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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어 사라지다-곽인식論

윤진섭

빛이 되어 사라지다-곽인식論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곽인식과 일본 모노하(物派)와의 관계

 곽인식(1919-1989)에 대한 일본에서의 비평적 평가는 엇갈린다. 가령, 일본의 미술평론가인 아키타 요시토시(秋田由利)의 경우는 곽인식의 60년대 작품이 “일본의 모노하에 커다란 영향을 준 선구적인 것”(물질과 표면, <곽인식 평론집>, 유나화랑 간행)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반면에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는 그의 선구자적 혜안은 인정하면서도 모노하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년 동안이나 침묵을 지켜 애석하게도 모노하의 전성기 활동에 끼지 못하는 불행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네무라의 이 발언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모노하의 작품을 집대성한 <1970년-물질과 지각:모노하와 근원을 묻는 작가들>이란 일본의 한 기획전 도록의 연표에는 전시회 활동과 관련하여 간략히 그의 이름만 언급돼 있다. 

 곽인식의 작품을 살펴보면 모노하의 선구자로 간주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앞서 언급한 기획전에서 누락된 것은 미네무라의 언급처럼 모노하 운동의 전성기에 곽인식이 작품 발표를 등한히 한 것과, 모노하의 주요 작가들과는 한 세대나 연령의 차이가 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미네무라 도시아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모노파와의 중복은, 애석하게도 곽인식에게 명예라기보다는 불행을 초래한 시기였다. 곽인식은 이미 인식된 것처럼 60년대 초반부터 일련의 작업에 의해 모노파보다 앞서 있었고, 또한 연령상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두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곽인식은 모노파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의 5년간을 무위라고 할 정도로 거의 침묵으로 보냈다. 여기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모노파의 책임자가 되기는커녕, 모노파의 전개 및 그 논리에 대해 생산적인 대응도 도모할 수 없었다. 불운의 씨앗은 원이었다. 나는 원이 그를 잘못 인도하였다고 생각한다.” 

 -미네무라 도시아키, <원과 분절, 그리고 포옹과 절>, 곽인식 평론집, 유나화랑 간행-


 1919년생인 곽인식과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반 출생인 이우환,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 스가 기시오(管 木之雄) 등등 모노하 대표작가들 사이의 연령상의 차이는 곧 세대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 둘 사이에는 많게는 25년 이상 연령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미네무라의 말에 따르면 곽인식은 그러한 ‘연령상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두에 서고 싶어 했는데, 정작 모노하의 전성기에는 이렇다할 작업의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글의 바로 앞 문장에서 미네무라는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곽인식이 원에 가장 심취된 때는 1969년부터 1976년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즉 화지(畵紙)에 끌을 갖다댄 듯 만 듯, 붙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떨어지지도 않게 하여 원형을 창출하려고 한 <물체와 말>(후에 <무제>라는 말로 일률적으로 바꿨다) 시리즈의 등장이후, 자연석의 표면에 수많은 작은 점을 만들어 원형내지는 원반형을 은근히 창출하고, 돌 그 자체의 환미(丸味)가 눈에 띄게 드러냈던 시기가 이 시대였다. 그것은 일본에서 모노파가 미술계를 리드한 시기와 정확히 겹쳐진다.”

 

 얼핏 보기에 미네무라의 이 진술은 앞의 인용문과 비교해 볼 때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는 맨 처음에 인용한 문장의 말미에 곽인식을 잘못 이끈 것은 바로 ‘원’이라고 진술한 바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 원에 대해 설명하기를 결과적으로 그것은 곽인식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곽인식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1969년의 <무제> 시리즈를 보자. 이 작품은 검정색으로 물들인 일본 전통 종이(和紙)에 미네무라의 표현을 빌리면 “끌을 갖다댄 듯 만 듯”한 둥근 자취를 낸 것이다. 화지의 바탕에서 거의 떨어질락 말락 하는 원을 통해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곽인식) 상태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 종이 작품은 그 이전에 손을 댄 철 작업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이에 대해 좀더 부연하자면, 


 “종이의 ‘원’은, 떨어진다고도 떨어지지 않는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종이의 ‘원’은 끊어져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연결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원’이라고 말했으나, ‘원’이 아니라고도 말 할 수 있다. 또 타블로도, 조각도 아니다. 그저 물질인 것이다.”

 -곽인식, <사물의 언어를 듣는다>, 미술수첩 7월호, 1969년, 타니 아라타(谷 新), 앞의 책에서 재인용-


라고 하여 자신의 작업이 모노하의 본질에 상당히 접근한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모노하의 시원으로 간주되는 세끼네 노부오의 <위상-대지>가 발표된 것이 1968년 10월임을 감안할 때, 곽인식의 이 종이 작품은 1년 뒤에 발표된 것이다. 

 다시 말머리를 돌리면, 미네무라는 글 속에서 곽인식이 너무 원에 집착한 나머지 사물이 지닌 보다 폭넓은 표정을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을 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곽인식은 1969년에서 1976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종이의 ‘원’을 비롯하여 돌에 무수히 흠집을 내거나 돌이나 합판에 둥글게 홈을 파는 작업을 통해 지나치게 응축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작업이 재료 면이나 방법론에서 확산의 징후를 보이는 것은 1978년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점토작업에 이르러서이다. 






Ⅱ. 색점의 시기-빛의 세계

 그렇다면, 곽인식은 그냥 모노하를 예견한 단순한 선구자의 입장에 머물고 말아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연구가 얕은 현재의 나로서는 아직 이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히코사카 나오요시(彦坂尙嘉)를 비롯하여 하야시 요시후미(林 芳史), 아키타 요시토시, 조셉 러브, 미네무라 토시아키, 타니 아라타, 히라이 료이치 등등 일본의 여러 작가나 미술평론가들이 곽인식의 초기 작업에 주목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데, 훗날 모노하의 작가들이 사용한 재료와 관련시켜 볼 때, 곽인식의 초기 작업은 모노하와 관련하여 재해석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나는 1961년경부터 곽인식이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철사, 돌, 석고, 바둑알, 철판, 화지, 유리, 합판 등등 기성의 사물과 그것들이 캔버스와 결합하거나 주어진 상황과 관련시켜 볼 때, 사물의 물성이나 존재성, 상황성, 혹은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성’을 환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이유는 모노하가 한창 만개할 시기인 1970년대 초반에 저조한 활동을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미네무라의 진술과 일치하고 있다. 

 곽인식이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 것은 1980년대였다. 이 시기는 돌에 무수히 흠집을 남긴 돌과 둥근 돌의 주변을 빙 돌려가며 홈을 판 작업, 그리고 부드러운 점토 반죽에 손자국을 남기거나 원통의 막대 혹은 원반 모양의 자연스런 형태들이 나타났던 70년대 작업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80년대에 들어서자 곽인식은 화지를 이용한 채묵 작업에 몰입하는 한편, 점토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에 더욱 정열을 쏟았다. 이 작업들은 작고하기 전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는 이 10년에 걸친 기간동안 돌과 점토, 그리고 화지 작업을 병행하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완결미와 함께 성숙한 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화지를 이용한 채묵 작품에는 <작업(Work)> 혹은 <무제(Untitled)>란 명제가 일관되게 붙어있는데, 이는 점토나 돌 작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붙어 불필요한 연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단어의 선택은 애써 회피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일본의 전통 종이인 화지를 사용한 그림들은 쌀 모양의 필획을 중첩해서 찍은 것이다. 물감을 묽게 풀어서 종이의 앞이나 뒤에서 붓으로 찍어 약간 번지는 듯한 효과를 노렸다. 이 미점(米点)은 화면 위에서 서로 겹쳐지면서 점차 퍼져나가게 된다. 색은 단색과 차갑거나 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 등 두 종류의 것들이 작품을 구성하는데, 그 어느 것이거나 모두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공통점이다. 검정색을 비롯하여 노랑, 빨강, 청색, 보라, 자주, 연두, 녹색 등등을 묽게 푼 부드럽고 연한 기미의 색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곽인식의 이 미점준은 매우 연하고 부드러워 색점이 서로 겹쳐졌을 때 충돌보다는 화합의 느낌을 낳게 된다. 하나의 점은 다른 점을 부드럽게 감싸는 형국을 취한다. 한색과 난색이 겹쳐지거나 때로는 같은 색에 의한 단색조의 형태를 띠기도 하는데, 어느 것이든지 조화와 상생을 이루고 있다. 

 빛은 찍혀진 점과 점 사이에서 방출된다. 쌀알과도 같은 미점의 중첩된 사이에서 빛은 좁은 틈바구니를 뚫고 올라온다. 마치 얇은 창호지를 투과하여 부드럽게 사물을 어루만지는 방안의 엷은 빛처럼 그것은 희미해 보인다. 그와 함께 부드럽게 파동 치는 듯한 색점들은 마치 물위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늦가을의 낙엽처럼 혹은 밝은 달밤에 창호에 어른거리는 나뭇잎처럼 투명하게 아름답다. 그것은 인위적이라기보다는 마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인식의 그림에서 일본의 냄새가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그림에서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모치를 싼 포장지에 연하게 퍼진 색조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조셉 러브는 그의 그림에서 거꾸로 한국의 냄새를 맡았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는 양쪽에 발을 담근 문화적 주변인이 아닌가. 

 나는 그보다는 오히려 하야시 요시후미(林 芳史)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신뢰하고 싶다. 


 “田一枚植えて立ち去る柳かな(논 한 자락을 다 심고 떠나가는 버들이도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1694)의 운치 있는 하이쿠(排句) 한 수를 들어 멋지게 해석한 그의 솜씨. 다도의 대가 리큐(利休)는 마당을 비로 깨끗이 쓴 다음 그 위에 낙엽 한 줌을 뿌렸다. 이 인위적인 행위가 모노하의 임시임장성(臨時臨場性)을 설명하는 요체라면, 바쇼의 이 하이쿠는 언외(言外)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멋들어진 버들의 모습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 덧 모를 다 심고 논을 떠나는 농부와 그 뒤에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광경은 색이 아니라 차라리 빛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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