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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자 / 너무나 연약한 그러나 너무나 남성적인 그녀

김종근

원문자 , 그녀를 묘사하기에 이 지면은 어쩌면 턱없이 부족할른지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어머니로서 또는 교수 ,궁핍한 화가로서 그리 녹록치 않은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모든 난관과 역경을 흔들리지 않고 버텨온 화가이다. 1944년 부천 출생, 이화여대 그리고 대학원 졸업. 그리고 그는 현재 이화여대의 교수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아주 젊게 보인다. 그의 나이 61살,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 나이에 지하철의 경노석에 앉지 못한다. 작년과 올해 두 번씩이나 경노석에 앉았다. 젊은 아저씨가 새파란 아줌마가 경노석에 앉았다고 주민등록증을 까보이는 난리 법석을 떨은 가슴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 관한 한 압권은 한 미술대학을 졸업한 젊은 총각이 이상형이라며 집까지 졸졸 따라와 도망간 사건이다. 갈현동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 한 남자가 자꾸 따라와 차 한잔 하자고 졸라 너 몇살이냐고 물으니 32살이라 하여 호통을 쳐서 돌려 보낸일이다.
내가 이화여대 교수이며, 내가 너 같은 아들을 두었다고 혼쭐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나이 49살. 그만큼 그는 나이 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몸매를 유지하는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그런 그녀가 우리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화조화가로서이다.
1964년을 시작으로 그는 아름다움과 정교한 필치로 보수주의 화단에 새로운 꽃 그림 화풍을 가져다 주었다, 인물화와 산수화가 주름잡던 시절에 그의 화조는 신선했다.
바로 이대 미대재학 시절 문공부 주최 신인 예술상에서 수석상을 받고 이어서 그는 1970년 19회 국전 차석상인 국회 의장상을 받았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도 상을 받고 싶었다. 그는 그런 방정맞은 생각과 욕심을 하였다고 그 마음과 욕심을 취소 하고 잘못을 바로 회개했다. 그는 당뇨로 몹시 아팠고 이미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는 그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시험을 , 전지전능함을 체험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1976년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3회에 걸친 개인전을 지나면서 그는 화사한 화조와 여성적인 감성으로 전형적인 채색화의 진수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1980년 후반 그칠 줄 모르게 유지해온 그의 화풍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흔들리지 않는 자기표현의 의지로 전통 양식에 구애됨이 없이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했다. 물론 그의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모두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학생 때에는 스승이 300호의 크기에 닭 그림을 15장이나 그려오라고 했을 때 그것을 모두 그릴정도로 그는 미련하고 고지식한 학창시절을 보낸 그였다. 또한 화조를 사실적이고 실제처럼 그리기 위해 학교에 닭을 가져가 아무데나 똥을 싸고소리를 지르고 오물을 뿌려서 친구들에게 구박을 받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원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해주는 일화이다.
그는 종이나 물감도 우리것이 소박하고 자연스럽다고 우리 것을 고집했다.
1988년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기법과 색채의 현대성을 추구하면서 내용과 형식에서 화조를 기본으로 한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초창기에 화조화의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한지의 물성을 직접적인 표현의 매체를 이용하여 독자적인 조형성의 미적 세계를 만들어 내기 시작 했다.
화조화를 모티브로한 형상과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었던 초기의 작업은 추상적인 조형세계로 확장되면서 그의 작품은 부조형태의 입체작업으로 확실한 변모를 가져왔다.
<그의 화면에 나타나는 이러한 입체적이면서 기하학적이고 구성적인 평면들은 릴리프를 형성하면서 그가 견고하게 이끌고 왔던 채색과 다양한 형상의 이미지로 완결되었다. 그 평면들은 장대한 구성과 다채로운 평면의 변주를 보여주면서 우리 화단에 보기 드문 시각적 형식을 이룩한것이다. 변화도 어렵지만 그러한 실험적인 형식과 대담한 이미지의 구축은 결코 여성적이지 않다. 오히려 남성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원문자 회화의 독창성이 주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한지의 백색과 깨끗함, 순결함 그 위에 놓여지는 기하학적인 화면구성과 여백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먹 작업의 공간이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것은 틀림없다.
그는 그것을 사유공간 이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이전에 보였던 채색된 종이부조 작업에서 보여준 <입체적인 한지의 화면 즉, 계획적인 구도에 따라 스티로폴의 추상적인 형태를 오리고 그것을 앞으로 혹은 뒤로 밭쳐 펄프로 떠낸 후에 그 위로 찬란한 색상의 추상화 또는 종래의 새와 동물 소재를 비사실적으로 도입하여 자연적인 정감의 화면으로 조화시키는 조형작업> 과는 보다 진전된 모습이다.
실제적으로 그는 치밀한 묘사방법을 버리고 종이가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조형성을 대담하게 살려내는 동시에 입체적 효과와 부피감으로 추상성과 형상의 만남을 극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성공은 놀랍게도 그의 노력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특혜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성서의 구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로 교수,화가,엄마 , 노릇등으로 날마다 그는 수고하고 짐을 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결같이 종교적인 자세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림이 풀리지 않으면 그는 기도를 한다고 했다.
마치 철학자이자 시인인 바슐라르가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시의 첫 구절을 영감을 달라고 기도 했던 것처럼 그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옛날에는 그의 생각만으로 하려 했지만, 요즈음은 기도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 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속에 한지가 가지고 잇는 깨끗함과 순수함, 부드러움과 고고함은 바로 그의 기도의 응답의 운동장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순결하고 지순한 사랑의 표현을 원문자는 별로 드러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당뇨로 숱한 고생을 했다. 살아 있다고 할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기도로서 작품을 준비하고 , 고통과 눈물의 십자가 앞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십자가로 자신의 짐을 내어놓고 그 십자가 밑에서 그의 예술을 놓아 두었다. 그는 여행길에서 '과연 이런 대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내가 고민하며 온몸을 바쳐 그려낸 그림들이 이 대자연 앞에 왜 그리 초라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며 신이 창조한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해 신과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고 한없이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볼 줄 모르는 작가, 앞만 볼 줄 아는 작가, 이 얼마나 답답한 작가이겠는가! 일상에 찌들고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해야하는 작가! 이 얼마나 좁게 세상을 보겠는가!
그런 일상의 염려를 하면서 작업하는 그에게는 유독 우리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작품의 격조가 하나 가득 발견된다.
그 격조란 바로 우리조상들이 빚어낸 이조백자의 그 순결하고 청초한 아름다움과 닿아있다.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흰색은 어쩌면 이조백자가 가지고 있는 순결한 백색의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그는 백자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완벽한 형태를 가지지 않으면서 적당히 일그러진 백자의 소박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 백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 대학 강사료를 털어 콜렉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꽤많은 백자를 부셔지고, 분실한 이후에 그는 모든 세속적인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버렸다고 했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치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수화 김환기처럼 집안과 마루 밑에 뒹굴 정도로 그녀는 원래부터 골동을 좋아한다고 했다. 조교 월급을 몇 달치 모아 백자를 살 정도로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단아한 취미를 가지고 잇다. 음악감상과 화초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한 때는 50개정도 까지 길렀다고 하니 그가 생명체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어느정도인지를 미루어 알수 있다.
그런 그도 작품에 관한한 욕심이 많다. 사유공간 시리즈의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200호에서 900호에 이르는 대작이 중심을 이루는 전시를 해내는 그의 투지와 열정이 놀랍다. 그런 여류작가가 흔치않다. 그렇다.
어쩌면 원문자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한지의 속성에 주목하는 작가다. 오직 한지라는 재료 하나에 충실해 40년 가까운 창작의 열정을 붙애운것 . 한지의 따뜻함과 깨끗함, 부드러움이 좋아 여태껏 한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 한지 위에서 살고 있다.
부드러운 욕망에서 보여지는 파격적인 작품 역시 절제된 구성과 색채 , 부드러운 타원형의 야성적인 구성의 치밀성이 돋보인다.
이제 그는 기하학적 도형의 변주와 부드러움의 세계가 만나고 있다.


원문자는 수직과 수평, 부조와 화면을 뛰어넘는 조화의 세계를 균형있게 정리하고 있다.
이전에 화려하던 색채는 가라앉고 먹색과 형태도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단순성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배열의 아름다움과 그 구성으로 화면에 펼쳐지는 긴장감이 팽팽하면서 아름답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더 이상 전통회화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한 실토한 서성록씨의 표현처럼
그는 전통적인 회화를 현대적으로 만들어내는 선구자적인 작가이다.
그러면서 그는 꿈을 꾸고 있다 . 에곤쉴레와 크림트의 작품이 주는 다른 감동을 준아한다고 했다. 요절한 천재로서 방대한 양의 명작들을 남긴 작가 에곤쉴레는 인생의 어두운 면과 인체에 대한 묘사에 놀라운 통찰력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들을 통해 작가는 발언하고 있다.
때묻지 않은 20살 언저리의 나이에서 바라보는 사회와 인간의 일그러지고 고통스런 모습들,
클림트 작품속엔 속되지 않고 은은하면서도 정적이며 동양화적인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하나되는 소박한 정서가와 촉촉한 감동등이 있다.
그는 “예술은 작가가 살고 있던 사화와 시대를 넘어 작가와의 대화를 가능케 해줄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를 기원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킬 수 있는 것을 하나임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혜를 달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했다. 봉사하고 싶다고 , 작품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기하학적인 도형의 변주 속에서도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맛보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스스로 말한다. 작품이란 마치 아기를 낳은 일과 같다고 , 아이를 낳을 때는 너무 괴로워서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얼마 지나지 그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아이를 또 낳게 되는 그런 중독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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