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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영 / 집적(集積)의 아름다움과 재생의 미학

윤진섭

집적(集積)의 아름다움과 재생의 미학


Ⅰ.

 '재생의 미학'은 유병영의 작품에 딱 어울리는 표제어다. 그는 곧 버려질 운명에 처한 폐품을 심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생수병 마개, 치약뚜껑, 콜라병 마개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이 그의 손에 닿기만 하면 영락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예술작품으로 둔갑하고 만다. 일찍이 '아름다움은 쓰레기장에 있다'고 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처럼, 유병영에 의해 탄생되는 조각작품들은 리사이클링미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집적(集積)의 원리에 기대고 있다. 동일한 모양과 크기의 사물들이-가령 치약뚜껑이나 생수병 마개 등과 같은 공업생산품들에서 보는 것처럼-중세의 갑옷이나 성의(聖衣), 달팽이 모양의 조각(彫刻)에 촘촘히 붙여질 때 나오는 찬탄은 폐품에 기울이는 그의 정성에 대한 관객들의 보이지 않는 격려이다. 이를테면, 달팽이 모양을 한 「부분-전체(Teil-Ganzes)」(1997년 作)는 약 2만여개의 플라스틱 치약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는 이 작품을 끈기와 치밀함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기질로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끈기와 치밀함이 그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의 예술적 가치 내지 행위의 의미는 주지하듯이 마르셀 뒤샹 이후의 오브제미학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수저나 포크, 칼 등 일상적 사물을 집적하는 유병영의 조형언어는 아르망을 비롯한 신사실주의자들의 어법에 기대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그의 집적행위를 다른 유사한 일상적 작업과 구분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그러나 반복과 리듬의 원리에 의한 조형작업이 아르망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병영의 집적작업은 정당화된다. 그는 뒤셀도르프-쿤스트아카데미 재학시절 토니 크랙을 사사했는데, 토니 크랙의 작업 또한 이러한 집적의 원리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콜라쥐와 마찬가지로 집적을 의미하는 아상블라쥐 역시 현대미술의 일반적인 조형언어로 보편화된 현실을 고려할때, 그의 작업이 지닌 특수한 국면을 살펴보는것이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에 보탬이 될 것이다.




Ⅱ. 

유병영의 조각은 그것이 지닌 어의상의 본령에서 이탈한다. 그의 작품은 사물을 '쪼거나(彫)' '깎는(刻)'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의 요체는 하나(一)의 단위에서 시작하여 여럿(多)으로 퍼져나가는 확산의 원리에 있다. 이것은 「낱(個)과 온(全)」이라는 명제를 자신의 작품에 붙인 작가의 의도와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주어진 덩어리를 쪼거나 깎는 행위를 통해 작품이 본래의 것보다 작아지는 조각보다는 차라리 심봉을 중심으로 밖으로 확산돼 나가는 소조(塑造)에 가깝다. 이는 기법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념적 측면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조각의 상황에서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진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의 작품을 폭넓은 의미에서 오브제 아트의 일종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증식되는 확산의 원리에 기대고 있는 유병영의 집적작업은 '아무리 작은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물의 존재는 큰 전체인 우주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작가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연상시킨다. 주역에 나타난 이 천지자연의 순환사상은 번성의 극점인 태극이 다시 시초로 돌아가는 역의 원리로 표상된다. 흰색 치약 뚜껑으로 뒤덮인 유병영의 달팽이 작품은 이 태극의 원리를 상징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확산의 원리가 유독 동양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다. 서양의 경우 희랍신화에서 보이는 제신의 탄생이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번창은 하나에서 여럿(多)으로 증식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Ⅲ.

 그러나 조각이 부피에 의존하는 양괴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유병영의 작업은 조각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는 '다른 영역이나 타 예술분야 작품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싶다'고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이 조각의 영역에 속하길 원한다. 그의 작품이 지닌 형태, 재료, 양, 입체적 속성은 곧 조각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양괴의 강조나 용접기법의 도입은 조각의 속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작업을 위해 도입한 재료들, 즉 석고, 나무, 철, 플라스틱, 점토 등은 전형적인 조각의 재료들이다. 그는 이러한 재료들을 이용, 집적의 원리를 통해 미란 어떻게 산출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 발언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다양성의 통일(unity in variety)'이란 전형적인 미적 형식원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아르망의 아상블라주 작품들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 원리는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파생되는 긴장과 조화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유병영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각 단위, 즉 부분과 전체 사이의 조화는 긴장과 파격에 기인한다. 이러한 미적특질이 잘 드러난 작품은 수저와 포크, 칼을 이용한 것들이다. 가령 기둥을 둘둘 감으며 기어올라가는 넝쿨식물을 연상시키는 수저 작품들이 그 한 예이다. 그것이 보는 자에게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은 뭔가를 연상시키는 작품의 환기력 때문이다. 이 환기력이야말로 철저히 비표상 을 목표로 하는 현대미술의 어떤 사조들, 가령 미니멀아트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철저히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이미 그 이면에는 표상되는 그 무엇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명제에 내포된 숙명은 인간의 지적오만에 대한 보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Ⅳ. 

칼이나 포크와 같은 기성품을 이용하여 제작한 유병영의 일부 작품들은 미와 추(醜)라고 하는 미적범주 사이의 긴장을 의도적으로 야기하고 있다. 고열에 의해 일그러진 나이프들이나 벌레가 파먹은 흔적을 연상시키는 스테인레스그릇의 모습은 일견 추해 보인다. 이것들이 자아내는 불협화음은 그러나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으면서 내적질서를 꾀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외양이 보기 좋은 형태(good shape)라고는 볼 수 없다. 그의 실험의 목표가 그러한 결과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가 작품에 사용한 나이프나 포크의 디자이너는 그것을 만들 당시 굿 디자인을 원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사물이 지닌 미적성질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킴으로써 그것들을 탈(脫)맥락화 한다. 이제 고유의 용도가 폐기된 사물은 유병영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재료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단지 조각을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오직 바라다 볼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관조 대상이다. 조각가로서 유병영이 지닌 인간적인 미덕은 끈기와 성실성이다. 폐목에 수많은 나무못을 꽂아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의 심미적태도는 속도가 성공의 척도로 치부되는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스틱 생수병마개와 같은 기성의 사물을 물체의 표면에 꼼꼼하게 붙이는, 그래서 미적쾌감을 가져다 주는 작품을 제작하는 그의 억척스런 태도는 그것이 인격도야의 한 수단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는 선한 까닭으로 인해서 쾌를 주는 선이라는(kalokagathia)' 언명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유병영의 작품에서 하나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작품에 기울이는 그의 이 같은 성실한 태도일 것이며, 우리가 잊고 있는 덕목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일 것이다.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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