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지콜론

박영택

1. 귀이개

저녁이 되면 의식처럼 가려운 귀를 판다. 조심스레 귀의 안과 내벽을 자극하고 약간의 귀지를 치우는 일이다. 늦은 저녁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이다. 세상의 벼라별 일들이 현기증 나게 전개되는 화면 앞에서 무심하고 고요하게 귀를 파다 보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저녁이 되면 귀가 가려울까? 하루 동안의 소음과 하루치의 말의 무게가 수북히 쌓여서일까? 아니면 무수한 타자들의 음성들이 남긴 상흔들이 딱지진 귀지로 들러붙어서일까? 옛 성인들은 세속의 탁한 소리를 들으면 물로 귀를 씻었다. 흐르는 물에 귀를 씻어서 마음을 정화하고자 한 것이다.

내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 이 작은 귀이개는 둥근 원형에 볼록한 배를 지닌 몸체와 거의 수직으로 세워진 끝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상단부의 둥근 원형은 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은으로 마감되었다. 운형의 가운데는 감꼭지 같은 5엽의 꽃잎이 펼쳐져있고 몸체와 붙은 부분은 박쥐가 그 원형을 밀어 올리는 형국이다. ‘배흘림기둥’ 같은 몸체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박쥐가 새겨져있다. 정교하고 귀엽다. 알다시피 박쥐는 복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조들이 일상적 삶에서 썼던 무수한 기물의 표면에는 그 박쥐문양이 촘촘히 놓여져있다. 복 받겠다는 열망이자 눈물겨운 희구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왜 리 작은 귀이개를 주었을까? 오래된 유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전통적인 도상과 미감이 소박하게 흐르는 수작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귀이개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면봉이나 여타의 귀이개와는 비교되기 어렵다. 난 귀이개 하나도 이 정도 감각과 품위가 있기를 바란다. 그게 우리네 전통적인 미의식이다. 그런 것들로 내 삶을 채우고 싶고 내 생의 공간을 장식하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이 귀이개를 선물로 준 이는 내게 좋은 도구 하나를 주었지만 동시에 복을 선사했고 탁월한 조형물을 기꺼이 기증했다. 그래서 다소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귀이개를 들어 조심스레 귀 안으로 밀어 넣으면 누군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내 현재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내 의식과 마음의 한 구석을 조심스레 쳐다보는 것도 같다. 하루치의 피곤과 소음과 헛된 말들의 자리를 지우고 다시 무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의식을 오늘도 그렇게 치루고 있는 것이다.

2. <예술가로 산다는 것>

내 첫 책은 <예술가로 산다는 것>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김명숙의 커다랗고 비장한 얼굴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다소 비장하고 무섭기도 하고 슬퍼 보이는 얼굴이다. 책의 내용 역시 그러하다. 2001년의 일이다. 우연한 기회에 써낸 이 책은 큐레이터로 일한 약10년 동안 만났던 무수한 작가 중에서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놀랍고 경외스럽던 이들을 10명 선정해서 그들의 작업실을 탐방한 글이다. 조금은 급하게 써낸 책인데 세상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그로부터 일정한 시간이 지난 지금 여러 책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내게 책은 그 첫 책에 매어있다. 점차 그때의 절실한 마음과 감동이 건조해지고 타성이 되는가 하면 마지못해 써내는 글들에 치여서 사는 지금의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그런 좋은 작가들을 찾고 있나? 그런 작가들을 보고 느끼고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절실하게 쓰고 싶은 마음과 욕망에 의해 글을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다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을 펼친다. 그 행간들을 읽으며 당시의 다소 격한 감정의흩어짐과 과잉된 수사를 들여다본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분명한 몰입이 있고 그렇게 쓰고 싶다는 바람이 깃들어있다. 나는 그런 마음을 다시 호명해본다. 정말 목까지 차오르는 어떤 욕구에 의해 쓰여지는 진정한 글씨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부디..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