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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항아리를 보고 절을 한 컬렉터 이우복

김종근

미술판에 있으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컬렉터의 집을 방문했다. 대기업의 회장을 비롯하여 수백점을 가진 컬렉터 등 수십억대의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컬렉터 중의 한 분이 바로 이우복 회장이다. 그의 컬랙션을 보고 나는 컬렉터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다시 새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컬렉션의 규모도 규모거니와 작품 보관, 숮비한 작품의 그 질적인 수준이 예사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36년 3월 23일 충남 서천군 마산면 마명리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금성방직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1967년 친구 김우중과 함께 대우실업을 창업하였다. 1968년 대우실업 상무이사를 시작으로 1971년 전무이사, 1977년 부사장, 1980년 사장, 1981년 (주)대우 부회장, 1987년에는 대우그룹 부회장, 1995년 (주)대우 회장을 지냈다.
그는 스스로 모은 그림들을 가지고 컬렉터의 이야기를 담은 저서 <옛 그림의 마음씨>란 책을 냈는데 거기에 그의 약력은 위와 같다. 화려한 이력보다 화단에서 그는 1등 컬렉터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그가 작품을 바라다보는 눈썰미나 말 솜씨는 미술전문가를 앞지른다. 그러한 배경에는 그가 가진 미술에 대한 넘치는 사랑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나 학자들과의 교류가 확인 된다. 당연히 주변에는 오랜 교분을 나눈 화랑대표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술에 관한 탁월한 안목은 물론 이미 애호가 수준을 넘어선 전문가 뺨치는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 미술계가 이 회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림을 보는 ‘타고난 안목’ 때문. 지금까지 구입한 미술품 중에 모조품이 단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거침없이 화가들의 아픈곳을 찌르는가 하면 현존작가들의 비평에도 막힘이 없다. 그것은 그의 미술사랑이다. 특히 그는 조선시대 회화와 도자기 그리고 근현대미술을 아우른다.

삶의 열정 가운데 99%를 대우를 세우고 키우는 데 쏟았다면, 1%는 미술에 바쳐 비로소 삶의 돌파구를 발견하였고 미술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1%를 통해 99%를 넘어선 사람이 그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이다. 그가 미술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예닐곱 살 무렵 고향(충남 서천)의 숙부 집에서 처음 본 정물화 한 점이 인연이 되었다. “‘사람이 손으로 그린 꽃과 과일이 어쩌면 저렇게 실물과 똑같을 수 있을까’ 너무 신기해서 꼼짝하지 않고 한 시간을 쳐다봤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엔 온통 그림 생각뿐이었죠. 그때부터 그림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됐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충남 서천 시골에서 태어나 자애로우신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엄격한 교육 아래서 조선의 푸근한 맛과 멋에 이끌렸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미술품 애호가인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진것이다. 그의 명성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김우중 회장과 만나 대우를 세웠고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도 자세히 소개될 정도로 경제계에서 유명했던 그는 대우의 성장에 안살림을 도맡아 온 사람이다.
그의 예술을 향한 삶이 어떠 했는가는 그의 책이 잘 이야기 해준다. 그림으로 만난 이중섭과 김환기의 이야기며 20세기 문화계 인사들, 검여 유희강, 청명 임창순, 여초 김응현 그리고 중국 서예가들과의 마남도 있다. 특히 그가 애착을 가지고 벽면에 걸어둔 겸재 정선의 작품과 조선미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과 예술혼을 불태우다 스러져 간 위대한 화가들 이야기가 소박하게 담겨있다.
그의 그림에 대한 짝사랑은 깊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받은 첫 월급으로 처음 산 그림은 조그마한 자수 풍경화. 어디 가야 그림을 살 수 있는지 몰라 막연히 백화점에 가면 되려니 하고 가서 샀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첫 직장( 금성방직)에 들어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도 이 회장은 그 길로 화랑으로 달려가 한 달치 봉급을 다 주고 그림을 구입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돈만 생기면 땅은 한 평도 사지 않고, 몽땅 그림 사는 데 썼어요. 다행히 집사람이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이해해 줘서 가능했다.” 라고 그의 부인에게 공을 돌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모은 작품들은 그의 작은 전시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의 회화, 도자기와 목기, 이중섭 박수근의 그림까지 빼어난 명작들이 모두 그의 소장품이다. 그의 집에는 이중섭 박수근 작품만으로 둘러 쌓인 작은 전시장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개인 컬렉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의 달항아리 사랑도 지극하다.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출근시간이 일러서 늘 새벽에 일어나야 했지만, 그날은 더욱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으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늘 그렇듯 먼저 문갑 위의 달항아리에게 시선을 옮겼는데, 그 자태가 몹시 장엄하고 황홀하였다. 순간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첫 인상과는 또 다른 무엇으로, 항아리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빛을 발하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새벽에 바라본 달 항아리를 보고 큰 절을 하였을 정도로 신비감과 황홀감에 빠진 후 달항아리를 마음속의 신령으로 대하게 되었다 한다. 그는 화풍이나 미술사적 의의를 보기보다 작가의 마음을 따라가 사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림을 내놓으면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곧바로 결정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포장을 뜯는 순간 결정을 내린다. 그는 초보자들에게 그림을 사는 데 쩨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현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불하는 게 좋고, 일단 사고 나면 뒷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쩨쩨하면 좋은 작품을 못 만난다는 것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최고의 감성 경영자입니다. 작가 중에서 이중섭 선생을 비롯해 김환기 박수근을 가장 좋아하는 그는 기업에 리더십과 경영철학 같은 형식이 존재하듯이 그림도 독특한 색감과 선이 있어야만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산 그림들은 지금 상상할수없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1970년대 중반 박수근의 작품은 호당 4∼5만원에 불과했다. 청전 이상범의 전지 크기 작품도 50만원이면 살 수 있었고, 도상봉의 유화가 호당 2∼3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안방에서 거실로. 그리곤 청아한 빛깔의 백자명기며 우윳빛 색감이 감도는 매혹적인 백자연적, 조선시대 옛 그림과 박수근ㆍ김환기의 그림과 어김없이 조우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30년간 저자와 교류하면서 뛰어난 애호가는 말 없는 미술사가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독백은 미를 보는 눈을 틔워주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대우 시절에도 한 번도 남 앞에 나선 적이 없다며 인터뷰는 거절한다고 했다. 현재는 미술품을 감상하고 독서를 즐기며 사색과 성찰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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