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상국 / 대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투쟁

윤진섭

구도 면에서 볼 때 이상국의 그림이 지닌 특징은 수평적 시선이다. 이것이 그의 전 작품을 관류하는 특질이다. 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 수평으로 바라보는 것, 이 시선 만큼 그의 그림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화력(畵歷) 35년을 일관되게 유지해 온 이 시선은 과연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이 베일을 벗기기 위해 그의 작품집을 살펴보면서 나는 ‘인간’에 주목을 했다. 인간, 이야말로 이상국 회화의 중심 테마이면서 소재이자 곧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즐겨 다루는 산, 나무, 산동네, 바다와 같은 소재들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인간을 중심에 둔 그의 사고는 서민들에게 애정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것이 곧 인간을 대하는 수평적 시선을 낳았던 것은 아닐까. 그 시선의 깊이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심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4.19때였던가. 우리 동네 뒷동산에 한 떼의 철거민들이 몰려와 밤에는 집을 짓고 낮에는 경찰이 철거반을 동원하여 헐어대는, 짓고 헐고 옥신각신하는 모양을 보면서 삶의 억척스러움에 울음을 삼켜본 적이 있었다.”
                                                      이상국, <자작 수상> 중에서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년 시절에 체험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그의 전 작품을 관류하는 끈끈한 정서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이상국 회화의 키워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화에서 조차 그 내음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배면(背面)의 끈끈한 정서를 이룬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문제는 그 자신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로부터 출발하여 사회, 민족의 문제로 번져나간다. 그러니까 이상국이 자신의 세계관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사이’로 본 것은 인간을 둘러싼 갈등의 국면 양상인 것이다. 대학시절에 읽고 감명을 받은 단재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에서 유래한 이상국의 사유는 이후 그의 회화관의 기저를 이루는 단초가 되었다. 대학시절,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화단적 상황에 대해 깊은 회의를 겪게 되는데,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외세와 민족적인 것이다. 그가 겪은 60년대의 화단적 상황은, 그 자신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가령 ‘회화 68’이나 ‘청년작가연립전’과 같은 전위 단체의 난립으로 요약된다. 이른바 실험이란 말로 대변되는 이 시기의 전위 활동은 팝을 위시하여 네오다다, 해프닝과 같은 외래 사조의 유입을 둘러싼 것이었고, 이는 작가들 사이에서 동조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이상국의 경우에 이러한 선택의 문제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던 듯 하다. 

“대학 2학년 말, 나는 아주 중요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것은 전공에 관한 것이었는데, 동양화를 할 것이냐 서양화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것이었고, 이주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상국, <자작 수상> 중에서

이 선택의 기로에서 이상국이 택한 것은 동양화였다. 그것은 “당혹스럽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였기 때문에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상국의 그림에서 동양화 특유의 필획의 내음을 맡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리라. 그는 분명 유채로 그림을 그리되, 그 내음은 재료의 차원을 떠나 있다. 나는 그 내음의 근거를 필선과 대상에 대한 해체적 시각에서 찾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상의 윤곽을 굵고 검은 필선으로 두른 것과 대상을 작은 단위들로 쪼갠 것에서 찾는다. 따라서 산이나 달동네를 그린 그의 그림들, 가령 <홍은동에서>(80x100cm, 캔버스에 유채, 1994)라든지 <산으로부터>(196x332cm, 캔버스에 유채, 1994)와 같은 작품들은 그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겸재 정선의 바위산 그림(가령, <금강전도>)과 맞닿게 된다. 그러니까 대상을 심히 해체한 그의 그림의 선례를 겸재의 실경산수에서 찾을 수 있는 바, 특히 <금강산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평면적인 구도와 몰(沒)원근이 그렇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술회에서도 드러난다. 


“전통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나(我)에 한 무엇인가, 단서를 잡아야 했다. 그것은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인습이 아닌 현실로서 이해하고 소화시켜야만 했다.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정선, 김홍도, 신윤복은 어떤 사람일까. 그럼 나는 누구인가.”
                                                    이상국, <자작 수상> 중에서

유채로 그림을 그리되, 그것은 단지 재료에 불과할 뿐이다. 동양화에서 출발했으나 서양식 재료인 유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본인의 선택의 문제이지 그림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도대체 그의 그림에서 맡아지는 저 투박한 유채의 질감과 굵고 강한 검정색의 필선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정선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 것인가.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어떤 점에서 길을 달리 하는가. 이런 질문은 굳이 세계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본 단재의 민족사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땅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두루 해당될 터이다. 이른바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는 특히 요즈음처럼 융합(hybrid)이 보편화된 시대에 옥석을 가리는 시금석으로 더욱 요청된다. 그 이유는 자유방임이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의 문제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해서 선택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문제와 그것을 용인하는 문제가 같을 수 없는 것은 문화의 수용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의 근저를 이룬다. 그렇다고 볼 때 이상국의 미적 산물들은 ‘아와 비아’ 간의  정신적 투쟁의 산물이며 갈등의 분비물일 터이다. 이상국은 일찍이 이 문제에 부딪혔고 그 해결을 위해 오랜 기간동안 몰입했다. 나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한 리뷰에서 이상국의 그림에서 맡아지는 국제적 보편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그의 경력에는 국제전과 관련된 단 하나의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심스럽게 거론하자면 많은 기회들이 그를 스쳐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기질과 관련된 것이다. 그를 조명하는 대규모의 기획전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탄탄한 구상력에 바탕을 둔 그의 그림이 점진적으로 추상의 경지로 나아갔지만, 그의 작품이 지닌 미적 보편성에 주목을 한 전시기획자나 비평가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굳이 거론하자면 90년대 이후 국제전의 양상이 설치나 영상과 같은 뉴미디어 쪽으로 편중되었던 사실도 그 이유 중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건 설치건 혹은 영상이건 간에 좋은 작품은 매체에 상관없이 역시 좋은 것이다. 나는 이상국의 작품에서 그런 내음을 맡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서 나온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상국 회화의 중심적인 소재는 인간이다. 그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둘러싼 환경, 즉 달동네라든지 산야가 나온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지난 35년간에 걸친 이상국의 화두였다. 여기에서 형식과 내용간의 길항관계가 싹트고 있다. 그에게 이 형식과 내용의 길항(拮抗)은 곧 구상과 추상간의 기나긴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미학적 고민의 내용을 이룬다. 즉, 대상이 추상화하면 할수록 인간을 둘러싼 주제의식이 약화될 소지가 있다는 것, 반대로 내용에 충실하면 형식이 탄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 이 두 문제가 길항관계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재 면에서 볼 때, 이상국이 80년대에 주력한 인간에서 90년대를 거쳐 최근에 올수록 점차 풍경으로 넘어간 것은 이 문제를 둘러싼 변화에 그 이유가 있었지 않았는가 짐작해 본다. 
 
이상국이 인체에서 풍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추상화 내지는 형식화와 함께 예의 대상에 대한 해체적 시도가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집이나 산과 같은 대상은 잘게 파편화하거나 작은 단위로 분해되기에 이르며, 종래 인체나 대상의 윤곽을 둘러싼 검은 윤곽선은 그 자체 독립적인 선으로 자리 잡는다. 이 추상화의 작용을 거쳐 형식이 곧 작품의 내용이 되는데, 여기에 이르면 대상의 형태소(形態素)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상국의 근작인 <백련사 나무-Ⅲ>(160x130cm, 캔버스에 유채, 2011), <겨울나무Ⅳ>(122x77cm, 캔버스에 유채, 2011) 등은 대상을 해체하여 선조(線條)로만 표현한 것이다. 이 연작에 이르면 극도의 추상화가 이루어져 대상의 형태소는 최소화하고 있다. 이는 대나무와 숲을 그린 연작보다 추상화가 더 심화된 것이다. 색조도 적이나 갈색, 청 등 단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요한 변화는 초기와 중기의 작품에서 보이던 강한 터치가 부드럽고 유연한 그것으로 대치되고 있는 점이다. 예의 검은 색 필선들이 사라지면서 힘차 보이던 화면은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단위와 단위 사이의 공간도 점차 넓어지면서 커다란 여백으로 치환되는데, 이 점이 그의 작품은 보다 진폭이 크고 여유가 있어 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이상국의 이번 전시는 지난 35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점진적 변화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 월간미술 리뷰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