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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 작품이 좋으니까 - 한국현대미술의 사단장

김종근

지난 10월 초 국내 어느 일간지에서 뉴욕의 병상에 있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거기서 한국에 있는 예술가로 누구를 인상 깊게 꼽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제일 먼저 박서보를 꼽았다. 그의 답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왜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그토록 많은 작가 중에 박서보를 지목했을까? '작품이 좋으니까'가 그 이유였다. 그리고 백남준은 젊은 여자들을 보고 싶다고도 했다.

박서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박서보를 말한다는 것은 곧 한국 현대미술사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한국현대미술을 말하는데 있어 그를 빼놓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 박서보 사단이라고 할 만큼 모노크롬 회화와 홍대 쪽 미술을 이끌어 온 것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설령 그의 인간성은 말할지언정 그의 작품 앞에서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역사를 이끌어온 산 증인임에는 틀림없다.

박서보 그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경찰로 근무하다 직장 상사와의 마찰로 그 경찰복을 벗고 법률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때부터 이미 다른 사람들과 타협을 모르는 자신의 성질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에 관한 태몽을 기억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졌을 때 어두운 밤길에 신령님이 나타나 깊게 패인 발자국을 따라 밤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밤을 주워담는 태몽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가문에 큰 인물이 날것을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그렇게 인물이 될 거라고 하던 아들이 막상 미술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몸져누웠다. 그 길로 아버지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부친의 마지막 소원인 법률가의 꿈이 그렇게 깨어진 것에 대하여 그는 한동안 괴로워했고 그것을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그의 고집대로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들어갔고, 졸업 후 파리에 유학하면서 프랑스 미술을 발견했다. 미쉘타피에가 선언했던 앵포르멜 회화였다. 명칭에서부터 그는 알게 모르게 프랑스 앵포르멜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박서보의 작품들은 한국 앵포르멜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라는데 현대미술사는 주목하고 있다. 1958년 현대미협 제3회전에 <회화 No.1>에서 <회화 No.7>에 이르는 7점을 출품하면서 그는 작가들 중 가장 먼저 앵포르멜이라는 비정형의 회화 세계에 도달한 선구적인 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앵포르멜 회화의 출발과 동일하게 전후에 이루어진 미술운동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언제나 현대미술운동의 중요한 멤버로서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 중심에서 현대미술을 이끌어 왔다. 한편 그는 한국미술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앵포르멜 미술을 시작으로 국제적으로는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로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1962년 대학 강단에 선 이후 199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산업미술대학원장 미술대 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자로서 오늘의 홍대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부회장(1977 1979)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77 1980) 고문(1980)을 지내기도 했으며 1994년에는 그의 모든 작품을 보관한 서보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이사장으로 또한 작가로서 30대 작가 못지 않은 열정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많은 일과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부지런함과 치밀함 , 분명한 의사표현 ,그리고 명석한 행정력 덕분이다.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이며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작품을 관리하는 방법이라든가 , 자료를 정리하는 법 , 심지어 포도주를 저장하는 것까지 그는 질서정연하다. 그는 아직 40대 청년처럼 왕성하다. 그러나 그는 벌써 무덤까지도 준비를 해 놓았다. 거기다가 아니라는 신념이 생기면 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가는 다혈질적인 성격도 한몫을 한다. 이러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술계의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시절이 하수상하던 1956년의 반국전 사건이다.
젊은 시절 그는 김충선(작고) 김영환 문우식등과 함께 반국전 을 내걸고 4인전을 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반국전 선언문도 냈다. 당시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국전에 반대한다는 것은 반정부행위로 여겨지며, 그림 그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는 그런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가 안국동에 있던 이봉상 회화연구소에서 숙식을 하며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그 힘과 원동력은 바로 1956년 그 무렵의 광기와 젊은 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반골기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수들의 학원운영과 입시와 채점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 . 1966년 대학을 개혁하려 기득권을 쥐고 있는 국전세력의 선배교수들과 다투면서 홍익대에서 쫓겨나 3년 간 강단을 떠나면서 그는 드디어 작품 '묘법'의 모티브를 찾게 되었다.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한 이후는 추상 표현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원형질' 시리즈를 보여주었고 , 1960년대 중반부터는 현대인의 모습과 초상을 담아낸 '허상' 시리즈, 1970년대 이후부터는 탈 이미지와 탈 논리 ,탈 표현 등을 주장하면서 묘법의 세계인 일명 손의 여행으로 그의 박서보 시대 회화의 정점을 이루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순간 쉬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담금질 해갔다. 그리고 오로지 평면과 싸우며 단 한번도 평면을 떠나 외도를 하지 않는 놀라운 일관성과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그리고 사유방식에도 집요했고 철저했다. 그것은 곧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가라는 자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脩身>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 14시간 씩 그 수신을 위한 수단이 그림이 되고 있다. 수십 번씩 화면에 마무리를 위해 색조를 다듬고 만들어내면서 그는 비로소 거기에서 섹스가 갖는 절대적인 오르가즘을 수없이 느낀다고 했다.
묘법시대의 초기에 그는 연필이나 철필로 선과 획을 긋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무위자연의 이념을 드러내었고 ,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 묘법에서는 종이 대신 한지를 이용해 대형화된 화면 속에 선긋기를 반복함으로써 바탕과 그리기가 하나로 통합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로 요약된다. 특히 이 '묘법 시리즈의 회화는 화가의 행위성이 끝나면서 작품도 종결된다는 서구의 방법론을 넘어 그 위에 시간이 개입됨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완성에 이른다는 동양 회화의 세계를 잘 담아냈다는 평가' 를 받는다.

그는 고백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의 시대를 가장 창조적으로 대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시대를 살려고 하면 모든 시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지요. 반복 의 행위는 기氣를 담아낼 수 있을 때만이 의미 있는 예술로 승화됩니다. 기機에 빠지면 이미 그 행위는 죽은 행위이며 자기 모방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지요. 더 이상 예술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기機에 빠지지 않으려면 과거의 경험을 백지화하는 자기 노력이 필요합니다. 늘 처음 시작할 때의 긴장과 불안을 유지해야만 매너리즘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외국의 여러 화랑과 프랑스의 유명미술관에서의 전시 제의를 거절했다. 작가로서의 예우와 조건 협상에서 그가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대가로서의 작가 대접을 하지 않으면 외국 전시를 하지 않는 호기를 부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97년 미국 에이스갤러리에서 초대전 제의는 그를 가장 기분 좋게 한 사건으로 그는 기억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화랑으로 알려진 LA 에이스갤러리(대표 더글러스 크리스마스)에서 동양 작가로는 첫 초대전을 가졌고 그곳이 바로 라우센버그, 피카소 등 거장들의 전시만 개최하기로 유명한데 자기가 작가로 처음 초대되었다는 것부터가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나는 솔직히 박서보 선생님을 뵐 때마다 에이스 갤러리 수십번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내년에 다시 열릴 에이스 갤러리의 전시를 다른 어떤 전시보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닭> <작품>으로 상징되는 50년대의 전투적인 젊은 시절을 거쳐, 그가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유전질> 연작에서 느껴지듯, 폭력 앞에 무력한 인간을 형상화시켰다면. 1970년대 '나는 연필을 그리는 도구로서 쓰는 게 아니라 행위의 도구로서 연필을 선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위해서이다. 예술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탈 이미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무목적 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행위 자체에서 살고자 해야 한다. 이미지나 형상, 어떤 환상을 쫓지 않는다는 그런 탈 이미지의 무목적적성은 순수무위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 해도 좋다.' 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일본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나까하라 유스께는 '묘선(描線)은 틀림없이 손의 움직임에 의해 이룩되고 있다. 그러나 묘선은 유화물감을 눈뜨게 한다. 그리고 물감은 선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박서보의 화면은 이 갈등이 밸런스에 의해 태어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일본의 한 평론가 말처럼 그는 이 세계에서 흰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는 작가라는 평을 들을 만큼 색채의 마술사이다. 절제와 균제 그리고 침잠 하는 격조 있는 색채를 연출해내는 . 이런 평가에 어울리게 그는 전 세계 유명한 화랑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다. 일본 프랑스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 리버풀, 전 세계의 유명한 바젤 시카고 아트페어는 물론 화려한 이력에 걸맞게 많은 수상을 받기도 했다. 1961세계청년화가의 파리대회 제1위상, 1979년에는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대통령상)을 상. 1984년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1994년에는 문화훈장 옥관, 1996 제4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미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70대 중반의 나이에 한결같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루 14시간씩 작업실에서 칼라의 새로운 묘법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다! .
짙은 빨강에서 , 파랑, 연녹색까지 그는 마티스 이후 최고의 색채화가로 꼽히는 샤갈을 발가락에 때로 여길 만큼 자신만만하게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이런 자신 만만은 20대에서 시작하여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3년전 나는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있었던 그의70주년 화집 출판 기념회 답사를 기억한다. 그는 노장의 전사답게 매우 용기 있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는 지난날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 ' 라고 선배들을 향해 큰소리 쳤다고 서두를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 말이 부메랑처럼 그에게 되돌아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로부터 부채를 져서는 안 된다'. 관 뚜껑에 못질할 때 모든 것이 끝난다면서 죽을 때 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아무리 비켜서라 소리쳐도 비켜설 의향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자신 있거든 추월해 가라구 큰소리 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그를 추월 해갈 작가가 쉽사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실대로 말하건대 나는 그가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자랑의 경험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70대의 노장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며 말처럼 하루 10시간 이상 작품을 위해 열정을 불태울 때 그의 이러한 자랑은 차라리 흠은 커녕 귀엽게(?) 여겨지기 조차하다.

1992년부터 그는 일일이 모든 작품제작은 물론 행방을 알 수 있도록 장부를 쓰고 있다. 크기는 물론 일렬번호를 적어 작품과 함께 그림모양 까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장부를 내보이며 그는 1500여점의 일렬번호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해에 100여점 이상의 작품을 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에 관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나는 수년간 그가 보내는 연하장보다 먼저 다른 사람으로부터 연하장을 받아 본적도 없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닐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그가 너무나 일찍 보내오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보내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지금은 10월초 나는 우체국으로 갈 것이다. 박서보 선생님께 신년 연하장을 보내기 위해서다. 단 한번이라도 그 어르신 화가분께 먼저 연하장을 보내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일일이 인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쓸 것이다. 그 분이 도록을 건넬 때에도 모든 도록에 한결 같이 단 한글자라도 흘려 쓰거나 성의 없이 줄이거나 생략한 적도 없고 날려 쓴 필체를 본적이 없다. 아마도 그분은 나의 이 편지를 정성스럽게 보관할 것이다. 몇십년간 그가 받은 모든 국내외 친구들과 나눈 편지와 봉투를 보관한 파일이 20권이 넘는다고 하니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역사가 아닐까 ? 그도 말했다 바로 이것이 현대미술의 생생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 박서보 그런데 아직도 무슨 인연인지 그는 마포구 서교동의 경찰서 앞?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 아니면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


- 국민은행 for you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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