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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적 사유와 문화 유목주의

윤진섭

대지적 사유와 문화 유목주의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호남대 교수)



 안녕하십니까? 저는 작년에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았던 윤진섭입니다. 우선 [2015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국내외의 저명한 큐레이터와 자연미술 이론가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2년 후에 전개될 대규모 프로젝트를 위한 [제1회 국제자연미술기획자대회]가 자연미술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한국에서 열리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 자연미술이 싹트게 된 것은 우연보다는 필연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충청남도 공주와 대전에 거주하는 일단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 <야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자연에 몸을 던진 사건은 당시만 하더라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사적 차원의 대 역사(役事)를 이룬 첫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좀 더 재미있게 전개하기 위해 저의 개인적인 일화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서두를 시작하겠습니다. 원래 동양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周易)은 점(占)을 치기 위한 역술서만은 아닙니다만, 저는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에 이 책을 참고하여 점을 친 적이 있습니다. 제 운명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당시만 해도 일이 잘 안 풀려 뭔가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몽(蒙)의 괘’였습니다. ‘산과 물은 몽이다(山水蒙)’라고 그 책에는 씌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몽’은 덩굴을 뜻합니다. 산 밑에 작은 옹달샘이 있는데, 그 위를 가시덩굴이 잔뜩 덮고 있으니 갓 태어난 어린애가 무지몽매하여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계몽(啓蒙:몽을 열다)’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이 몽의 괘를 <야투>에 비유해 볼 것 같으면, 30여 년 전의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야투 회원들의 활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옹달샘이 작은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강물이 돼서 이제 드넓은 바다로 흘러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여러 나라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합쳐져 크게 세(勢)가 불어난 자연미술이 드디어 바다로 진입하기 위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2015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는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라는 전 지구적 사태에 직면하여 우리 미술인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그 대안을 모색하며 이를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 전 세계에 그 심각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탁월한 상상력은 생태계의 위기를 알리는 전령사가 되어 멀지 않은 시기에 그 메시지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날 자연미술의 가치와 위상은 다른 예술 장르보다도 월등하게 인식되고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연미술은 그 대상을 자연에 둠으로써 인간적 삶의 영원한 존재론적 조건인 ‘자연’에 대한 ‘대지적 사유’를 권유합니다. 이는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모더니티와 계몽(enlightenment)의 정신이 기대고 있는, 정복과 통제(control)의 대상으로서의 서양적 자연관보다는, ‘자연과 더불은’ 혹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동양적 자연관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야투만큼 그 포괄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이름도 없을 것입니다. 야투(野投)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들에 몸을 던진다’는 의미입니다. 어감에서 실존적인 의미가 강하게 풍깁니다만, 실제로는 ‘자연에 동화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이들의 정신과 태도 속에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이 주는 생생한 느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나아가서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소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야투의 회원들은 풀벌레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촉촉한 땅의 질감을 피부로 느끼며 작업을 해 왔습니다. 이들은 나뭇잎이나 자갈, 개펄의 흙, 숲 속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다양한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을 수행합니다. 같은 시기에 출범한 한국의 또 다른 야외 현장작업인 [대성리]전 작가들이 작업 초기에 70년대의 모더니즘,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을 캔버스 삼아 설치작업에 주력했던 것과는 달리 철저히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야투의 이런 정신과 태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四季)의 구분이 분명한 한국의 자연 환경적 특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특이한 형태의 작업방식을 낳았습니다. 80년대 야투의 <사계절 연구회>는 이의 대표적인 경우로 이러한 형태의 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사는 물론 세계 현대미술사에서도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투의 작가이자 야투인터내셔널프로젝트의 디렉터인 전원길은 1980년대의 야투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즉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요. 일상적이며 단순한 행위를 통해 자연에 접근하는 태도는 관객들의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친근성을 북돋웠고, 창작 동기를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수동적 감상자에서 적극적 참여자 혹은 창작자로의 관객의 위상 변화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야투 회원들의 작업은 거대한 규모의 대지미술이나 환경미술과 다릅니다. 또한 야투의 회원들은 자연 속에서 환경 문제를 이슈로 떠올리려는 행동주의 작가들과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러나 자연과의 동화 혹은 자연 친화의 태도가  비단 야투의 회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자연의 황폐화를 우려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직감한 세계의 많은 미술인들이 자연을 소재로 비슷한 시기에 작업을 하고 미술운동을 펼친 사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처럼 세계 여러 나라의 저명한 자연미술 이론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자연에 대해 공동의 논의를 하게 된 이면에는 우리 인간의 모태인 자연의 황폐화 현상과 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심정적인 공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015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세계의 자연미술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세계 각국을 돌며 유목적 행위를 펼쳐왔습니다. 세계 현대미술의 비주류를 자처한 이들의 활동은 그러나 미술의 다른 어느 장르나 유파보다도 더욱 생산적이며 현실 참여적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놀이 정신에 입각하여 국제적 연대감을 다진 플럭서스(Fluxus) 운동보다 훨씬 더 현실 참여적이며 그 가치나 정신면에 있어서 보다 더 우월하고 암시적입니다. 망가진 존재의 기반(자연)을 수리한다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문화 수리공(修理工)’으로서 이들의 이러한 예술적 태도는 유연한 듯 보이지만 강한 현실 개입 정신의 소산입니다. 


  자연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입니다. 장주(莊周)는 자신의 저서 <장자(莊子)>에서 ‘소요유’와 ‘제물론’을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역설했습니다. 이 사상 속에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인간의 겸손하며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자연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서 호출하여 재음미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의 과업이자 사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구의 근대를 지배해 온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는 자아중심적이며 시각중심적인 사고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이원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주체와 객체,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대립적으로 바라봅니다. ‘나’라고 하는 주관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함부로 재단하며 지배하려는 그릇된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남성 우월적 시각중심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중심주의는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의 말을 빌리면 ‘몸의 물질성’을 빼앗습니다. 반면에 촉감은 전통적으로 시각에 비해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 시각의 넓은 폭에 비하면 촉각은 한 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늘 시각에 가려졌습니다. 그것이 부상하고 재평가된 것은 잘 알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몸의 정치(Body Politics)’를 쓴 정화열 교수에 의하면, 촉감은 대지적이며 여성적인 감각입니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고수레’라는 것을 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외경심을 갖고 대지를 대하는 우주적 사고의 소산입니다. 이러한 우주적 세계관은 서구의 손길이 닿기 이전의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침략자가 땅을 팔라는 제안을 했을 때, 한 인디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땅(大地)는 내게 어머니와 같다. 그대는 나더러 어머니를 팔라고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유목(nomad)’은 ‘이동하는 동물(Homo Motus)’로서 인간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입니다.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명제 속에는 유목의 개념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제의 철수가 오늘의 철수가 아니듯이,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듯이 우리 역시 늘 이리저리로 떠돌아다닙니다. 오래 된 한국의 대중가요에 ‘유정천리(有情千里)’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처럼 유목의 속성을 상징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2002년도 제4회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지명을 위한 제안서의 주제가 바로 이 ‘유목’이었습니다. 유목하면 중동의 대상(隊商)이나 실크 로드를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원래는 ‘몽골리안 루트’가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인 우랄 알타이 산맥에서 갈려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몽골리안의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곳과 신대륙에 정착하였는데, 그 경로를 밝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경로:우랄산맥에서 터어키까지 

제2경로:우랄산맥에서 흑해를 거쳐 동구권까지

제3경로:우랄산맥에서 만주를 거쳐 신대륙, 신대륙에서 다시 남미까지

제4경로:우랄산맥에서 몽고를 거쳐 한국, 일본까지

제5경로:우랄산맥에서 티베트 고원을 거쳐 인도, 다시 베트남까지 


 이것은 몽골리안의 역사에서 본 유목의 경로입니다만, 인류학의 연구 성과는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시작, 중동과 유럽을 거쳐 유라시아, 다시 베링 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구상에는 여러 요인에 의해 대대적인 이동과 이에 따른 유목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2년 뒤에 전개될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가 ‘문화 유목주의(Cultural Nomadism)’로서 세계 현대문화사에 획을 긋는 대 사건이 된다면 다소 과장된 것일까요? 이번 행사의 기획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데 참으로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투가 기획하고 있는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 2015는 한국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미와 북미를 이동하면서 각 나라의 작가들과 만나 자연 속에서 작업하려는 프로젝트이다. 4년에 걸쳐 산과 바다 그리고 숲속에서 진행될 이 프로젝트는 자연미술 워크숍, 전시, 세미나 등으로 이루어지며 매년 각 나라에서 20명의 작가가 참여하며 총 500여 명의 작가 및 관련 전문가들이 참가한다.”   


 저는 방금 전에 ‘문화 유목주의’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그 이유는 물리적인 유목을 해석하는 일은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에 저는 터어키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노천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칼레의 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들에게서 고향의 할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터어키의 전통음식인 케밥(Kebab)에서 한국의 밥(Bab)을 연상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우랄알타이 산맥에서 출발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 뻗어나간 몽골리안의 유전자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양인과 비슷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몽골리안의 어쩔 수 없는 유전인자, 이는 분명히 ‘세계가 하나’라는 인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다양한 이동 경로를 염두에 둘 때, 우리가 시도하는 이 프로젝트야 말로 ‘세계가 하나’라는 지평을 지구촌을 향해 열어 보이는 위대한 시도가 아닐런지요? 감사합니다. 


<국제자연미술기획자대회 기조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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