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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침실의 나부-키키’

김종근





‘침실의 나부-키키’


지금 일본의 미술계는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릴(3월28일~5월21일) 후지타의 탄생 120주년 전시로 흥분에 싸여 있다. 그는 일본이 낳은 가장 전설적인 파리의 이방인 화가이며, 이 전시에는 파리 시대부터 만년까지의 대표작 100점과 일본 최초 공개 20여점이 선보인다. 1차대전 전후 파리에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러시아의 샤갈,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스페인의 피카소 같은 화가들이었다. 그들이 에콜 드 파리파였다.

후지타 쓰쿠하루(1886~1968)는 도쿄 미술 학원을 졸업하고 27세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세계는 큐비즘시대, 일본은 인상파나 빛에 넘친 사실주의가 칭찬받고 있어 표면적인 수업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그는 추위 때문에 그림을 태울 정도로 가난했고, 카페에서 만난 모델과 두번째 결혼한 그의 첫 그림값 수입은 7프랑(1,000원)에 불과했다. 술도 마시지 않고 그림만 그렸던 후지타는 단발머리만 했다. 돈이 없고 스스로 산발하고 있었던 시대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으며, 손목시계의 문신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루브르박물관에 들어가는 ‘100년 후에도 남는 그림’을 위해 그는 일본인인 자신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려 밤낮으로 노력했다. 여인과 인물 고양이는 그의 단골 주제였다.

드디어 붓에 의한 선묘를 살린 독자적이고 독특한 투명한 화풍을 찾았다. 그는 이런 화풍으로 살롱전 때마다 인산인해를 만들었고, 자신의 명성을 급속히 높였다.

침실 위의 여인을 그린 이 작품은 후지타가 36세, 모델은 당시 만 레이의 애인이자 몽파르나스 예술가들의 영원하고 완벽한 모델 키키를 그린 그림이다. 첫 나체화인 이 그림을 계기로 후지타는 ‘유백색의 나부’ 화가로 갈채를 받았다. 개인전에 온 피카소가 “후지타야말로 천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그림은 묘선에 일본화적인 후지타만의 화풍 표현이 있었고, 이 작품은 1922년의 살롱·도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이처럼 우윳빛 피부를 가진 아름다움으로 일본화풍을 만든 그는 우아한 선과 부드러움으로 높게 평가됐다. 다소 관능적인 포즈의 여인의 몸매는 장식적인 배경에 묻혀, 특히 긴 하체의 담백하고 단아한 먹선과 검은 빛의 어두운 나체는 숙명적이고 관능적인 슬픔을 보여준다.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전쟁 협력의 죄를 비난당한 1949년 후 “일본화단도 국제적 수준에 이르기를 기도한다”는 말을 남기고 파리로 가 두번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않는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다.

“내가 일본을 버린 것은 아니다”고 항변했던 그는 “그림을 팔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기행을 벌여 아무것도 모르는 프랑스인에게 일본화풍의 그림을 강매하면서 의기양양하고 있다. 후지타는 기교만 뛰어난 장인이며 아티스트는 아니다. 그리고 제대로 갖춘 사상과 인격이 없는, 전쟁협력을 한 전범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5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 1959년에는 가톨릭 세례를 받아 레오날르 후지타가 되었고, 1968년 취리히의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81세였다.


스포츠칸 2006.2.6 │미술속의 에로티시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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