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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택 / 사물과 지각, 그리고 몸의 수행성

윤진섭

Ⅰ. 도약을 위한 암중모색
우리 미술계에서 40대 중견작가가 차지하는 위치는 좀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위로는 원로작가들에게 치이고 아래로는 치받고 올라오는 신진작가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다소 어정쩡한 위치가 바로 중견작가다. 화단 활동을 시작한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이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가 비로소 모습을 보일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원만하지 못한 창작 환경이 지속적인 실험을 주저하게 만든다. 
이 땅에서 미술계에서의 입지를 위해 야심을 갖고 뭔가에 도전하는 작가들은 대개 공통적인 과정을 겪는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약 10여 년간은 이념이나 미술계의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 치열한 의식을 벼리며, 자신이 차지해야 할 위치에 대한 탐색을 전개한다. 대작 중심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시기도 이 무렵이고, 선배 세대의 미학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행해지는 시기도 바로 이 때다. 다시 말해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온 몸을 던져 새로운 미학에 청춘을 불사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유근택은 이 시기를 유감없이 창작에 매진하며 보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약관 17세의 나이로 <한국미술대전>에 응모, 당당히 입선을 하였으나, 고등학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취소가 된 뼈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한 때 그는 깊은 실의에 빠진 적이 있으나, 곧 상처를 극복하고 2년 뒤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이 일화는 유근택이 미술에 얼마나 큰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1982년 당시 공모전에서 취소된 작품 <휴(休)>(100x120cm, 종이에 채색)는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농가의 한 단면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특징은 한지의 특성상 이처럼 극사실적인 표현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극복하여 대상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데 있다. 섬세하게 묘사된 기둥이나 나무판자의 결, 벽에 걸린 농기구들, 그 아래 놓인 댓돌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한창 오수에 빠져있는 한 마리의 개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린 물상들은 한적한 농가의 풍경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에서 보듯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유근택의 작품들은 탄탄한 묘사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91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첫 개인전의 출품작들은 유근택의 회화적 야심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는데, 바로 이 작품들을 통해 과감한 먹선에 의한 수묵의 세계를 열어갔던 것이다. 한국화 분야에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일어난 수묵화 운동은 유근택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진학한 것이 1984년이니까, 이 이후 약 4년간의 학창생활을 통해 한국화의 진로에 대한 나름대로의 암중모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시기란, 앞에서 언급한 수묵화 운동에 뒤이어 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서서히 모색이 이루어지는 채묵, 채색화 운동이 연이어 나타난 기간을 일컬음인데, 이 기간은 유근택의 암중모색기와 대체로 겹치고 있다. 

유근택이 이러한 일련의 암중모색기를 거쳐 본격적인 발언을 시작한 것은 1991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첫 개인전이었다. 
<꽃밭에서>(91x117cm, 종이에 채색, 1990), <대지>(325x265cm, 종이에 채색, 1991), <고독>(198.2x161cm, 종이에 채색, 1991) 등 이때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은 이 무렵 유근택의 회화적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 작품들은 채색과 먹을 혼용하여 제작한 것들로서 거칠고 대담한 먹선에 채색을 부분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당시 이러한 경향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우선 한국화의 외부적 요인으로서 1980년대 후반 당시 우리 미술계에 불기 시작한 서구미술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미국의 뉴페인팅, 이태리의 트랜스 아방가르드와 같은, 구상 중심의 새로운 사조들은 비단 한국화 분야뿐만 아니라 미술계 전반에 걸쳐 돌풍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유근택은 한 인터뷰를 통해 당시 이들 서구사조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 때 나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것은 안젤름 키퍼나 바젤리츠 같은 화가들의 화집이었다. 그 화집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충격과 당혹감을 주었을 것이다. 산수화, 사군자 같은 것을 배우며 기법을 익히고 있을 때, 그것은 혼란과 갈등을 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1)

당시 우리 미술계에서 이러한 서구사조에 대해 심리적 중압감을 느끼지 않은 작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서구에서 불어온 바람에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작가란 매우 흔치 않을 터. 그리하여 한 사람의 젊은 동양화가로서 유근택이 그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긴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1991년에 관훈미술관에서 발표한 일련의 대작들은 신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서구사조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대응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유근택은 이 첫 개인전을 통해 의욕에 찬 대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유적-토타카(질주)>(2.65mx39.23m, 화선지에 수묵채색, 1991)가 바로 그것이다. 전시장 벽면을 꽉 채운 이 작품은 파노라마 형식을 빈 것으로 인물의 두상과 전신상의 배열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파묵과 선염을 적절히 구사하는 가운데 군데군데 채색을 가미하고, 다시 그 위에 거친 선묘로 인물의 두상과 ‘의미가 모호한 기호내지는 상징들’을 덧붙이고 있다. 이 거친 선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 바로 신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서구사조의 영향이 스쳐간 자취로 여겨지는데, 이것이 유근택의 회화에서 극복되는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Ⅱ. 정서에 대한 개안(開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근택의 회심의 대작 <유적-토타카(질주)>는 그를 일약 동양화단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예)’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에 ‘공간’지가 제정한 신진작가에 선정되기에 이른다. 당시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회화세계를 가리켜 “힘있는 운필(運筆)의 회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의 작업은 하나의 응답이 될 수 있다”고2) 함으로써 그의 활동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역사에 대한 유근택의 인식은 <유적-토타카(질주)>를 거쳐 그 이후에 제작되는 작품들을 통해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작가가 자신이 태어난 토양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간 사람들에 대해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화가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자기 나름의 고유한 미감과 스타일을 통해 구현하는 일 또한 역사적으로 부과된 당연한 소임으로 보인다. 이후에 보이는 유근택의 작업상의 행보는 이와 관련시켜 볼 때 항상성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으로 점철돼 있다. 그것은 ‘정서’라는 말로 대변된다. 

“나는 동양미학이 운필론(運筆論)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특히 현대사회에선 운필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거든요. 문화도 문화지만 단편적인 예로 슬픈 사람이 보는 세계와 기쁜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인지 저는 대학원 때부터 운필의 문제보다는 정서의 문제를 들춰내는 것이 내 작업의 중요한 목표이자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원 논문도 정선(鄭歚, 1676-1759) 정서에 관한 논문을 썼으니까요.”
                                     -유근택, 강홍구 작가와의 대담, 2009, 사비나미술관 개인전 도록 중에서-
 
비록 최근에 술회된 것이긴 하지만 이 정서의 문제는 유근택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그는 같은 풍경이라도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고 함으로써 이 감정의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앞에 인용한 글에서 “슬픈 사람이 보는 세계와 기쁜 사람이 바라보는 세계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같은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Ⅲ. 관념에서 현실로의 하강 
대체로 동양화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운필(運筆)의 문제는 산수화에 있어서 특히 준법(皴法)과 연관된다. 흔히 “산수화를 그릴 때 산이나 바위, 토파(土坡)의 입체감과 명암,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하는 기법”3)을 가리키는 이 준법은 정신성과 관련된 ‘사의(寫意)’보다는, 사물의 형태를 본뜨는 ‘형사(形似)’의 개념에 더 가깝다. 따라서 유근택이 이 준(皴)의 단계를 거쳐 임모의 단계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감정’의 단계로 나아간 것은 형사에서 사의로 옮겨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 동양화에서 이 형사와 사의가 별도의 항목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유근택에게 있어서 감정, 즉 ‘정서’의 문제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사의의 개념이 아니라, 작가가 느끼는 일상의 감정, 곧 사물을 보는 방식과 관련된 특유의 정서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전통 동양화에서 ‘사의’의 개념이 작가의 흉중에 서려있는 고매한 정신의 표출, 즉 추사가 말한 대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과 같은 것이라면, 유근택의 ‘정서’가 의미하는 바는 사물을 보는 지각방식과 관련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소재로의 전환과 함께 유근택이 말한 ‘생활세계로의 내려옴(下降)’인 것이다. 

“호분을 작업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1999년도 원서갤러리에서의 <창밖을 나선 풍경>에서였는데, 제겐 꽤 상징적인 작업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느껴오던 부분이기도 한데 당시에는 동양화라는 (어떤) 지나친 관념적 정신주의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거웠어요. 난 몸으로 느끼는 그 무거움을 땅으로 끌어내리고픈 목적이 있었고,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과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했지요.”
                                                            - 유근택, ‘강홍구 작가와의 대담’ 중에서, 2009 -

유근택은 1999년, 원서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을 개인사적으로 작업상의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전시회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이 전시회에 이르러 비로소 기존의 전통 수묵화가 지닌 관념적 측면에의 편향에서 벗어나 생활 세계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밖을 나선 풍경> 연작은 눈앞에 보이는 일상적 소재를 평면적인 표현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유근택의 시선은 관념에서의 벗어남, 즉,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몸담고 있는 현실, 즉 땅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른 독자적인 조형언어, 곧 독자적인 표현방법의 개발이 뒤따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에서 바라본 밖의 풍경을 그린 이 연작에는 시간성의 문제와 아울러 대상을 보는 지각방식,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지각을 통해 대상을 느끼는, 그리고 거기서 촉발되는 ‘정서’의 문제를 화면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즉, 틀에 박힌 관조에서 어떤 ‘놀라움(wonder)’을 수반한 지각작용이 일상적 풍경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그 결과, 유근택의 화면은 이전의 화면과는 판이한 지각체험의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가장 큰 변화는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른 등장인물의 동세 표현에 나타나 있으며, 그 다음이 박진감 있게 전개되는 ‘균질한(all-over)’ 화면효과다. 유근택의 작업에서 이 ‘장관(spectacle)’은 대체로 큰 화면에서 유발되고 있는데, 그의 대작들이 스펙타클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다.  

Ⅳ. <만유사생>과 몸의 기투성
작년 사비나미술관에서 가진 전시회에서 유근택은 24점으로 구성된 <만유사생> 연작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연작에 나타난 유근택 특유의 필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치 사물이 녹아서 흐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회화적 기법은 이제 유근택의 회화를 대변하는 기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호분과 과슈를 혼합하여 모필을 옆으로 스치듯 뭉개서 초점을 흐리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소재를 그리되, 그려진 결과는 마치 꿈속의 풍경을 보는 것과 같은 몽환적 효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 것은 자라나는 식물들이 방 안에 서식하여 마침내 방 전체를 점유할 것처럼 보이는 실내 풍경을 그린 일련의 연작들에서다. 거기서 식물들의 배경을 이루는 방의 일상적 풍경은 그 위를 뒤덮고 있는 식물들 사이에 뚜렷한 대비를 드러냄으로써 초현실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일종의 몽타주 효과처럼 보인다. 이 서로 다른 차원의 결합은 관객들로 하여금 사물의 존재를 새롭게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이미지가 인쇄된 두 장의 투명 필름들이 겹쳐질 때처럼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식물들의 등장은 평평해 보이던 방 안의 풍경을 깊이감이 존재하는 풍경으로 전환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다.

작가 자신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만유사생>이라고 붙인 이 24점의 일상적 풍경들은 작가 자신의 몸이 하나의 장(場)에 던져져 있다는 점에서 ‘신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내 눈 앞에 펼쳐진 저 풍경이 결국은 나의 눈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보이는 것이고, 내게 의미를 띠게 된다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유근택은 그러한 행위를 가리켜 ‘시각적 호흡’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는 회화를 호흡의 지평에서 보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 하나의 신체가 있다. 그것은 나의 몸이어도 좋고 보는 자의 몸이어도 무관하다. 어떤 장소에 대한 몸의 구체적인 던짐은 신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발생하는 계기다. 만찬장이나 연회장은 그러한 몸의 던짐, 즉 육체적 ‘기투(企投)’가 보다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그러나 그의 <만찬> 연작에는 정작 몸의 주체인 인간들의 모습이 증발돼 있다.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음식이 담긴 접시들, 포크와 나이프, 꽃 등등이 테이블 위에 어질러져 있다. 그의 <만찬> 연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어질러지는 만찬장의 모습을 통해 시간의 추이는 물론 ‘욕망이 충돌하는 장소’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예컨대 그는 ‘6자 회담’과 같은 정치적 담론이 무성하게 전개되는 만찬장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음험한 정치적 거래에 대한 풍자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근택은 최근 몇 년 간의 활동을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작가의 반열에 오른 바 있다. 많은 미술평론가들과 큐레이터들이 그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반증해 준다. 이 같은 화단의 평가는 가령, 최근의 <사막> 연작에 나타난 독특한 표현방식에서 보듯이 그의 치열한 실험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지각작용을 수행하는 눈의 적극적인 참여와 그러한 신체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경이로운’ 느낌에 대한 회화적 표현의 문제와 연관돼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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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월간미술, 1997년 3월호
공간, 1992년 7월호
유근택 도록, 관훈미술관, 1991
유근택 도록, 사비나미술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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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1, 3회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저서: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미진사), 한국 모더니즘미술 연구(재원), 몸의 언어(터치아트), 한국의 팝아트(에이엠 아트), 미술관에는 문턱이 없다(재원), 행위예술감상법(대원사)외 다수.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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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유근택, 인터뷰, 월간미술, 1997년 3월호, 56쪽.
        2) 오광수, 공간, 1992년 7월호, 102쪽.
        3)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刊, 2002,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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