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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쟁이 , 김선두 시골 촌놈

김종근

된장 뚝배기 같은 놈 ,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한마디로 질러 부른다.
김선두 . 그는 남도의 예술이 깃든 시서화가 뛰어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붓글씨는 물론 화론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님은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교사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그리하여 할아버지와 갈등이 심했다고 했다. 결국은 할아버지의 성화를 뒤로 하고 어머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단칸방에서의 보낸 고생은 아무도 상상할수 없다.

그 아버지에 그아들 . 김선두 그는 화가가 되었다. 1958년 12월 3일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자란 그는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 예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 현재 중앙대학교 한국화과 교수로 있다. 이것으로 보면 그는 아주 평범한 미대교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지금 우리나라 한국화단에서 예사롭지가 않다.

그를 알기 위해 우리는 1980년대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시기 1980년대 우리나라에는 수묵이 주류를 이루는 풍토에서 1984년 제7회 중앙미술대전에서 그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 문턱 높은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또한 이듬해 열린 제4회 미술대전에서 한국화 부문 특선의 영예를 안으면서 그는 또 다시 촉망받는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급부상하였다.
그가 대상을 받은 작품은 [일그러진 달]. 미술대전에서 특선한 작품은 서커스 소년이 오색 우산을 들고 외줄을 타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린 [외길]이란 작품이었다. 당시의 수묵이 강세를 보이는 화단에서 채색으로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간 그의 작업은 일찍부터 돋보이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묵과 채색이라는 분류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재료의 선택으로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작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회화의 구도와 형상, 색감 등에서 시각적으로 과감한 실험을 시도하여 독특한 화풍을 개척해 나가는 부지런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올해만 해도 4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서울과 울산 , 부산등 몇 개의 개인전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소위 말하면 그의 붓에는 물이 잔뜩 올라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고보면 실제 그는 아주 약간은 어리숙하고 모자란 듯 하지만 예술가로서는 아주 훌륭하고 타고난 천품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만나 보면 언제나 여유 있는 모습과 서투른 말솜씨로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토종 된장 뚝배기 같은 화가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 그는 얼마 전 그는 학고재에서 아주 이색적인 전시를 했다. 《옥색 바다 이불 삼아 진달래꽃 베고 누워》라는 책을 내면서 셋이 모인것이다.
전라도 장흥이 고향인 소설가 이청준(65), 시인 김영남(47), 화가 김선두(46) 그들은 함께 모여 여행을 하면서 그 끈적거리는 동행의 인간미를 바탕으로 각각 산문으로, 시로, 그림으로 한을 풀어낸 것이다. 그것을 바로 소설가 이청준은 ꡐ고향의 속살 읽기ꡑ라고 했고, 김영남 시인은 더 진진한 표현으로 아예 ꡐ고향의 젖가슴 만지기와 아랫도리 만지기ꡑ로 그들의 속내를 까보였다. 이들 세 사람의 예술가적 열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난 3년 동안 거듭 고향길을 밟으며 ꡒ고향을 더듬는 동안 한 번도 손이 부딪치거나 엉긴 적이 없었다ꡓ고 하니 화가 김선두의 넉넉한 속내를 느끼게 한다. 그런 넉넉함처럼 고향이 바다와 들판과 소읍이 어우러진 평촌리의 촌놈 내음이 그림에 물씬 물씬 풍겨 오기도 한다.

그런 그가 김선두씨가 최근 南道연작의 행 씨리즈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그림에 온몸을 바쳐 올인 하고 있다. 언제나 그의 그림에서의 품격과 격조를 기운과 운필에서 찾고 있다.
거침없이 휘감기는 모자란 듯한 필치, 조급해 하지 않고 비워두는 깊은 사색의 여백과 문기등이 화면을 감싸고 있다. 특히 휘감기듯 삐치는 길의 이미지와 붓놀림의 유려함이 빚어내는 이미지들이 화폭에서 춤추고 있다. 자연스럽고 시골 고향의 농촌 풍경에서 되살아나는 부드럽고 감추어지듯 비껴져 내려오는 선. 김선두 운필의 참다운 매력이다.

그 바탕은 무엇이며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할까 ?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을 말하고 있다. 산수화란 단순히 산과 물이 있는 경치를 그린 풍경화와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그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수화는 오묘하고 무궁무진한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담은 매우 이념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가 자연과 산을 타는 이유이며, 그 산을 다시 화폭위에 옮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는 그가 눈이오나 비가오나 산에 오르는 진정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특히 그가 “산수화를 즐긴다는 것은 단순히 풍경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자연에 대해 사색하고 관조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그의 예술에 대한 깊이와 고민을 느끼게한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예술과 철학의 깊이는 그가 만난 두분의 선생 때문이다.
서울대의 일랑 이종상 화백과 중앙대학의 산동 오태학 교수이다. 나에겐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두 분과 사제 관계 중 산동 선생의 크신 배포와 당신의 작품에 대한 작가적 자존심, 그리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솔직함이 었다고 할만하다. 김선두는 그러면에서 스승을 잘만났다. 일랑이 자문한 취화선에 최민식역으로 그림을 그린 역할도 학생들에게 영정을 제작하여 어려운 시기에 큰 돈을 만지게 해주기도 해준 것이 일랑 스승이다. 일랑선생님의 지도 방식 또한 특별했다. 80년대초 진경산수를 위해 서울의 구석 구석을 찍어
늘 이러하셨다. 선생님의 추상같은 엄한 평가는 때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선 그림의 신기를 꺾어 버리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저 바닥에 잠자는 오기와 투지를 불러 일으켜 준 쓴 약이었다. 이는 무거운 스트레스로 나를 압박했지만 한편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시대의 검투사처럼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학원 때였다. 선생님께서 KBS 1TV에서 문인화를 강의하게 되었는 데 나와 몇몇의 제자가 학생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체본을 보고 우리가 그린 그림을 품평하는 시간이었다. 예의 추상같은 평가는 여기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손만 나오게 되어 전국적인 망신(?)을 면하였지만, 마지막 녹화 날 느닷없는 애교기가 발동하여 용감하게 '저....선생님 오늘은 녹화 마지막 날이니 저희 그림을 한번 만 칭찬해 주십시요.'했다가 정작 녹화 때는 더욱 무참히 깨진 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이런 분이시다. 제자앞에서 제자를 칭찬하는 일이 있다면 그 날은 해가 동쪽으로 질 날일 것이다. 그냥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이 칭찬이었고, 바람잔 날 감나무 잎이 흔들리 듯 희미하게라도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극찬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한 선생님이셨지만 제자에 대한 칭찬이 어찌 없을 리가 있겠는가. 당신 마음에 든 제자의 작품에 대한 칭찬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하곤 했으니까.
선생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혹독하게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넘어 어느 후배의 개인전 뒷풀이에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화단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엄존하는 정글과 같은 곳인데 사자가 자기 새끼들을 키우듯이 강하게 키우지 않으면 화단에 나왔을 때의 시련과 고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재능있는 제자 일수록 더욱 엄하고 힘들게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줍잖은 재주나 기교를 부릴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좋은 작가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도를 간다. 인간 그 자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꾸밈없이 자기 자신을 그리면 된다. 진실되면 언젠가는 좋은 작품을 그릴 수 있다.'라는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겉으로 그렇게 엄하고 강해 보이시지만 속 마음은 참 따뜻하시고 정이 많은 분이시다. 선생님의 18번 노래는 '얼굴'이다.'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림 얼굴...........'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소녀 취향적인 노래말이다. 평소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노래를 보면 선생님이 얼마나 속으론 부드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소리 같기도하고 신세대 랩같기도 한, 리듬과 박자를 초월해 버린 선생님의 노래에는 구수한 선생님의 선처럼 허스키와 바이브레이션의 독특한 맛이 있다.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료 따로는 '문학이란 결국 자기 속에 내재한 소년의 투영이다'라고 하였다. 선생님의 그림세계가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 닿아 있는 이유도 이 속정과 따스하기 그지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까 생각한다. 우리 학교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선생님은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기억할 지도 모른다. 나도 딱딱하고 견고한 껍질안에 영양가 풍부하고 맛있는 속살이 있는 호두처럼 선생님의 속내를 안 것이 졸업하고도 한참 지난 다음이었으니까.
선생님은 고집이 쎄시고 말씀속에 약간의 과장법도 만만치 않으신 분이시라 화단동료들 사이에 '오대포'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그 과장법은 허풍이 아니라 선생님 특유의 언어 스타일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힘주어 강조하고 싶을 때 본의아니게 약간의 과장법을 섞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니까. 물론 선생님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94년 초 가을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우리 학교의 동료, 후배 교수들과의 회식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청태콩을 먹었더니 머리가 다시 많이 났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다. 그 때 나 또한 탈모가 시작되어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옆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슬쩍 선생님의 머리를 보니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어떻게 감당하실려고 그러시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좌중의 어느 분이 그럼 한번 머리를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자! 보라구.' 하시며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여 머리를 앞으로 내민 순간 갑자기 식당이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물론 선생님의 머리숱이 전혀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몽고의 대초원에 돋아난 어린 새싹들처럼 드문 드문 가는 머리카락이 여럿 보이기는 하였다. 머리가 새로 났다는 것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머리가 새까맣다라고 과장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외관상으로는 전과 전혀 달라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님의 과장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전혀 없다. 선생님께서 한번 이거다 하면 아무도 우길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고집과 과장법에서 선생님 그림의 개성이 나왔으며, 변형된 형태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무나 넘 볼 수 없고 오를 수 없는 깊은 맛이 우러 나왔다.

선생님께 배운 많은 것들을 이 짧은 글에서 다 이야기 하기란 불가능하다. 고래심같은 지구력, 오랜 세월 동안 일관되게 당신의 작품세계를 천착해간 신념, 주정하기위해 마신다는 술과 낚시로 대변되는 풍류......등등. 하지만 선생님의 생활과 작품 모두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다름아닌 '여유'다. 당신을 이를 '여'라고 말하시지만 제자들 작품속에 이 여가 없다면 좋은 평가를 내리는 일이 결코 없었다. 여는 넉넉함이요 너그러움이요, 초월적인 것이고, 자유스런 것이다. 허허로움이고, 풍류이고, 졸박이고 천진스러움이다. 백제 미술을 관통하고 있는 이 '여의 미'는 선생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중의 매력이지만 선생님 당신이 지닌 깊은 인간적 향기이기도 하다.
'참다운 스승은 입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슬기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은 당신 스스로 참예술가란 어떻해야하는지를 몸소 실천하여 보여줌으로써 이 아둔한 제자에게 끝없는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99년 그 혹독한 병마를 이기고 선생님께서 돌아오신 것은 아직도 우리 후학들에게 다 못 전한 사랑과 가르침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2003년 9월)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산 줄기로 연결된 것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국토를 동서로 나누는 토대가 되어왔다. 나는 이 백두대간의 종주를 통해 우리 국토에 대한 아름다움을 직접 내발로 걸어가면서 느끼고,또한 작품을 하면서 우리 그림의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해보아야 겠다


원색으로 땅의 생명력이 드러나고, 그 땅에 자라는 잡풀들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스며 있다. 민화적인 해학과 자유분방함도 누구든 친근하게 마음 기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우리 형제는 그로부터 10여년을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아버님은 가끔 집에 내려오셨는데 며칠 있다가 금방 서울로 되돌아가셨다. 어느 날 아침 아버님이 툇마루에서 등교하려는 나를 불러세우시더니 24색의 고급 크레파스를 하나 주셨다. 아야 선두야, 이 크레파스로 니가 그리고 싶은 것 있으면 마음껏 그리거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지금까지 무슨 꿈만 같았고 보물 같았던 그 크레파스를 잊지 못한다. 시골 구석에서는 구경도 못했던 고급 크레파스. 나는 그것으로 앞바다를 그리고 뒷산을 그리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 때는 철이 없어 남보다 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기에 감당해야만 했던 아버님의 고독과 말 못할 소외감, 그리고 화단의 거대한 텃세의 벽을 이해할 리 만무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사주신 크레파스의 의미도 잘 몰랐다. 하지만 나의 아들이 그때 당시의 내 나이가 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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