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최영진 / 고인돌의 피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박영택


한반도의 서남해안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따뜻한 평야지대에서 농경생활을 한 이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대단한 무덤들이다. 크기와 규모면에서도 그렇지만 그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산의 돌을 절취해서 지상으로 끌어내린 후 다시 그 산을 추억하게끔 위치지어 놓은 매력적인 이 구조물을 무척 흥미롭게 보고 있다. 이전에 우연한 기회에 몇 점을 본 기억은 있지만 지금 최영진의 사진을 통해 수십 기의 고인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화산 폭발의 용암이 식어 바위산을 이루고 몇 십억 년 동안 흙이 쌓여서 변성암이 되고 수 억 년의 세월 동안 바위가 물에 씻겨 수성암이 되어 돌은 탄생한다. 산이 쪼개진 것이 돌이자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영속적인 물질이 또한 돌이다. 그것은 말랑거리는 인간의 살과 유한한 목숨 너머에 굳건히 자리한다. 그래서 동양인들은 그 돌을 장수와 불변의 상징물로 보았다.

아득한 시간을 견뎌온 돌의 피부는 보는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경건함을 안긴다. 단단하여 그 모양이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지조를, 원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서 진중함의 미덕을 보았을 것이고 침묵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돌은 태초에 생겨난 곳에 그대로 있기에 정(精)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천진과 불멸을 지니는 존재로 추앙되었다. 이른바 돌에 대한 지극한 신앙심과 수석취미, 완상 등은 그로부터 발원한다. 처음에는 명산의 정상이나 깊은 계곡 특정 바위의 정령숭배에서 시작해 이후 그 일부를 떼어내 마을로 옮겨 모셔두었다. 그렇게 이동해온 선돌(입석)은 경계를 표시하거나 성역임을 나타내며 설치되었다.

이 같은 설치의 기원은 대체로 농경 문화와 계급 사회가 뿌리를 내리고 고인돌 무덤을 쓰던 청동기 시대 거석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불교 사회인 신라, 고려 시대에는 불국 성역인 사찰의 입구 내지 영역 표시석으로 장생(장승)을 세워두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지역과 거리 표시용도로 돌과 나무, 장승이 정착되었다. 벅수라고도 불리는 장승은 남근석과 같은 성신앙적 조형물인데 그 모습에서 우리는 이전의 고인돌, 또는 선돌이나 돌무더기 등과 그 기능이나 의미에서 친연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의 돌에 대한 애정은 유별난 면이 있다. 특출한 형태의 바위에 치성을 드리는가 하면 바위에 구멍을 내는 성혈, 바위 면에 이름쓰기 같은 무속의 성행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처럼 지천에 깔려있는 돌에서 우리 선조들은 생명과 역사의 의미를 투영하며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최영진은 고창에 위치한 고인돌 공원에 갔다. 서해안일대를 촬영하다가 잠시 쉬기 위해 그곳을 찾아간 그는 순간 고인돌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이곳 전북 고창 매산마을 산기슭에는 수백 기의 크고 작은 고인돌이 널려 있다. 무려 442기의 고인돌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주로 서해안 일대에 분포한다. 북한 지역까지 합치면 우리나라 고인돌은 어림잡아 3만 5천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전세계 고인돌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산기슭의 고인돌 행렬은 산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다가 민가의 담장 한 켠을 차지하기도 하고 집 마당으로 들어와 앉아있기도 하다. 엄청난 돌덩어리지만 위압적으로 압도하는 맛보다는 친근감이 앞선다. 그렇게 많은 고인돌 중에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고인돌은 흔히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권력의 가시화다. 그러나 족장이 이렇게 많았을까? 신분과 권력을 상징할 만한 어떤 흔적도 없이 그저 커다란 돌이 어여쁘고 신기하고 놀라웁게 직립해있거나 놓여있다. 그대로 조각이자 설치다. 고인돌은 당시의 일반적인 무덤양식으로 남녀노소, 신분의 높낮이를 떠나 누구나 묻힐 수 있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고인돌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드디어 모두 죽어서 쉴 곳으로 만든 무덤이자 장소다. 당시 사람들은 돌과 함께 죽음을 시작한 것이다. 긴 휴식과 환생의 생을 기약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후까지도 돌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하직하고자 한 것이다. 끊임없이 나고 죽으면서 사람들은 이 땅에 삶의 흔적을 남기고 죽음의 자리 또한 안긴다. 고인돌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사람들의 흔적이자 그들의 생사관을 보여주는 독특한 장치다. 그토록 크고 무거운 돌에 자신의 죽음을 의탁하고자 한 것이리라. 죽어서 불사하고 불변하는 돌이 되고 싶었을까? 더 이상 시간의 지배를 덜 받는 돌의 몸으로 환생하고 싶었을까? 유한한 지상에서의 찰나적 생애를 대신해 한 장소에서 항구적으로, 영원히 증거 하는 돌의 몸으로 치환하고자 했을까? 자기의 존재를 산 자들에게 그렇게 잊혀지지 않도록 각인시키고 싶었을까? 이미지는 그렇게 죽음과 시간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유한한 생을 대신해 이미지가 몸을 망실한 죽은 이를 기억하게 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고향인 영광 마을 입구에도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타원형의 큰 돌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 친근한 돌을 고창 고인돌 공원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작가는 나무 밑 그늘에 있는 고인돌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고인돌을 자주 보고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그는 고인돌의 피부, 표면에서 눈부신 햇살과 비, 바람과 구름의 흔적을 읽었다. 시간의 너울과 바람의 자취와 사계절의 헤아릴 수 없는 무늬를 독해한다. 바위의 표면은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되어 다가온다. 그는 늙은 사람의 얼굴,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장면, 혹은 동물의 모양이나 구름의 모양 등을 즐거이 상상해보았다. 문득 채석한 흔적 위의 돌이끼는 산수화처럼 보였고 우주의 신비한 기운도 느껴졌다. 그에게 고인돌은 옛사람의 무덤이나 기념물의 개념보다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예술작품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무덤이기 이전에 가장 근원적인 조형물이고 일종의 설치작품이자 강력한 시각적 오브제다. 작가는 자신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가르침을 주는 그 고인돌을 정면에서 촬영했다. 바짝 다가가 돌의 표면에 밀착했다.

3,000년전에 놓여진 이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자그마한 받침돌에 괴어놓은 남방식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돌의 존재를 촬영하고자 했다. 그 돌을 바라보는 자신의 느낌, 감정, 상상하며 마음속에 회임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담고자 했다. 그렇다고 고인돌에 대한 기록적 차원의 다큐멘터리사진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고인돌보다도 돌 자체를 주목시킨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시간의 입김 속에 마모되고 상처를 안고 있는 돌의 피부, 그 살과 껍질을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화면에 고인돌의 전면을 꽉 채워 넣었다. 따라서 보는 이들은 고인돌의 피부만을 독대하게 된다. 유사하지만 동일한 형태를 갖지 않은 고인돌의 표면 역시 아득한 시간이 만들어놓은 무수한 흔적들, 주름과 절단된 면, 돌 꽃과 닳고 풍화된 자취들로 어질하다. 그 돌 사이로 파고드는 담쟁이와 풀, 이끼 등도 역시 자욱하다.

고인돌의 피부는 더없이 매력적이고 강력한 시각이미지가 되어 멈춰서있다. 여러 색채들이 올라가 있다. 무수한 시간의 결이 겹쳐있다. 우리는 그 돌의 피부를 유심히, 오랫동안 응시한다. 3,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돌을 옮기고 잘라내고 특정 장소에 위치시켰던(그 돌들은 어딘가를 향해 있다. 고인돌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무엇을 보고자 했을까? 고인돌은 물이 있는 저쪽으로 난 길을 굽어보고 있다) 그 고된 역사(役事)의 땀내음과 그 역사를 이룬 이들이 절실한 믿음과 치성, 죽음에 대한 간절한 기원,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미적 감각을 떠올려본다. 말없는 돌은 대신 자신의 피부를 통해 지난 시간과 세월을 , 그리고 그 돌을 갖다 놓은 이들에 대해 침묵의 문장을 기술한다. 최영진은 바로 그 문장을 공들여 촬영했다. 사진이란 시각기제가 역설적으로 침묵과 비사시적 영역을 효과적으로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