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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통한 문화적 코드 읽기

윤진섭

행위를 통한 문화적 코드 읽기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전은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한국 행위미술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해 기획한 기념비적인 전시회다. 미술관 측이 이 전시회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나 하는 것은 김윤수 관장이 직접 나서서 1967년에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의 전시장 풍경과 첫 해프닝인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의 실황이 담긴 녹화 테이프를 발굴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최초의 오브제, 설치, 해프닝 작품들이 종합적으로 선보인 <청년작가연립전>의 내용은 그간 참가자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출품작과 전시장 풍경을 찍은 단편적인 몇 장의 사진들, 그리고 당시의 신문 보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 시기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미술사가 김미경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상당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발굴은 현장감을 지닌 구체적인 자료 화면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매우 값진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흔히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일컫는 ‘행위예술’(이하 ‘행위미술’로 통일)은 작가와 행위자의 신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한 매체다. 이것을 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하기 어려운 것은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특유의 성격과 혼융성(hybrid), 경계성(marginality), 첨단성(cutting edge) 등등에 기인한다. 그 중에서도 실험성과 전위성은 행위미술의 핵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마치 잡식성 동물처럼 예술의 다양한 장르의 특성을 혼융하여 예술의 경계를 넓혀가며, 첨단의 매체를 도입하여 영역을 확장시켜 나간다. 거기에는 흔히 대본과 같은 모체(matrix)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미술의 실연(實演)은 대개 일회적인 것으로 그치며,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행위미술은 훈련된 신체에 의한 동작이나 연기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용이나 연극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행위미술에 있어서 신체는 작가의 예술적 아이디어나 개념의 전달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미술의 이런 특징들을 감안해 볼 때,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번 전시의 전체적인 성격을 ‘자료전’으로 규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Ⅱ. 보도자료에 의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행사의 목적이 “행위미술의 40년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그 역사를 총 정리하고 미술사적 의의를 확립하고자”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목적에 따라 기획자(김경운 학예연구사)는 연대순에 따라 통시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1967-1979:해프닝에서 이벤트로’

 정치적으로 억압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행위미술가들이 퇴폐와 불온의 대상으로 간주되던 초기 해프닝의 시기. 대표작: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 <투명풍선과 누드>(1968), <가야금과 인성(人聲)을 위한 미궁(황병기, 홍신자)>(1975), <시간과 공간(김순기)>(1975), <삭발(이건용, 정찬승)>(1975), 대표작가:강국진, 김구림, 김순기,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정강자, 제4집단 등.


 제2부 ‘1983-1993:행동의 드라마’

 정치적 억압과 시민 사회의 저항이 극적으로 표출되던 시기로 추모나 장례의 제의 , 신체의 구속을 통해 억눌린 사회적 분위기를 표출했던 퍼포먼스의 시기. 대표적 전시회:<예술과 행위, 그리고 인간, 그리고 삶, 그리고 사고, 그리고 소통>(나우갤러리, 1989), <’89 청년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1989). 대표작가:김용문, 신영성, 윤진섭, 이불, 안치인, 이상현, 하용석 등. 


 제3부 ‘1994-2007: 행위-변주’

 행위미술이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포용하고 대중문화나 산업자본과도 융합되는 시기. 대표작가: 김아타, 박이창식, 조습, 박혜성, 고승욱, 이윰, 낸시랭, 황신혜 밴드 등.


 40년이란 만만치 않은 역사를 지닌 행위미술을 총정리하는 기획전이란 의미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선 기획자가 직면했을 고뇌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을 것인가? 전시공간이 제한적일 때 기획자의 시각은 그래서 중요하다. 방만한 사료(史料) 중에서 취사선택은 기획자의 시각에 따라 걸러지게 되는 것이 회고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더라도 1부에 선정된 황병기와 홍신자의 등장은 다소 의아했다. 기획자는 행위미술사에서 부각되지 못했던 한 사건(<스페이스 ’75>, 공간 기획)에 주목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황병기는 음악인이고 홍신자는 무용가다. 따라서 비록 전위예술가들이긴 하지만 이들을 행위미술의 범주에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보다는 오히려 한국 행위미술사상 최초의 관객참여를 시도했던 이강소의 <화랑내의 술집>(1973)을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하는 것이 좋을 듯 했으며(이 작품은 몇 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현된 바 있다), 70년대에 이벤트와 설치작업을 통해 일상과 예술의 혼융을 시도했던 김용민이 빠진 것은 아쉬웠다. 


 현대미술에서 작품이 진행되는 ‘과정(process)’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기존의 회화나 조각 작품이 작가가 작업실에서 작업을 수행한 결과에 해당한다면, 행위미술은 작업의 진행과정을 보여주는 시간의 예술이다. 문제는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점에 있다. 그랬을 때,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는 잔디를 불태우는 행위보다는 결과로서의 흔적, 즉 불에 탄 잔디의 모습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대지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잭슨 폭록의 드리핑 작품들도 비록 제작과정에는 퍼포먼스의 요소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결과로서의 회화에 속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다. 70년대를 통해 바람을 이용한 작품을 시도했던 이승택의 경우 역시 같은 이유에서 1부에 포함시킨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미술 40년의 역사를 세 개의 시기로 분절하고 각 시기별 특징과 함께 그 변천 과정을 사회적 변동의 요인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기획자의 시각은 독자적인 데가 있다.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난 것이 8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에 등장한 정치적 퍼포먼스의 주목과 제3부의 조습, 박혜성, 고승욱, 이윰, 낸시랭, 황신혜 밴드의 기용이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80년대의 정치적, 제의적 퍼포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라고 할 정도로 당시의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며, 제3부에 등장한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적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지표들이다. 아마도 기획자는 전업 행위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평면적인 전시를 엮기 보다는 각 시기를 대변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문화적 코드의 특징을 읽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가령, 사진작가 김아타의 선정은 행위미술이 사진 장르를 포용하는 시대적 현상을 드러내기 위해 시도한 것 같은데, 이 역시 결과로서의 사진 작품이라는 이유에서 지나치게 폭넓은 해석이 아닌가 여겨진다.  



Ⅲ. 60년대 후반, 정찬승, 강국진, 정강자에 의해 주도된 일련의 해프닝은 언더그라운드적 성격의 반문화 운동으로서 기성문화와 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주석(註釋)을 가한 문화비판적 성격의 것이었다. <한강변의 타살>, <사이비 문화 장례식>과 같은 일련의 데먼스트레이션은 일찍이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이 벌인 가두 피켓 시위, 제4집단의 반문화적 시위와 함께 사회 내지 미술제도에 대한 ‘비판적 아방가르드(critical avant-garde)’의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비록 겉으로는 민정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집권하고 있었던 때로서 언론과 사상, 표현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 해프닝이 연극적인 성격을 띠며 사회적 비판으로 시선을 돌렸고, 70년대의 이벤트가 개념주의적인 입장에서 사물과 인간 간의 문제를 ‘사건화’하고자 하였다면, 80년대 중반에 나타난 퍼포먼스는 총체적인 성격을 띠었다. 작가마다 관점이 달랐지만 행위 외에 음악, 연극, 마임, 무용, 비디오, 영화 등 각 장르의 특성이 부분적으로 흡수되면서 극적 효과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안치인, 이두한, 이불 등의 퍼포먼스가 여기에 속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열린 <’89청년작가전>(1989.3.25-4.2)에서 이두한은 전시장에서 생선을 굽는 행위를 통하여 예술의 문맥 속에서 일상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안치인은 수 백 장의 카드를 허공에 뿌리는 카드 퍼포먼스를 행하였고, 이불은 기괴한 짐승 모양의 의상을 착용하고 전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걸어 다니는 그로테스크한 작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80년대의 퍼포먼스가 음향, 조명, 신체, 연기(煙氣), 관객참여 등 환경적인 요소들을 도입하게 된 이면에는 70년대의 관조적이며 개념적인 성격의 이벤트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다양한 장르에 종사하는 작가들이 공동작업을 펼쳤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는 ‘화랑미술제’와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의 오프닝 행사에서 퍼포먼스가 펼쳐져 대중화되는 양상을 띠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들어와서 더욱 폭넓게 확산되었다. 


 90년대에는 퍼포먼스가 사적인 담론을 위한 하나의 매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었다. 특히 신세대 작가들인 이불이나 이윰의 몽상적이며 나르시스적인 성격의 퍼포먼스는 음향이나 조명을 이용하여 청각 내지 시각적 충격을 극대화했던 80년대의 일반적인 퍼포먼스 양상과는 달리, 그로테스크(이불), 나르시즘(이윰) 등 사적인 담론으로 내면화하는 양상을 띠었다. 90년대는 또한 에이즈를 비롯하여 신체, 페미니즘, 홈리스 등 사회현상에 주목하는 퍼포먼스 작업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홍오봉은 에이즈를 주제로 지속적인 작업을 펼쳤으며, 김석환은 날고기를 먹는 행위나 신체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방법을 통한 그로테스크 바디 아트를, 문정규는 인간성 상실을 주제로 한 문화 테러적인 작업을 보여주었다. 이상진은 개념미술의 한 연장으로써 일상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에는 홍오봉, 김석환, 문정규, 심홍재, 이상진, 김백기, 김은미, 문재선, 안필연, 심영철, 채송화, 신용구, 김광철, 박주영 등 많은 행위 작가들이 누락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행위미술을 실천하고 지켜봐 온 나로선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전시가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얼굴들 중 그간 부각되지 못했던 한 줄기의 단면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밝힌 기획자의 말처럼 인물사 중심의 전시가 아닌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기획전의 기획 의도 또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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