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고흐 / 그 열정과 광기의 색채 - 노랑

김종근

고흐는 미술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화가로 불린다. 그의 생애가 너무나도 비참하고 37살이라는 짧은 생애의 자살이 지독하게도 안타깝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쥰데르트 시골, 그는 먼저 죽은 고흐라는 형의 이름을 다시 달고 태어났다, 마치 살바드로 달리처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길 희망했지만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목회를 포기하고 그는 드디어 화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화랑에 취직한 그는 점원으로 시작했다. 하숙집 딸을 사랑했지만 거절당했고 사촌 케이보스와의 사랑고백도 실패 했다. 그는 어린 딸을 둔 이혼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 그녀가 그의 모델이 되었다.

이렇게 언제나 그의 사랑은 실패 했고 좌절과 가난 속에서 그림을 붙들었다. 미술학교 선생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화가가 되었다 .

그래서 그가 초기에 그린 그림은 어둡고 우울했지만 ,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오면서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으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888년 2월 태양빛을 찾아 그는 아를르로 갔다. 그는 거기서 점점 남불의 노랑색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노랑색은 이미 1887년 생애 처음으로 해바라기에서 강렬하게 드러났지만 고흐는 따뜻함, 우정 ,태양빛을 나타내는 해바라기의 노랑색에 이끌렸던 것이다.

<폴 고갱의 의자>는 그만이 알고 있는 햇볕과 따뜻함을 나타내는 노랑색과 우정의 불꽃으로서 상징적인 색채 이었다.

8월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우리 둘만의 작업실에서 고갱과 함께 살고 싶다, 해바라기만으로 이 작업실을 꾸미고 싶다.” 그러나 고갱과의 절실했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노랑색의 해바라기와 돌이킬 수 없는 고갱과의 결별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림을 그리는 그의 묘사법은 독특했다 . 고흐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눈으로 본 것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 애쓰기보다, 다양한 색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나 자신을 그리려 한다.” 고 고백했다. 그 다양한 색 가운데 그가 가장 열중 한 것이 노랑색이었다.

<시인의 정원> <자화상> <노란 집> <농부가 있는 밀밭> <까마귀 나는 밀밭> <파이프가 놓인 의자> <노란 배경을 한 붓꽃 화병> 등 수많은 작품들이 노랑색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노랑색을 찾아간 것은 아니다.

그의 궁핍했던 고향 누에넨 풍경과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어두운 색조와 강한 색채들은 파리를 거쳐 아를르에 정착하기 까지 그의 정신적인 흐름과 함께 색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 그는 비록 젊음을 상실 했지만 젊음과 신선함이 담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고 확신 했던 것처럼 그의 <아를르의 밀밭>과 <추수>작품들은 색채와 빛의 처리에서 대표적인 그림이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 노랑색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외부는 노란색,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진 빛이 잘 드는 집을 월세 15프랑에 빌려 쓰기 시작한 아를르 시절이 절정에 이른다.





35살의 나이인 그는 스스로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색채를 창조 할 수 있는 화가가 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작은 식당에 살면서 썩은 이를 악물고 그림을 그리며 창녀촌에나 드나드는 나 같은 화가를 상상할 수가 없다.”고 자학 했지만 그는 화가 공동체의 꿈을 안고 오로지 그림으로 이 역경을 극복 하려 했다.

그해 10월에 그린 고흐의 노랑색이 그득한 <침실> 은 노란 집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그가 자신이 그린 최고의 작품이라고 했다. 이즈음 그는 일본의 우끼요에를 발견하면서 그 속에서 원색적인 색채와 강렬한 선의 영향에 힘입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 했다.

모두가 그를 멸시하고 미치광이라고 등 돌렸지만 미술평론가 오리에는 “지저분한 길과 추한 현실의 삶으로 뒤범벅 된 혼돈 속으로 되돌아온 순간, ......찬란한 단조로움...검은 색깔조차 모두 반들 반들 맑고 영롱했네!” 이렇게 극찬 했다.

동료화가 피사로도 “이 사람은 미치거나 혹은 우리를 훨씬 앞질러 갈 것이다.

우끼요에 그림처럼 밝은 색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발견한 노랑색의 승리였다.

<씨뿌리는 사람이 서 있는 밀밭과 석양>은 그러한 황금색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며 <프로방스의 낟가리> <아를르 식당의 실내>등도 그가 살던 아를르의 노랑색 풍경이다.

그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꿈꾸었던 친구 고갱은 아를르를 “남불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신랄하게 불렀지만 그래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여기서는 사람들의 마음 한 쪽에 깊은 속이 있고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많은 우정을 발견한다고 썼다.

고흐는 이 도시에 만족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찾고 있던 색깔의 효과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빛깔이 여기서는 정말 아주 아름답다. 초록빛이 신선할 때에, 그건 풍요로운 초록빛이다. 북쪽 지방에서는 드물게 보는, 마음을 진정 시키는 초록빛이다. 초록빛이 먼지에 싸여 다갈색이 되어도, 그것 때문에 흉해지지는 않는다. 그럴 때면 풍경은 모든 뉘앙스를 다 가진 황금빛 색조들을 지닌다. 초록빛 황금색, 노란 황금색, 분홍 황금색, 또는 구릿빛이나, 레몬색 노란 빛에서부터 흐릿한 노란 빛까지....”

이렇게 남불 지방의 햇빛이 가진 능력과 섬세함의 발견은 20세기 전후에 활동했던 많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반 고흐는 이렇게 썼다. “...나는 미래와 현재를 위해 남불 지방의 존재를 믿는다.”고 한 그의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한 주일에 다섯 점의 유화를 그리면서 완전히 지친 반 고흐는 자기의 침실을 그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우선 빛깔은 “벽은 엷은 자줏빛으로 되어 있고”, “침대의 나무와 의자들은 버터빛 노란 색이고, 시트와 베개들은 아주 선명한 레몬빛 초록색이며” 침실 벽에는 고흐 자신과 여동생 윌의 초상화 그리고 일본풍 그림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공간적으로 뒤틀렸다는 사실에서 벌써 고흐가 정신적으로 돌아버린 그림의 신호로 보려고 했지만 그에게 가장 만족을 준 것은 침실이었다.

이 아틀리에의 침실은 그가 오랫동안 열망하던 노란 집에 살게 된 것을 기념한 작품이다.

고흐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집에 입주했고 <유황빛 노란> 햇빛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희망이 가득했다. 물론 그는 이미 일본의 쟈포니즘이란 예술적인 마력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사물의 형식을 단순화 한 가장 이상적인 작품으로 생각 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는 그만이 남불에서 발견한 < 채도 놓은 노란색>으로 방 분위기를 이어갔으며 이 작품으로 세 가지 버전에 작품을 만들어 냈다.

고흐에 색채의 변화는 색조가 더욱 밝아졌다는 점이다. 초기 1885년 <감자먹는 사람들>의 어둡고 암울한 색채에서,1886년 파리에 인상파 화가들과 만나면서 <클리시 거리> 같은 작품에서는 밝고 빛나는 색조의 순색을 외광회화에 접목 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색채에의 환희와 개성이 노랑색에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무르익은 밀밭에서의 생동감 있는 노란색과 <별이 빛나는 밤> 에 빛나는 별에 사용된 색등이 바로 노란색이었다.

또한 노란집에 입주하기 전 카페에 살았던 그는 <저녁의 카페>라는 포럼 광장의 카페에 드나들면서 그곳 테라스와 카페 내부의 장면을 화폭에 옮겼다.

벽면에 선명하고 붉은 색은 큰 촛대들의 레몬빛 노란색 점들과 대조를 이루었고, 이 모습은 별이 뜬 하늘의 푸른 색 위에 두드러진 카페의 노란 불빛을 더욱 부각 시키고 있다.

그에게 노랑색이 절정으로 나타난 작품은 해바라기였다. 고흐의 상징인 해바라기는 1888년 8월28일 보낸 편지에서 더욱 단순한 기법으로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다고 썼다.





오랫동안 고흐가 남긴 열점의 해바라기에서 극도의 단순미와 노랑색의 열정을 발견한 사람들은 없었다.

노란색으로 가득한 해바라기는 고흐가 아를르에 도착한 1888년 가을 고갱의 충고로 처음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는 캔버스 세 개를 동시에 시작했다. 첫 번째는 초록색 화병에 꽂힌 커다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그린 것인데, 배경은 밝고 크기는 15호. 두 번째도 역시 세 송이인데, 그 중 하나는 꽃잎이 떨어지고 씨만 남았다. 이건 파란색 바탕이며 크기는 25호. 세 번째는 노란색 화병에 꽂힌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이며, 30호 크기이다.

꽃은 아주 정확하게 그렸지만 덧칠한 색과 격렬한 몸짓의 꽃잎 , 밝은 파란색 배경의 꽃잎등이 단순한 해바라기만을 의미 하지는 않았다.

“해바라기”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반 고흐의 “강렬한 노란 색조”이며, “영원히 강한 태양”과 그 불타는 햇살을 그림으로 그린 상징이다. 빈센트는 이 햇빛을 찾으러 아를르에 왔고, 거기에서 자신을 불태웠던 것이다.

“해바라기” 시리즈가 그 결과 이었다. 오늘날 이 그림들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색깔의 추구와 형태와 색깔의 결합에 대한 추구의 명백한 상징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묘사로 이 점을 명시했다. “노란 바탕 위에 노란 꽃병 속에 있는 노란 꽃”이었다. 오래 두고 배합된 단색의 조화는 공간을 정복했는데, 이것은 “남불 지방을 온통 노랗게, 온통 주황빛으로, 온통 유황색으로 만든 화가” 몽띠쎌리를 생각하며 만들어진 조화였다는 것이다.

노랑 “ 그것은 어떤 감동을 암시하는 색깔이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밋밋한 색조의 노랑과 보라의 조화 이었다면 “밤의 카페”의 빨간 색과 초록의 조화에 고흐는 노란 색을 첨가했다. “카페의 테라스”에서는 그가 노란 색과 주황색과 파란 색의 대조에서 오는 균형에 도달했고 “별 있는 밤”에서는 엄밀하고 세심한 색채의 작업으로 주황색과 연보라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노란 색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모델 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익숙했지만 , 모델이 없으면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은 그가 가장 존경한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에서 그 이미지를 차용해왔다. 그는 과장 된 색채 즉 노란색의 태양과 하늘 ,파란색과 자주색의 밭이 있는 장면으로 바꾸어 표현 했다. 비록 죽을 때 까지 단 한 점 <붉은 포도밭> 한 점이 400프랑(6만 원 정도)에 팔렸지만 그는 결코 외롭기만 살다 간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에 감탄한 로트렉은 그를 비판하면 결투를 신청하는 장애화가도 있었다.

그러나 몇해전 고흐의 대표작이자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구입한 “14송이의 해바라기” 작품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안전 화재해상보험 회사가 창립 100주년 사업으로 1987년 뉴욕의 크리스티의 경매에서 2475만 달라에 구입, 현재 야스다 간사이 미술관이 자랑하고 있는 애장품이었다.

고흐는 이 해바라기를 고갱이 원해 한 점 더 똑같이 그려 그의 그림과 바꿨다. 이듬해 그는 “14송이의 해바라기”를 두 점 똑같이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현재 런던 내셔날 갤러리와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 각각 소장 되어있다.

어쨌든 고흐는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그림에의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동생 테오에게는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고 동생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잊지 않았다.

그의 노랑색에 대한 아를르의 열정도 고갱과의 귀 자른 사건으로 파급되면서 고흐는 가쉐박사, 그리고 마지막 자살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근교의 오베르 쉬르와즈로 가야만 했다.

오베르 쉬르 와즈는 파리에서 35 Km 떨어진 아주 작고 조용한 마을. 그는 여기에서 <오베르의 교회><밀밭이 있는 풍경> 등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림에 실제 모델들이 대부분 다 이 근처에 있다 .

그는 이 오베르에서 하루에 3프랑 (약 500원)씩을 주고 1890년 5월 20일에서 7월27일까지 약 70일간 머물렀다. 이젤 하나와 침대 하나면 꽉 차는 2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그는 하 루에 한 점씩 불꽃같은 작품 70여점을 남겼다.

오베르는 그가 “심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 이라고 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 의 작품을 자살하기 며칠 전 남겨놓았다. 고흐가 이 청색과 노란 색의 조화로 진정한 여름 “햇빛의 폭발” 앞에서 그는 어떤 한 순간을 묵시적으로 드러내었다. 마침내 1890년 7월27일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고흐가 죽은 뒤 오베르는 세잔느, 피사로, 도미에 등 당대의 화가들에게 사랑 받는 장소가 되었으며. 1957년에는 커크 더글러스가 출연한 영화 「반 고흐의 뜨거운 삶」의 실제무대가 되기도 했다.

“태양과 햇빛을, 더 나은 표현이 없어, 나는 노란 색, 연한 유황빛 노란 색, 연한 레몬 색, 황금색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던 고흐가 사랑한 마지막 색채였다. “나는 새장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오 신이시여 ,다른 새들처럼 나에게도 새가 될 자유를 주십시오. 라고 섰다. 그는 결국 그가 간절하게 원했던 데로 죽어서 새가 되었다.

월간중앙 2006년 10월호
미술평론가 김종근의 ‘색채, 화가들의 영혼’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