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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석 / 어둠 속의 불빛

박영택

정동석 / 어둠 속의 불빛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도시의 밤은 불빛으로 반짝인다. 해서 짙고 어두운 밤이 깊어갈 수록 그 불빛들이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불빛이 더욱 강렬해지는가 하면 더러 명멸하기도 한다. 그 불빛은 다채롭고 화려하며 알 수 없는 공간감을 환영처럼 만들어낸다. 어둠으로 절여진 단호한 평면의 풍경에서 불빛은 묘한 추상적 풍경을 이미지로 선사한다. 세상의 질감과 색채가 부재하듯, 사라지듯 어둠에 의해 뒤덮였지만 반짝이는 조명은 그 모든 것들을 대신해서 ‘발광’한다. 그 불빛은 어둠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욕망과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소모하려는 의지, 그리고 밤을 밝혀서 일에 매진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그치지 않는 근면성이 세운 증좌 같기도 하다.

아마 근대 이전의 밤풍경은 오늘날의 야경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밤의 어두움을 밀어내는 인간의 힘은 미약했을 것이다. 차라리 밤의 어둠이 자연의 순리였기에 그 깊고 짙음을, 비가시의 세계, 불가시의 영역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낮과 밤의 교차와 순환을 거역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 자리에 상상력과 영감과 신비주의가 싹터나갔다. 반면 근대는 어두움을 밝음으로 끌어들인다. 밤을 낮의 연장으로 환하게 밝혀놓았다. 전기의 발명은 이제 어두운 밤이 가시적 세계로 소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밤을 이기기 위한 불빛, 조명은 존재했지만 근대의 전기는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결정적인 밝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밤을 달빛이나 별빛에 의지하기보다는 전기조명. 그리고 근자에는 LED 등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신비와 상상과 신화는 자취를 감춰나갔다. 이제 밤풍경은 결국 조명, 특정한 인공의 불빛을 본다는 얘기다. 그 불빛들이 점등되는 순간부터 소등되기까지의 시간이 밤의 시간대 일텐데 그 시공간은 낮과는 무척 다른 생의 흔적들을 부려놓기도 한다. 하여간 도시의 밤이란 불빛이 어둠을 밀어낸 여백, 환하게 밝혀서 떼어낸 자리이다. 종국에는 모든 보이는 대상들이 검은 밤으로 묻혀도 그 불빛들은 점으로 반짝이며 어둠 위에 문자, 기호로 무엇인가를 기술한다. 그 낯선 불빛의 문자를 읽으려는 시도가 정동석의 사진이다. 그는 불빛만을 사진으로 담았다. 너무 짙고 깊은 바탕에 격렬하게, 잔잔하게 파문을 짓고 진동하며 흔들리는 불빛의 춤들이 추상회화처럼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는 지난 10여 년간 도시의 야경을 찍어왔다. 그가 찍은 도시의 야경은 여느 작가의 야경, 도시의 밤풍경과는 무척 달랐다. 알다시피 기계적 재현수단이라고 알 고 있는 사진 역시 그 카메라를 다루고, 뷰파인더를 통해 세계와 대상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찍힌다. 마음이 결국 사진을 만든다.
세상은 본래 공(空)한 것이다. 형태가 없는 것이다. 아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외형에 얽매여서도 안되고 그로부터 떠나서도 안된다. 물(物)을 마주대할 때 물을 이기는 방법은 그 물을 마음 안으로 삼키는 일이다. 받아들이는 일이다. 정동석은 도시의 야경을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다시 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묵으로 절여진 건물의 외관과 나무를 감싸고 있는 조명이었다. 그는 오로지 그 선, 불빛의 띠를 적조하게 촬영했다. 단호한 어둠의 화면에 원형의 직사각형의, 혹은 알약과 같은 형태의 조명이 일정한 마디를 띄며 출현하고 있는 사진이다. 그러자 매혹적인 장면이 축복처럼 나타났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다.

아마도 근작은 이제 그 도시야경시리즈가 끝나가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도 같다. 이전의 야경시리즈와 다른 점은 화면 안에 들어온 조명, 불빛이 무척 동적이며 진동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사진의 재현은 무화되고 순간 회화 같은 사진 아니 역설적인 사진, 본래의 대상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사진이다. 이전 작이 불빛을 반듯하게 선을 긋듯, 곡선을 긋듯 마치 드로잉을 대하듯이 보여줬다면 그래서 기하학적이고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추상회화에 유사했다면 근작은 카메라/ 신체가 흔들리고 마음이 따라 요동치면서 불빛을 따라간, 따라서 행위성이 강하고 퍼포먼스에 습사한 것이 되었다.

결과물은 몇 겹의 선들이 띠를 이루고 인공의 색상들이 짙은 어둠 위에서 규칙적이고 불규칙적인 선들을 반복해서 내며 더러 드릴로 긁어나가듯, 예민하게 진동하는 흔들림을 고스란히 받아 적어나가는 그런 흔적을 보여준다. 사진은 불빛들이 춤을 추고 여러 겹으로 떨어대고 있는 모습을 색다르게 보여준다. 늘상 보고 접하는 도시의 야경이지만, 불빛이지만 정동석의 사진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접촉시킨다. 작가는 도시의 불빛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를 흔들고 돌리면서 촬영했다. 마치 카메라로 드로잉을 하듯, 신체의 궤적이 그림이 되듯 그렇게 독특한 사진을 만들었다. 그것은 카메라를 들고 행하는 일종의 의식이나 춤을 연상시킨다.

물론 카메라라는 도구는 당연히 연장된 신체가 되지만 작가는 그 카메라를 가지고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듯 이동시켰다. 그러니까 불빛을 보고 그 불빛을 따라 카메라를 움직여간 것이다. 카메라라는 도구가 그림을 그리고 선을 그리고 묘한 추상회화를 만들어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신체의 이동과 호흡 등을 흡사 심전도처럼 기록해서 보여준다. 분명 불빛을 촬영했지만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에 그것과는 별도의 흔적이 자리했다.

밤을 찍은 대부분의 사진들은 상상과 환상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거나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관심이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의 풍경사진들이 한결같이 의미부여와 관념을 드리우면서 감상을 상투적으로 증폭시켜내는데 반해 정동석의 풍경은 늘상 그런 기대치를 저버리고 일종의 ‘반풍경’적 자세를 고수해왔다.

정동석은 밤을 의도적으로 택해 모든 것을 은폐시켰다. 따라서 찍힌 것은 특정 대상(조명)이고 개별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차별과 구분, 분리와 배제 이전에 동일한 존재들로 평등하게 엉켜있다. 이것은 밤이 주는 힘이다. 낮이 잘나고 힘 있고 권력적인 존재들의 과시적 장이라면, 시각에 의해 편재되고 구분되고 다툼과 위계가 선연하게 자리하는 곳이라면 밤은 그런 차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인위적 편재인지를 말없이 덮어버린다. 그것이 밤의 힘이다. 모든 것을 비가시적으로 만들거나 차이와 구분을 뭉개버리는 힘 말이다. 몇 개의 문구나 이미지, 사람의 흔적, 그리고 밤의 풍경과 그 주변을 연상할 어떠한 정보도 없다. 모든 것은 부재하다. 있다면 조그마한 단서처럼 조심스레 놓인 선, 불빛 같은 네온의 선들만이 달랑 위치해있다.

간혹 조명이 끊어져 불빛이 감추어진 것도 있고 생략되어 있는 것도 있다. 가늘고 얇은 단속적인 선들이 짙은 암흑을, 검정의 밤을 가로지르거나 흥미로운 선의 자취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흡사 그림을 닮았다. 얼핏보면 추상적인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니 선비들이 치던 사군자나 서예의 흔적, 서체적 놀림의 자취가 더 강하게 떠돈다. 단서처럼 주어진 선은 상상력을 동원해 밤의 그 무진장한 만화경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말이 무성하고 과잉의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낮의 세상에서 그가 택한 말하기는, 보여주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침묵과 어눌함 속에서 함축과 본질만을 간파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아주 미미하고 정보량도 적고 최소한의 것만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이런 보여주기는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주어진 단서를 곰곰이 읽어보도록 권유하는 편이다. 그것을 미니멀적인 사진, 혹은 선(禪)적인 사진이라고 말할까?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관념성으로 포장되거나 무거워질 것이다.

그는 가능한 선입견이나 선험적인 지식, 사유 그리고 과도한 관념성의 자취를 지우려는 작업을 그동안 해왔다. 이른바 심재(心齋)의 경지에서 사물과 대상을 보고자 했다. 심재란 텅 빈 마음으로 사물을 응대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비워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경지가 그것이다. 이는 또한 거지(去知)와도 상통한다. 거지란 대상(物)과 접할 때 마음이 대상에 대하여 지식 활동을 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지식활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되는 시비판단이 마음에 번거로움을 주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이는 대상의 상태를 주체의 요구에 의해 좋다 나쁘다, 쓸모있다 없다로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판정을 유보하고 아무 가치도 부여하지 않은 비움의 상태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물(物)에 승리하는 방법은 나를 비워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옛사람들의 지혜였다. 나는 정동석의 이전 풍경사진과 물 사진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가능했다고 믿고 있다. 그 작업들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근자에 찍은 야경사진 역시 그런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칫 관념성으로 기울 위험이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덧 그는 도시의 야경 작업을 10년간 했고 이제 그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분단풍경에서 시작해 자연(산과 물), 그리고 도시로 이동한 그의 그간의 궤적이 앞으로 또 어떤 이 땅의 흔적들을 찾아나설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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