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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피카소 ,스켄들과 하모니즘의 노짱 김흥수

김종근

화가 김흥수, 그를 묘사하는 수식어와 형용사는 헤아릴 수 없다. 마치 피카소만큼이나 화제와 염문을 뿌린 그의 86살의 예술과 인생은 여전히 화려하다. 흰 바지에 백구두를 즐겨 신고 입는다 하여 빽빠지 신사. 8순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정력을 공공연히 자랑한다 하여 타고난 정력가’. 웬만한 그림이 아니면 그림은커녕 화가 취급도 인정도 안 한다 하여 ‘폭군 화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누구 안전이라도 할 소리 못 할 소리 고함을 질러댄다 하여 고함쟁이 영감’. 그는 창시 개명과 학도병 참가를 거부했고, 특정한 구상 그림의 경향을 그린다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유혹도 단호히 뿌리 칠정도로 그는 다혈질이며 보기 드문 고집불통이다. 그런 그의 최고의 좌우명은 정직이다.

흰눈이 시나부르 휘날리는 평창동 김흥수 미술관. 지하 작업실에서 만난 노화백은 몇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그림을 가리키던 모습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예의 그 수염을 크게 늘어뜨린 것이며 , 여전히 목청을 돋우며 쩌렁대는 제스츄어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런 한 쪽 구석 미술관을 지으며 힘들어했던 주변의 반대에 이르러서는 이름 모를 분노와 열변을 토해 냈다. 노화백의 이 고통스런 표정은 아무리 해도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예술가에 대한 예의는 분명 아니었다. 사실 그는 정녕 그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을 가지고 싶었다. 그가 경제적으로 궁핍에 부닥쳐 있을 때도 그는 이를 악물고 팔지 않고 수십 점의 대작들을 보관했다. 지금 미술관에 소장 된 대작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후세를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무도 그러한 일을 해줄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 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욕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평창동 그곳 주변의 사람들은 아름답지도 문화인답지도 못했다. 우리가 니스에서 만난 샤갈 미술관이나 마티스 미술관. 그곳에 한국화가인 이성자가 미술관을 짓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보여준 예술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기억하는데.


지금 김흥수 그는 병중이다. 예전에 그의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목울 대를 높이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내가 아틀리에서 본 천하의 김흥수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1999년 누드 드로잉 전을 할 때와 달리 허리염증 제거수술을 두 차례 받은 2년전 급속히 기력이 떨어져 그는 모든 예술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스스로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그림을 보아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딴 세상 사람의 그림이라고 그는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쓰러진 거의 6년 후 지난 6개월 전부터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힘이 있어 전혀 병상에 누운 그의 작품이 아니었다.
정확한 데생과 충실한 색채, 빈틈없는 구성, 김흥수는 다시 회춘 한 것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가 살아온 80여년의 세월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그의 화려한 이력서는 아무래도 첫 돌잔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첫돌 때 잡은 것이 바로 붓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는 붓을 잡으면 공부 잘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으로 믿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려 부모를 크게 실망 시켰다.
동경미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 할 정도로 뛰어났던 그는 조숙한 열아홉실 때 처음으로 누드화를 그리기 위해 동갑내기 처녀의 옷을 벗겨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의 황홀함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그러한 천부적인 재능 탓인지 평생 그는 누드를 그리는 누드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환쟁이는 일생 동안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같은 생활을 한다”며 펄펄 뛰며 반대를 했고 “화가가 되면 예술가로 인정받아 못해도 중학교 선생은 할 수 있다”고 그는 항변했다.

결국“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뛰쳐나와 강가로 달려간 가슴아픈 추억을 기억했다. 그는 무모하게 죽느니 도쿄에 가서 고학하기로 결심, 도쿄의 관립학교의 입학조건으로 미술공부를 허락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졸업장 없이 조기졸업이란 명분으로 한국으로 귀국했고 , 45년이 지난 몇 년 전 졸업작품으로 내지 못했던 그는 70대의 수염 기른 자화상을 동경예대에 제출함으로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 실제보다 훨씬 젊게 그린 자화상으로 .
그는 6. 25사변 전란 중에는 종군 화가단에 참가하기도 했고 제2회 국전에 연속 특선을 차지하기도 했다. 1954년 서울미대에 출강하며 한국 화가로서는 드물게 남관과 더불어 처음으로 파리 유학 길에 올랐다. 1955년에 배를 타고 1달이나 걸려 파리에 도착 한 것이다.

1956년에서 1961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화단과 살롱·도 똔느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 편지를 써 용기를 줄 정도로, 그는 화가로서 싸롱·도똔느 정회원이 되었다. 61년에 귀국한 그는 국전 심사위원, 초대작가를 역임했고, 그 해 제1회 5월 문화예술상 미술 본상을 수상하는 명예도 누렸다.
그러다 196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 초빙교수로 갔다. 그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그에 예술작업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거기서 그는 하모니즘에 대한 착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6.25사변을 겪으면서 형제와 가족이 남북으로 나눠져 총칼을 앞세워 싸워야 하는 충격적인 현실과 체험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구라파에서 추상회화의 유행과 추상화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미술사조의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에서 그는 추상과 구상 두 그림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동안 꿈꿔 왔던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김흥수 화백의 조형주의 즉 하모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1977 년이었다. 그의 하모니즘의 개념은 음양의 철학이며 동양사상을 모태로 한다.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을 하나의 몸체로 갖는 태극에 있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천지만물이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 구성은 구성과 추상의 만남이었다. 누드와 일정한 간격의 색면연결, 병마개의 규칙적인 배열, 오브제의 시메트리, 단순한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반복 구성은 언제나 아름다운 누드와 함께 그의 화면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누드는 형태적인 아름다움 또는 에로티시즘만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모태로서의 상징적 의미체계인 것이다.
그 외에도 누드 뿐 아니라 여인과 함께 승무나 한국적인 불상, 전통춤, 탈등 한국의 이미지들도 잊지 않았다.
그의 하모니즘은 구상과 추상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표현형식만으로 이미 김흥수만의 독특한 독창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하모니즘은 외로웠고 가치만큼 빛나지 못했다.

그는 전 부인에게 그림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주었다. 여복이 많아 결혼도 두 번이나 했던 그에게 또 하나의 천사가 나타났다. 이혼을 전후한 직후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하던 즈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1983년 신학기 학생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동양적인 얼굴형에 눈빛이 맑은 인상적인 여학생. 그가 훗날 그의 평생의 반려자 바로 수였다.
종강하던 날. 수업 후 낙원아파트의 내 집으로 학생 모두를 초청한 날 그는 수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다시 한번 껴안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면서 그들은 더욱 가까워졌고 .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40여년 차이의 학생과 교수가 만나 장난삼아 말 한데로 대책도 없이 신혼여행을 갔다.

그들에겐 “제자의 장래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이 '유명화가 덕에 출세하려고 그러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로 만나 1992년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화단의 온갖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김흥수는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 그런 특별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글을 읽거나 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도덕만 빼놓고는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
수는 '당신은 위대한 화가다. 당신은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나를 만난 거다. 나와 사는 동안 영원한 예술가다”라고 되뇌었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 운명을 막으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집안에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결혼식이라는 이름 없이 당시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이 주례를, 아나운서 김동건이 사회를 보고 결국 그들은 이렇게 합쳤다.



지금 김흥수 미술관을 맡고 있는 장수현 관장. 그녀가 없었다면 그는 프랑스의 륙상부르그 미술관전시. 데이비드 살르와의 하모니즘의 원조 논의 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그녀는 지금 홍익대 대학원에 예술기획전공 입학을 한다. 김흥수 미술관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그에게 피카소처럼 언제나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예술은 여인의 육체의 향기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 여성을 깊이 탐색해 알고 그것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 나는 일생동안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여인의 피부,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다'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 허무와 끝없는 욕망. 그것이 나의 예술에 들어있는 독특한 세계' 라고 고백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 나름대로 정직했고 성실하게 그의 예술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있다고 하는 예술원. 아직 그는 예술원 회원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그가 당연히 회원 인줄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의 예술이, 그가 이룩해온 예술세계가 훌륭한데도 그가 아직 예술원 회원이 되지 못하는 것은 솔직히 심각한 문제이다. 분명 훌륭한 작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술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분명 그것은 예술원이 아니라 양로원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오는 2월25일 일본의 동경에 있는 미술세계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정열을 신작을 위해 불태우고 있다. 그 열정은 놀랍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 제작한 주옥같은 소품의 작품들을 우리는 어쩌면 한 점도 못보고 일본으로 팔려 가게 될 것 같아 나는 안타깝다. 그 때 그는 모교인 동경대학에 기증하기로 한 작품들을 가지고 간다고 했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김흥수 폭군으로 소문나 있지만 그는 너무나 가슴이 따뜻한 인간적인 화가이기도 하다. 1988년 초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 그것을 말해준다. 프랑스에서 전시를 준비하던 중 청기와 화방에 맡겼던 초창기 하모니즘의 1970년대 주옥같던 18점이 화재로 불에 타버렸다.
그 일을 생각하면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은 악몽에 지금도 시달린다고 할 정도로 그에겐 경악할 일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다니. 그는 허공을 쳐다보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냈다'고 했다. 손에 집문서를 들고 눈물? ?흘리며 “저의 전 재산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그는 가로막으며 “조 사장, 도로 가져가시오. 이 엄동설한에 이것을 나에게 주면 조 사장은 집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어디에서 살 것이오. 보험금을 받더라도 공장부터 먼저 차리고 자립하는 길을 마련하시오.' 김흥수는 불타버린 그림 값 대신에 집문서를 가져온 조사장을 되돌려 보냈다. 그것이 또한 김흥수 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받은 문화훈장 옥관장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30여회의 이상의 개인전, 1993년에는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전,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역사적인 작품전 프랑스의 세계적인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하모니즘을 재평가 했던 김흥수 . 그러나 우리는 그런 화가를 지금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 출처 / 국민은행 FOR YOU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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