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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 / 공간의 사유, 사유의 재현

박영택

정보영 / 공간의 사유, 사유의 재현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정보영은 실재하는 공간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마치 그곳에서 오랜 시간 명상을 하고 오는 듯하다. 작가는 공간과 대화를 나눈다. 이 침묵의 대화는 침묵의 장소인 건축물 안으로 스며드는 빛과 서늘한 기운과 공간에 놓여진 말없는 몇 개의 가구와 스탠드, 촛불 등과 함께 이루어진다. 작가는 그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온다. 그것들 스스로가 발화하는 흔적을 유심히 살피고 그 말들이 가슴에 파문처럼 흔들리는 것을 조심스레 담아 온다. 이후 사진으로 찍은 그 공간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은 실재하는 특정 공간의 재현이자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는 공간의 양태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일이고 동시에 차마 보이지 않는, 그래서 재현이 불가능한 그러나 어느 정도 가능한, 공간 안에 가득한 기운과 흐름, 떨림 등을 그리는 일이다.

아마도 그토록 미세하고 예민한 기미를 포착하는 일이 작가의 관심사인 것 같다. 그것은 결국 공간의 표면, 피부를 편애하고 애무하는 일, 깨무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회화란 세계의 피부에 매달리는 간절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닌 얇은 피부의 표면을 회처럼 떠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특정 공간의 피부를 그렸는데 그 피부는 죽은, 사물화 된 벽만은 아니다. 분명 건축물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그 말없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빛이고 공기의 흐름이고 온도와 바람이다. 그 양과 농도의 정도에 따라 공간은 다채로운 표정으로 환생한다. 그것들이 공간으로 스며들고 안개처럼 퍼져나가면서 모든 표면을 애무하는 것이다.

날카롭거나 부드러운 각을 그리며 빛이 떨어지고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하면 벽에 알 수없는 무늬를 짓고 독해가 불가능한 표상문자 같은 자취를 안긴다. 아울러 그것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에 잠기게 한다. 이제 그 피부는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고 말없는 침묵의 건축물 스스로가 발화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그 피부를 보고 있노라면 완강하고 차가운 물리적 실체로서의 건축물은 촛농처럼 자꾸 녹아 흐른다. 여기에 촛불이 그려지고 그 촛불이 흔들리는 장면은 이를 더욱 실감나게 증폭시킨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시간의 흔적 아닌가? 정보영은 특정 공간의 내부에 들어온 시간을 그린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시간은 단지 빛과 그림자만은 아니다. 시간은 온 우주의 떨어댐이고 유동적인 멀미와 현란한 무늬로 얼굴을 만들며 모든 사물의 피부에 잠입한다. 그 얇은 접점에서 서식한다. 정보영은 조용히 그 얼굴, 몸을 관찰한다. 응시한다. 마치 철학자가 개념을 사유하듯 공간의 피부(시간의 얼룩)를 사유하면서 이를 그림으로 재현한다. 그렇다면 정보영이 재현한 것은 자신이 특정 공간의 피부를 보고, 공간 내부에서 응시하고 그 응시와 상상력이 뒤섞인 것을, 그 모든 사유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차갑고 현학적인 개념으로만 굳은 그림으로 전락하지 않고 사실적이며 충실한 재현으로도 깊은 사유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회화를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그것은 피부, 표면에 의존해서지만 이 표면은 깊이 있는 표면이랄까, 단순한 재현과 눈속임의 껍질에 머물지 않으려는 깊음을 갈망하는 표면이려는 것이다.

다시 그림을 본다. 어둑한 실내공간과 창, 창밖으로 얼핏 드러나는 자연풍경, 환한 대낮이거나 일몰의 시간대를 암시하는 하늘, 의자 하나, 테이블이나 콘솔, 타들어가는 두 개의 촛불, 불이 켜진 스탠드, 시멘트로 이루어진 벽면과 바닥 등이 보인다. 사람은 없다. 그러나 빈 의자, 켜진 스탠드와 촛불은 이곳에 사람이 있음을 암시한다. 공간을 밝히는 이 빛은 어디선가 파고드는 자연광과 함께 뒤섞인다. 어두운 공간 안으로 들러온 빛이 남긴 날카로운 사선, 드리워진 그림자, 극명한 명암의 대비가 벽과 바닥에 자발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미 그것은 공간과 자연이 함께 해서 만든 창조적인 이미지다. 건축 공간은 빛을 담고 있는 그릇이고 빛은 물질의 질감과 형태에 따라 무수한 굴절을 거듭하며 흘러 다닌다. 얼룩을 만든다. 다채로운 표정을 안긴다.

그러한 ‘레디메이드이미지’를 작가는 따라 그린다.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화면)에 빛과 공기와 온도가 스며들어 그려놓은 그림이 작가의 손에 의해 재현되었다. 그러자 그저 어둡고 차가운 시멘트 공간이 다분히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소소하고 비근한 일상의 풍경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를 만난다. 덧없이 사라지는 빛, 소멸되는 흐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흔적들을 응고시킨 이 그림은 애도의 성격을 지녔다. 모든 이미지는 결국 죽음에 저항하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절망 속에서 자멸한다. 정보영은 어느 특정한 실내공간에서 빛/시간의 흐름을 응시하고 그 덧없음과 찰나적인 순간의 점들을 사유하고 이를 공들여 재현했다. 장중하고 엄숙한 고전주의회화를 연상시키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그림에서 오히려 무척이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예민한 떨림을 본다. 순간의 사라짐을 기억해내려는 상상력으로 이룬 그림은 그 공간 안에 자리한 모든 것들이 유동적으로 흔들리고 덧없이 부유한다. 이는 세상을 고정시키지 못하는 자의 눈에 비친 풍경이다. 마치 겸재 정선이 <통천문암>이란 그림에서 보여주듯이 화면 끝까지 차오르는 동해 바다의 수면을 바라보면서 통천문암으로 사라지듯 빠져나가는 이의 시선이 보고 깨달은 것처럼 세상은 주어진 화면 안으로 수렴될 수도 없고 고정시킬 수도 없다는 인식 말이다. 세상은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다. 그것이 동양인이 깨달은 공간인식이었다.

겸재가 본 자연이었다. 이 활력적인, 생명체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 흔들림을 다만 받아줄 뿐이다. 정보영 역시 특정 공간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고 있다. 공간은 가변적이고 마구 흔들리고 해체된다. 작가는 살아있는 공간과 대화한다. 그 공간에 들어와 공간의 피부를 편애하고 깨무는 빛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살아서 파동 치는 것들과의 명상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순간 피부에 머물다가 사라지려는 것들의 안스러운 자취를 뒤쫓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부재와 죽음, 소멸과 덧없음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자신의 내부를 본다. 이 건축공간은 결국 작가의 내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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