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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달재 / 형사(形似)와 사의(寫意)의 사이에서

윤진섭

형사(形似)와 사의(寫意)의 사이에서


                               

 매화와 포도 그림으로 잘 알려진 직헌(直軒) 허달재가 신작을 발표한다. 이번에는 맨드라미 그림이 여러 점 포함돼 있다. 소재 면에서 볼 때 그것은 기존의 문인화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통상 문인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는 매화와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를 비롯하여 포도, 석류, 수박, 연꽃, 모란, 감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예로부터 무수히 그려져 왔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기법이나 구도 따위의 선례가 많다. 다시 말해서 ‘패턴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맨드라미처럼 그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소재는 작가 자신의 창의에 의해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이의 표현을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특히 극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한 유화와 달리 붓과 먹, 그리고 비교적 단순한 채색 재료를 가지고 심의를 표현해야 하는 문인화에서는 더욱 그 어려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허달재의 이번 전시는 새로운 소재를 개척한다는 의미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로 매화와 포도를 소재로 다룬 허달재의 문인화는 기품이 있고 정갈한 것이 특징이다. 색채에 있어서도 가령, 매화를 다룬 그림들은 흰 매와 붉은 매, 혹은 이 둘을 합친 것을 그림에 있어서 기껏해야 두 세 가지 색을 넘지 않는다. 이처럼 단순한 색상은 결과적으로 정갈한 화면효과를 낳게 된다. 매화 그림은, 흰 매(白梅)든 붉은 매(紅梅)든 간에, 마치 화선지 위에 옅은 물감을 확 뿌려놓은 것처럼 종이의 전면에 고르게 퍼져 있다. 꽃잎의 표현은 흰 색과 붉은 색이 다같이 톤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매화 그림은 매우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특히 허달재의 이 매화 그림을 주목하는데 그것은 이 그림에 나타난 현대적인 감각이 오늘의 우리 문인화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소재나 기법 면에서 전통의 갑갑한 틀 안에 갇혀있는 우리의 문인화는 그러한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부르짖고 있으나, 실제 그러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터에 허달재의 작품은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靜中動)’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요소가 세 가지 있다. 

입으로 숨을 쉬고 몸으로 행동하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곧 身, 口, 意, 三樂이다. 호흡이 생각으로 표현되면 말이요, 생각이 모아지면 뜻(意)이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1996, 작업노트에서 인용)


 그림을 그릴 대상을 눈으로 보고, 거기서 일어나는 생각을 모아 그 뜻을 행하는 일은 ‘정중동’의 과정을 밟는 것을 의미한다. 의취(意趣)는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형성되는가. 전통에 대한 학습과 현대성의 호흡, 가계의 혈통과 개인적인 기질, 미적 취미 등등이 뒤섞여 발효될 때, 독특한 의취가 형성된다. 허달재의 의취는 남종문인화의 정통 화맥을 이은 가계로부터 일부가, 그리고 일찍이 뉴욕화단을 직접 체험하면서 얻은 현대적 감각이 나머지 부분을 이루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실제 현대성과 관련한 그의 실험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가령, 90년대 중반의 인간을 소재로 기호화한 작품들, 문자를 추상화한 일련의 작업들, 구름을 집중적으로 다룬 운무도 연작, 매(梅) 자를 꽃잎처럼 무수히 써놓은 <梅香>(98x146cm, 한지 위에 채색, 2006) 등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역시 허달재 그림의 진면목은 포도, 매화, 국화, 대나무 등의 소재를 다룬 일련의 문인화가 아닌가 한다. 엷은 담채로 종이 전체를 칠한 바탕 위에 펼쳐지는 그의 그림은 품격이 높고, 의취가 정갈하다. 


 매화 그림이 꽃잎의 표현에 있어서 톤의 변화가 없이 쭉 고른 반면에 포도를 그린 그림은 특히 잎사귀를 농묵으로 처리하여 톤의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먹색은 청신하고 밝아 사의(寫意)를 잘 드러내고 있다. 포도나무 전체를 조감하듯이, 화면에 적절히 포치된 나무 가지 사이사이에 포도 알갱이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거기에 갈필로 그린 포도넝쿨은 거의 직선으로 처리되어 기존의 표현 관례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수놓듯이 아롱지게 그리는 허달재의 이 독특한 화면 경영 방식은 세련된 미적 취미에서 온 것이다. 연한 계란색, 연한 베이지, 연한 푸른색, 연한 붉은색으로 칠해진 바탕 위에 포도와 매화를 그린 허달재의 그림은, 특히 붉은 홍매화를 그린 일부의 작품에 이르러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상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종이 위에 붉은 꽃잎들이 후두둑 떨어져 있는 것처럼, 사실성은 멀어지고 추상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매화 잎인가, 아니면 붉은 물감의 반점들 자체인가. 그의 그림은 이처럼 근본적인 미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근래에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맨드라미 그림이다. 녹색과 붉은색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 연작은 허달재가 그린 기존의 문인화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장 사실성이 두드러진다. 꽃잎에 대한 묘사에서 줄기와 잎사귀에 이르기까지 형사(形似)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연작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란색 반점들은, 마치 반딧불이 어두운 밤하늘에 떠다니듯이 꽃과 잎사귀, 줄기에 퍼져 있는데, 이는 기존의 매화 그림에서 검정색 점들을 무수히 찍은 것과 같다. 이 반점들은, 마치 종이의 평면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 같은 의도를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림에 표현된 대상과 무관해 보이는 듯한 이 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 표현에 덧붙여짐으로써 이 연작들이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것에 그 목적과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표다. 현대성의 호흡이란(여기서 앞에 인용한 작가노트에서 보이듯이, 그가 호흡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오늘의 시점에서 문인화를 다시 보고자 하는 그의 의식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직접적인 요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반점들은 맨드라미와 매화와 함께 각각 별도로 그린 투명지를 겹쳐 놓은 것처럼 독립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문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화면을 두 개의 화면이 오버랩된 것처럼 그린 선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맨드라미 그림은 채색화다. 거기에는 먹이 드러나 있지 않다. 녹색과 붉은색에 의한 농담(濃淡)의 조절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숙련된 테크닉의 소산이다. 적절히 포치된 꽃의 존재와 붉은 빛이 감도는 꽃을 받쳐주는 녹색 잎사귀의 대비는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색의 농담이 자아내는 계조(gradation)는 동양화의 채색 물감만이 가능한 독자적인 기법이다. 채색 물감이 종이에 흡수되면서 어루만지듯이 부드럽게 서로를 흡수하는데, 농과 담의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고 붓질의 교차가 만드는 섬세한 겹침의 효과가 나타난다. 

 안정된 구도는 허달재의 그림이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다. 어느 것을 그리든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안정감이 있다. 그것은 타고난 그의 감각으로부터 온다. 구도와 관련된 그의 실험은 맨드라미보다는 매화 그림에서 더욱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의 매화 그림은, 특히 홍매를 그린 일련의 연작이 눈여겨 볼 만한데, 마치 줄기는 증발하고 꽃잎만 난무하는 것처럼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남종화의 오랜 전통에서 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 관점에서 오늘의 감각에 맞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의 일환이 바로 반점의 도입과 균질적인(all-over) 구도의 사용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과 복잡’의 사이를 왕래하는 진자와도 같다. 그의 그림은 제한된 색채지만 풍부한 효과를 낳는다. 그의 그림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시각적 잔치를 베푼다. 허달재는 최근 몇 년 간 매화와 포도를 소재로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그려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회화적 실험이 시도되었다. 정통 남종문인화의 화맥을 잇는 그의 작업은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수성에 부응한 작품들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 이른바 ‘신남종화’의 탄생인 것이다.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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