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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등진 요절한 예술가는 위대했다.

김종근


모든 시대에는 그들의 시대를 등진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예술에 인생을 걸고 그들의 예술 혼을 불사르며 아주 짧게 불꽃처럼 삶을 살다간 작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30∼40대를 전후하여 이 세상을 떠난 작가들과 50대를 넘겼지만 작품 활동 기간이 너무나 짧아 예술가로서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꼭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 인생이 짧아야 되는가 아니면 숙명적으로 그 불행과 비극을 타고나는가?

예술가들은 대부분 마치 인생을 예술에 대한 천재성과 맞바꾼 것처럼 응집된 치열함과 뜨거움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보여준다. 때로는 매우 서두르거나 죽음이나 자살을 예견한 작품들과 어록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하여 실제 작품의 가치 이상으로 신비롭게 조명되는 것도, 그 신비화가 작품을 제대로 보는 데 방해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칫 요절작가들은 대부분 극적이고 소설 같은 삶을 살았지만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경향도 있다.

세기의 천재 예술가 고흐는 말했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어디 세상을 요절한 화가는 고흐뿐이었는가? 에곤 쉴레 28, 반 고흐 33, 모딜리아니 36 ,라파엘로 37. 폴록 44 . 이것은 세기의 미술사를 수놓았던 화가들이 살다간 그들의 짧았던 생애이다.

길다랗고 누운 나부로 알려진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희망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고 있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삶은 예술가들의 인생이 풍요롭게 흐르는 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은 것이다.

천재화가로 꼽히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나야 할 것 같다.' 결국 그는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예술가에게 운명은 이렇게만 오는 것은 아니다. 랩음악과 브레이크댄스를 즐겼던 반항적인 청소년과 흑인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뉴욕 브롱크스 벽면과 지하철을 속도감 있는 이미지와 문자로 도배했을 때 낙서가 돈이 되어 현대미술로서 자리 잡게 한 바스키아와 키에스 헤링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 때 첫 전시를 가졌고 그 꿈을 위해 뉴욕으로 와 클럽의 음악가와 퍼포먼스 바스키아와 앤디워홀 등을 만나게 된다.

헤링은 속도감 있는 간결한 선과 필치로 디자인을 미술로 끌어올렸다. 그러다 1985년 에이즈에 걸렸다.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열정을 에이즈의 위험과 퇴치를 알리는 데 힘썼고, 죽기 전에는 헤링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퇴치와 전위 예술가들을 도왔다. 결국 그도 1990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인생을 예술, 예술을 인생이라 하며 섹스의 죗값을 혹독하게 치렀던 예술가의 종말이었다.

프랑스의 화가 죠르쥬 쇠라 (1859.~1891)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인상주의를 악착같이 지키려 했던 그는 그랑드 쟈트의 일요일 같은 몇 안 되는 대작에 열정을 다했고 결국 대작을 그리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그림 그리는 고된 노동과 과로로 32살의 나이로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1890년 비엔나 근처 튤린에서 태어난 에곤 쉴레.16살 비엔나의 대부 쿠스타프 클림트를 만났다. 시대에 역행하는 학교 교육에 반발, 저항하다가 퇴학당했다.

성기를 과감히 가공할 정도로 확대시키는가하면 여인으로 하여금 애무케 하는 장면을 거침없이 그려냈다. 특히 미소녀적인 여체는 그에게 절대적인 주제였고 그 그림들은 에로틱하고 섹슈얼한 이미지로 화폭에 출몰했다. 그러나 천재는 외롭다. 22살 때 열네 살짜리 소녀를 유혹한 죄와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 24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 세기 말. 악명 높은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이던 쉴레의 아내가 먼저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쉴레는 3일뒤 아내 뒤를 따랐다. 쉴레가 죽었을 때 유럽 전체가 초상이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짧은 천재적인 죽음은 가장 신봉하고 영향을 받았던 반 고흐에 비유된다.

황금색 옷을 걸치고 아름다운 여인과 키스하는 황홀한 포즈, 그러나 정작 이를 그린 클림트 그는 너무 불행하고 외로웠다. 집에 빵 한 조각이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사랑이 풍부한 남자 클림트 무려 수십 명의 여인이 그의 품을 거쳐 갔다. 심지어 그가 죽었을 때 14명의 사생아 어머니가 대신 유산상속을 청구할 정도였다

모델이 됐던 여성과는 정사를 나눈다는 소문이 난무할 만큼 여성편력이 탁월했던 그는 ‘빈의 카사노바’로 불렸다.

짧지는 않았지만 56세의 클림트는 신체마비와 독감으로 죽었다. 죽으면서 “나는 내 자신보다 여성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서양 미술사 중에서 렘브란트와 함께 빛을 가장 잘 이해한 얀 베르메르. 그의 생애는 수수께끼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베르메르는 렘브란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그림을 배웠다 . 화약폭발 사건으로 그의 스승이 요절. 21살 베르메르는 결혼을 했고 부유한 처가에 얹혀살면서, 그는 20년 동안 열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았고, 그 중 넷이 죽었다.

베르메르는 평생 동안 35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온 정성을 기울인 작품들로 개인적으로 절반이 넘는 21점이 한 사람에게 팔렸다. 한 때 그림은 팔리지 않고 궁핍한 생활을 비관 베르메르는 1675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거의 200여 년 동안 빛을 못 보았지만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낸 빛”이란 찬사를 받았다.

미국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 잭슨 폴록의 생애 (1912~1956)의 생애도 비범하지 않다.

'액션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미국으로 미술계 중심이 옮겨지던 시기에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이다. 그는 붓으로 그리는 회화의 제작 방식을 탈피해 ‘액션페인팅이라는 새로운 미술을 탄생 시켰다.

폴록은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음주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얼룩졌다. 만찬의 식탁을 뒤엎기 일쑤였고, 바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일도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44세에 술 취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한 화가로 남고 말았다.


비단 천재화가들의 요절은 결코 외국화가들에게만 닥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표현주의 화풍을 개척한 구본웅(1906∼1953),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화가 이중섭(1916∼1956), 한국적 조각가 권진규(1922∼1973), 추상화가 함대정(1920∼1959), 현대판화의 개척자 정규(1923∼1971), 향토성을 불붙인 김종태(1906∼1935), 민중목판화의 진수를 열어보인 오윤(1949∼1986), 신체적 불구의 애틋한 화가 손상기(1949∼1988), 인간 실존의 리얼리스트 류인(1956∼1999) 등. 이외에도 김경(1922∼1965), 송영수(1930∼1970), 여류화가 최욱경(1940∼1985), 추상의 박길웅(1941∼1977), 파이프 작가 이승조(1941∼1990), 설치•전위미술의 전국광(1946∼1990)의 작품 등이 있다.

마른 체구에 목판화에만 열중했던 오윤(1946-1986년)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며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담은 그는 민중 미술의 선구적인 작가였다. 특히 어우러져 추는 춤사위의 모습을 목판에 새겨 슬픔과 한을 묘사했다. 탈춤, 민속놀이, 판소리로 <칼 노래><남녘 땅 뱃노래><도깨비> 등 대표작이 그것이다.

목판예술의 진수와 혼을 불태웠던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그림을 그려 간경화로 마흔 한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여류화가 최욱경 또한 예술에의 열정과 헌신으로 불꽃같은 삶과 예술 혼을 불사르다 45세 나이로 요절한 화가이다. 그녀는 두 차례 미국에 체류하면서 추상 표현주의적인 미술을 뜨겁고 격정적인 색채로 보여주었다.

거친 속도감과 화려한 색채로 폭발적인 내면의 세계를 드러낸 강렬한 색채는 자신의 독백처럼 뜨겁다. “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겨울바람에 씻어 버리려고 여섯 자 눈 아래 파묻어 버리려고 잃어버린 호수에 가두어 버리려고 하지만 차마 못 잊겠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영생이기에 영원한 연인이 되려고 금지된 꿈을 꿈속에서 꿈꾸었습니다. <열애 >1985년. 「애멸된 독백」에서,

철저하게 외부 입김이 배제된 캔버스와의 싸움, 어떤 편견이나 압력도 내 성을 허물지 못하리라. 그녀는 오로지 결연한 의지로 그림에 목숨을 용감한 여자였다.

우리는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손상기 또한 잊을 수 없다. 194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되어 꼽추화가로 불린 그는 1988년 39의 나이로 죽었다. 1981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주목을 받은 그는 자라지 않는 나무, 시들지 않는 꽃 등 자연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였고 《공작도시》연작에 이르러서 사회와 역사 문제로 작품세계를 확산시켰다.

나혜석은 수원에서 출생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 .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여성소설 1호이다.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상 그림 못지않은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21세 때 남편이 결핵으로 사망하자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을 조건으로 결혼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21년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전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41세에 방랑 생활을 시작 안양 양로원을 거쳐 48세에 폐인이 되어 1946년 행려병자로 서울 자혜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애 이었다.

또한 한국 테라코타 조각의 권진규의 자살 또한 잊을 수 없다.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25세 때 도일하여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조각 수업을 받고 28세해에 '이과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일본화단에 주목을 받은 그는 서울로 돌아와 자신의 고독만으로 우리나라 테라코타 기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무서운 냉대를 겪으며 그는 자신의 분신 같은 고독한 인간의 초상들을 불교적 색채로 제작 했다. 특히 목이 긴 조각상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작업실에서 1973년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에서 “인생은 공,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렇게 눈길을 끄는 만큼 요절과 예술가들의 생애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천재화가들의 요절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요절의 화장(化粧)에 눈이 멀어 정작 우리가 정확하게 재평가해야 할 작가들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작품을 보는 일이지 그 작품 뒤 작가의 삶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평가를 받기 위해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이야기하여야 한다, 작가는 오로지 그림으로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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