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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너무나 찬란하도록 그러나 슬픈 천경자

김종근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다.
매일 만나다 시피 했던 /명동 시절이나 /이 십년 넘게/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 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보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


일찍이 그의 오랜 친구였던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는 <천경자> 라는 시에서 이렇게 묘사 했다. 그렇다. 시처럼 그는 원색처럼 화려하게 그러나 쓸쓸하게 그의 인생과 예술을 짊어진 숙명적인 예술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 좀 고약한 예술가'라는 그의 싯귀는 수정 되어야 한다. '그는 가장 예술가 다운 예술가라고' 말이다. 내게 있어 천경자와 그의 예술을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은 비장한 아픔과 추억을 같이한다. 80년대 중반과 후반 내가 일하던 강남의 전시장과 백화점 시티 커피숍, 중 식당에서 뵈었던 그는 언제나 너무나 당당하고 단호했던 예술가였다.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그의 압구정동 아파트를 방문한 저녁, 그리고 가짜그림이라고 지목한 '미인도'란 포스터를 앞에 두고 분노하며 억울해 하던 그의 눈빛. 그것이 그에게 그런 슬픔과 비극의 씨앗을 안겨다 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직도 진실은 가려져 있는데 .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리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예요.” 당시 68세의 그녀는 세상과 화단을 향해 울부짖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며 그는 꽤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드시면서 괴로워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991년 4월 7일,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붓을 들기 두렵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는 지난 1998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 〈생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꽃무리 속의 여인> 등 자신의 대표작 57점과 드로잉 3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아울러 저작권 및 화구(畵具) 들과 함께 .그리고는 큰딸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그녀는 내가 만난 예술가중 가장 예술가 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는 그림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림을 팔 때마다 꼭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의 심정이라며 그림을 쉽게 넘겨주지 않고 안타까워 했다.
그런 이유로 나에게는 꼭 그림을 한점 주겠다고 한 약속도 그래서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경우는 그림을 팔았다가 그 그림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잤다며 돌려주기를 부탁 할 정도로 그는 그림을 아꼈다.
만약 그가 돈 모으길 원했다면 어느 누구보다 풍부한 부와 여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결코 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작업복이나 홈드레스 없이 후들후들한 샤쓰차림으로 그는 십수년을 그렇게 작업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웃묵에 짜놓은 걸레가 얼어붙는 좁고 추운 셋방에서 조차 결코 화필을 놓은 적이 없다는 딸 김정희의 이야기는 천경자의 천부적 숙명적인 기질을 잘 말해준다.

그와 가끔 교류가 있었던 화상 L씨는 우리나라 원로 화가 중에 자가용 없이 택시 타고 볼 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천선생님 한 분밖에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와 가장 친했던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그리고 화가 권옥연 , 소설가 박경리 ,한말숙 들을 가까이 했다.
그 외에 그는 평생을 고독과 고통 속에서 그림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목숨도 없었을 겁니다. 화가가 되었기에 구원을 받은 거지요.
그가 처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키가 너무 커서 학예회의 <리어왕>에 주연은 커녕 극중 문지기로 뽑혀 대사도 없이 몽둥이만 들고 연습했던 것을 그는 서러워 했다.
그러나 그토록 아꼈던 주옥같은 그림들 막상 기증하고 나니 내 인생을 모두 떼어준 것 같아 가슴이 텅비고 서운했어요. 눈물이 많이 나데요.”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아요.”그렇게 그렸던 그림들이었다.



* * *
천경자(千鏡子) , 아니 그의 본명은 천옥자. 그는 1924년 전남 고흥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주로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 꼬?특별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읽어주는 소설에 슬픈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베고 있다가도 엉엉 소리 내어 울 정도로 감수성이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일곱 살때 그녀는 집이 가난하여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가 되어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던 '금세 울음이 터질것만 같은 순결한 눈망울 ,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이라고 불렀던 '길례언니' 를 만난다.
이후 그녀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처럼 불려지지만 사실 길례언니는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축제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그녀가 붙여본 이름이며 그녀의 회상 속에서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원한 처녀일 뿐이다.

그는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공립여자 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16살 , 1940년 일본의 동경여자 미술대학에 유학했다. 이미 거기에는 나중에 운보 김기창의 부인인 우향 박래현이 먼저 유학 와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 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당시 인상주의 이후 입체파와 야수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일본화단에서 섬세하고 고운 채색화의 여성적인 일본화와 화풍에 더 매료 당했다.
스무살 되던 해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첫 남편을 만났다. 귀국선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도와 주었던 친절한 남자.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그 다음의 결혼도 길지도 순탄하지도 못했다. 이렇듯 순탄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20대의 힘겨운 언제나 손해보는 사랑 , 그리고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과 아끼던 동생의 죽음. 그러한 삶의 시련은 그림으로 나타났다.
20대 후반 1951년에 그린 ‘생태’는 35마리의 독사가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모습의 뱀 그림을 그 자신은 고통스러운 시절에 그림으로 인생과 예술의 한 껍질을 깨뜨렸다고 했다.
그는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고 했다.
이러한 그의 자전적인 고백이 말 해주듯이 이 그림은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으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1년 만에 다시 찾아올 정도로 그에겐 애착이 있었다. ‘생태’? ?뱀 35마리는 그의 나이 35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채로 이때부터 그의 특징이 되버린 꽃과 여인이 등장하기 시작 했다. 여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을 그린 자화상도 있고, 딸을 모델로 한 작품, 혹은 남태평양의 타히티를 비롯한 여행에서 만난 여인들이 주 모델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수에 젖은 모습으로 화면에 나타난다.
1969년 미국·유럽·남태평양의 타이티 여행은 그에게 강렬한 원시의 숨결과 세계 풍물의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박물관의 중세 그림들에서 그는 거대한 규모의 크기의 그림과 소재, 정확한 데생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를 일컬어 <화려한 슬픔 > < 현실과 환각 사이의 간절한 정념 > < 황홀한 몸부림> 등으로 꽃과 색채, 환상의 화가로 우리들에게 각인 되었다.

1974년 18년 재직하던 홍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6개 월동안 세계일주와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케냐 ,우간다,이집트등 오지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때묻지 않은 원시적인 풍물과 그들의 모습을 미개척지의 천국의 모습 낙원에 대한 감동과 여정을 작품으로 남긴다.
그의 작품을 논할 때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77 년 화가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그렸다는 ‘내 기억의 슬픈 22페이지’가 그것이다. 뱀 네 마리를 머리에 얹은 여인의 초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야말로 텅 빈 듯 우수에 찬 눈망울. 삶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듯.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는 내 고독을 스스로 위안해 주려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평온하지 못했던 삶의 자락들이 환기되는 그림이지요.”
이처럼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꿈과 추억과 회한을 가득 머금은 그윽한 눈빛 그것들은 아득하다. 그리고 그 눈망울에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여인들 속엔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딸을 모델로 한 작품, 타이티의 여인들이 모델이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모든 여자가 다 저로서는 영원한 여인으로 생각하고 작품 할 때 그렸습니다. 그저 뭔지 모르지만 그렇게 파고 들어가서 그런데 비교적 다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스스로의 인생역정의 산 기록이라 말한다. 1995년 호암 갤러리에서 가진 자신의 회고 전을 ‘꿈과 정한의 세계’라고 불렀을만큼
그만큼 그는 평생을 꽃과 여인에 열정과 애착을 보였다. 화려한 치장의 여인, 원색의 강렬한 꽃다발. 그의 화폭 그는 스스로 그림 속의 여자가 꽃을 머리에 얹은 것은 한(恨)이 많아서 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그의 그림 속에 여인들은 아름답고 현란한 색채로 뒤덮여 있지만 애틋하고 슬프고 애처롭다. 마치 유흥가의 여자처럼 눈 화장과 분칠에 담백하거나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은 사람들만이 가진 눈물이다. 화려함 뒤에 숨은 고뇌와 번민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한(恨)은 척박한 한 시대에 상처를 안고 를 살아온 천경자의 그림 그자체라고 ”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미자의 <황혼의 블루스>와 <첫눈 내리는 거리> 그리고 김소희의 판소리를 듣고 있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서 흠뻑 울고나면 어떤 아픔도 다 풀리고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투지가 솟아나는데 멀리 뉴욕에서 병상에 있을 그의 슬품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출처 / 국민은행 for you 200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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