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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 허상을 쫓는 초상

박영택

조헌 / 허상을 쫓는 초상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조헌의 작품은 2009년 노암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보았다. 경력을 보니 그 전 시가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이전까지는 고향 전주에서 주로 작품발표를 했다고 적혀있다. 우연한 기회에 전시장에 들려서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았는데 대부분 인물화였다. 동물도 자주 등장했는데 사납고 무서워 보이는 개가 단독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거나 남자의 품에 안긴 작은 애완견, 그리고 살을 죄다 파 먹힌 체 머리와 가시만 남은 생선을 그린 그림이었다.

다분히 실존적인 내음도 나고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욕망과 허상, 고독함과 죽음 같은 단어들이 맴도는, 모종의 무거운 메시지가 감도는 그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런 주제보다도 붓질의 맛과 그림을 구성해 내는 감각이 돋보이는, 세련된 그림 그 자체가 흥미로웠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뭉크의 그림과의 유사성이 강해보이는 그 그림들은 주어진 대상을 빌어 작가 자신의 내면이나 감정을 표현하려는 의지로 뜨거워보였다. 이른바 표현주의적 그림이 그런 것일 것이다.

전주 작업실에서 본 근작 역시 그때의 작업과 비교적 유사한 그림이었다. 단호하게 단색으로 밀어젖히듯 칠해진 배경을 뒤로 하고 단독으로 설정된 여자, 개, 생선 대가리는 어딘지 모르게 주어진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축출되어 밀려난 존재감을 안긴다. 작가는 특정 형상을 빌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자의 벗은 몸, 착의, 개, 생선 대가리, 여자누드조각상 모두 상징적 작용을 하는 도상들이다. 여성의 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여성의 인체가 어떤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에 선호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작가노트)이라고 한다. 여성의 몸을 빌어 동시대 현대인의 욕망과 허상을 표현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남성에게 여성의 몸은 절대적인 타자이자 두려움과 매혹의 대상이며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여자에게 남자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인간, 타자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욕망한다. 나아가 현대인들은 성과 함께 돈과 상품 등을 강렬하게 추구하고 꿈꾼다.

현대소비시회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지치지 않는 욕망의 추구를 강제하고 결코 실체에 도달 할 수 없는 허상의 제공을 통해 그 헛된 욕망을 지연시킨다. 이렇게 보면 조헌 그림은 다소 무거운 주제의식을 매달고 있다. 매력적인 구상화지만 편하거나 달콤한 그림은 아닌, 어딘지 불안하고 분명 ‘쌘’ 그림이다.

담배 연기를 내뱉는 관능적인 표정과 몸을 보여주는 여자와 개의 형상은 욕망을 쫓는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욕망을 추구한다. 누드동상 옆을 지키는 개 그림 역시 그 동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지키고 있지만 그 여자의 육체는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고 이미지이고 결국 부재하는 것이다. 그 부재를 진실로 알고 옆에서 긴 혀를 내밀고 헐떡이며 지키는 개의 안쓰러운 모습에서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욕망을 말한다. 다소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존재를 은유하기 위해 끌어들인 이 도상들은 보편적인 현대인이자 자아의 모습이고 또한 그것들이 지닌 감정의 상징물로 위치하고 있다.

자신 역시 그 같은 허상을 뒤쫓으며 줄달음질쳐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 회의를 거느린다. 또한 네 명의 여자가 각기 다양한 차림으로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는 군상화는 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들의 초상이다. 제목을 보니 ‘과거의 꿈-금융전문인, 대학교수, 전략투자자, 스튜어디스’다. 한 때의 벅찬 소망과 희망들을 배반하고야만 현실의 잔인함, 시간의 위력 그리고 허망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다. 작가는 이렇게 근작을 통해 ‘불편’하고 ‘과거의’ 것이 돼버린 꿈을, 그 ‘날아가 버리’고 ‘깨어진 꿈’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떠나 버린 것들의 가벼움’을 말하며 헛된 욕망과 허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전시주제는 다. 좀 슬픈 그림이다.

나로서는 사실 그러한 주제보다도 그림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 회화적 맛들이 좋다. 무척 감각적으로 잘 그려진 그림이다. 붓질을 거침없이 문지르고 다니며 드로잉과 착색을 동시에 이루어나가는 표현력, 적당한 변형으로, 데포름으로 이룬 얼굴과 몸, 탄력적인 붓의 흔적(브러쉬워크)을 명료하게 면으로 쪼개 붙이는 맛, 안정적인 형태감 등이 그렇다. 특히 추상적 요소(단색의 배경)와 표현적 구상이 공존하는데서 오는 긴장감이 눈길을 끈다. 배경을 메꾼 차분하게 착색된 이 와인색은 고급스럽고 세련된 욕망의 순도를 밀도 있게 발화한다. 그것은 화면의 평면성을 더욱 매끄럽고 균질하게 ‘아말감’하면서 회화의 기품을 아우른다. 마치 후광이나 광배처럼 화면 안에 위치한 대상을 에워싸고 그것과 함께 맞물려 있다. 현실적 인간이나 동물과 비현실적인 납작한 추상적 색 면이 충돌하면서, 그 두 개의 다른 세계가 결합해서 이룬 공간이 조헌의 회화공간이다. 단색의 이 ‘미니멀’ 한 화면에 짧게 끊어치듯 조밀하게 또는 거칠게 안착된 붓질의 흔적이 작가의 몸짓이고 그만의 감각과 감정의 신호다.

아울러 인물과 개의 표정에서 전달되는 감정의 강도, 세부적인 것을 와해하고 문질러 해체시켜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다소 기묘한 에너지 등도 좋다. 나는 이 에너지가 좀 힘 있게, 무시무시하게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조헌은 붓질을 끌고 가는 힘과 그것이 화면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파생하는 자취, 상처들, 그리고 물감 그 자체의 물성, 그러니까 질료적 차원이 공존하면서 이루는 맛을 흥미롭게 연출한다. 그것이 다름아닌 회화의 맛이다. 물감과 붓질이 주어진 평면이란 한계 안에서, 표면에서 호명해내 이루는 세계가 그림이다. 그것은 단지 대상의 껍질묘사나 윤곽의 단순한 재현으로 머물지 않는다. 좋은 그림은 그 회화적 표면이 보는 이에게 정신적 활력을 자극해 다른 차원으로, 감각으로 전이되는 체험을 준다. 조헌은 그런 회화를 추구하려는 것 같다. 현재의 작업은 그런 여정을 가는 자신의 현재성을 잠시 세워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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