발전하나 노환으로 더 이상 작업의 진전이 없는 것이 아쉽다. 이 시기의 작업은 단색이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닥의 두터운 질감과 함께 사각의 형태가 주된 조형언어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된다. 


 “문에 바른 한지를 통해서 우리는 ‘안’과 ‘밖’의 이중적 세계를 공유하는 슬기를 체득하게 된다. 문종이의 누르스름하게 바랜 빛 속에서 시간의 앙금을 느끼며 그 위에 수묵처럼 번지는 달빛과 대나무 그림자를 통하여 공간의 물성과 그 여백을 즐겼던 것이다. 방바닥도 종이고 들창도 종이이다. 

 외부세계를 격렬하게 체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통해 걸러지고 투사된 담담한 상징과 은유적 세계로 외부를 흡수하려는 슬기가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창호지에 의해 빛이 걸러진 세계는 중화된 세계다. 아무리 강한 햇빛도 일단 창호지를 통해 걸러지게 되면 그 강렬함이 한풀 꺾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화된 세계를 통해 우리는 안과 밖을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관계로 인식한다. 그러한 세계관은 정창섭의 작업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은유한다. 강렬한 햇빛 속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닥의 은은한 물성에 내재된 운율, 그 은근한 여백의 멋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간단히 동양적 직관의 세계라 부르자. 거기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농축된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생활 감정이 녹아 있으며, 대립이 아닌 상생의 정신이 담겨있다. 

 정창섭은 화려한 것을 싫어한다. 그의 작품은 고상하고 격조가 높은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닥종이 작업은 그런 그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질박하면서도 수수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꼿꼿한 선비정신이 반영된 그런 그릇인 것이다.  


정창섭 약력:1927년 청주생. 195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 1957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초대전> 출품. 1961년 <국전> 초대작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 1969년 제1회 <칸느국제회화제>참가. 1992년 <자연과 함께, 리버풀 테이트갤러리>,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현대미술의 단면전>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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