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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균 / 기억이 봉인된 공간

박영택

이원균 - 기억이 봉인된 공간


이미 지나버린 것들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겨진다. 몸 속 어딘가에 부동으로 굳어있다가 느닷없이 솟아오른다. 기억은 견고하거나 명료하지 만은 않다. 그것은 무척 자의적이고 모호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그에 비례해 자꾸 희박해진다. 점차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잊혀진다고, 없어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기억은 무엇인가의 자극에 의해 불현듯 찾아온다. 내 의식 앞에, 눈 앞에 기이하게 자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불충분한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 기억이 없다면 삶도 없다. 기억이 있어야 그 기억에 기생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 그의 전생의 모든 기억을 가능한 빼곡히 그려 넣어주었다. 죽은 이가 환생해 벽에 그려놓은 이미지를 통해 이전 생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불사하고 불멸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지는 사리진 순간, 그래서 의식 속에 비물질로 남을 수밖에 없는 기억을 외화해서 굳혀 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이제 추억이나 기억을 대신해 자존하다.

문자나 이미지는 결국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덧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인간의 그 일회성 삶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위무해주고 시간을, 그 시간을 경험하고 겪어냈던 흔적들을, 기억들을 반복해서 되돌려준다. 문화란 결국 모든 것을 매번 기억 속에 되살려놓으려는 욕망으로 인해 가능했다. 문자화 한다는 것이 결국 문화다. 시간의 기억에 대한 저장의 결정적 수단은 당연히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은 한 순간을 영원히 봉인한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영구히 보존하고 있다. 이제 사진은 현실의 시간을 대신해서 그 시간 대신에 영원히 산다.

사람들이 사진을 즐겨 찍는 궁극적 이유는 이내 사라지는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다는 욕망이자 이 순간의 기억을 지속해서 보유하고 그것을 결코 망실하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다. 그런데 오늘날 기억의 대체수단과 저장수단은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컴퓨터가 보편화되고 여러 매체의 등장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USB를 비롯한 매우 간편하고 엄청난 용량을 지닌 기억의 도구들을 통해 손쉽게 저장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점점 더 순간의 기억, 저장에 대한 강박들이 커 간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억이자 온전한 시간의 체득인지는 모호하다. 오히려 ‘스마트’한 각종 매체와 시간과 기억의 저장 수단들은 인간의 뇌를 한없이 게으르고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원균은 우연히 오래된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를 보았다. 저장의 매체, 수단을 생각해보았다. 이 낡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는 컴퓨터의 보조 저장장치로 컴퓨터의 OS를 담거나 작가의 사진작업을 기록하거나 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었다. 이 하드디스크의 안은 컴퓨터에 연결되어 접속되기 전까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없다고 부정할 수 는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록과 기억은 모두 이 디스크 안에 저장되어 보존되고 잇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종이나 책, 필름을 대신해서 영원성을 보장받는다.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기록들 역시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손상되기 쉽고 지워지기 쉽다. 컴퓨터를 다루는 이들이라면 애써 저장한 중요한 기록들이 순간의 실수로 인해 ‘날라가 버린’ 경우를 자주 접했을 것이다. 이원균은 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오브제)를 영구히 보존하고 결코 지워지거나 손상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것이 외부의 충격이나 물리적 훼손 없이 영원히 보존되게 하려고 아예 에폭시 수지로 채워 버렸다. 굳히고 봉인해버린 것이다. 그가 에폭시로 채워 봉인한 것은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만은 아니다.

그의 다양한 기록들이 들어간 여러 기록저장장치들이 죄다 망라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즐겨 듣는 음악을 녹음한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회사 전산실에서 나온 데이터 테이프, 실황을 녹음한 오디오 테이프, 영화가 녹화된 VHS비디오 테이프, 16mm 단편영화, 운동회를 촬영한 8mmm영화 필름 등이다. 이 다양한 동시대의 기록저장매체들은 그의 삶에서 일상적인 저장수단이자 노트와 앨범을 대신해서 매순간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앞서 언급한 대로 일정한 틀 안에 위치시킨 후에 에폭시 수지를 경화제와 적절한 양으로 석어서 부은 후에 틀에서 에폭시 수지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거친 표면은 다듬고 샌딩과 광택작업을 해서 최대한 매끄럽게 가공했다. 그렇게 완성된 오브제, 피사체에 인공 조명을 가해 정면에서 촬영했다. 흑백과 컬러 사진을 통해 드러난 둥근 디스크의 형체와 그 주변을 채우고 있는 에폭시 질감은 다소 초현실적인 풍경을 안긴다.

마치 호박 속에 갇힌 생명체가 연상된다. 기억의 저장 매체를 다시 저장하고 그 저장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강력한 봉인으로 인해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영원히 저장되었을지 모르지만 다시는 기억을 들여다볼 수 없는 역설이 발생한다. 영원한 기억은 현실적으로 가능해졌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제 어떤 기억과도 무관해졌다. 저장매체의 기능이 훼손된 것이다.

저장 공간이 에폭시로 굳혀져 생긴 새로운 공간 안에서 이제 기억은 영원한 침묵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원균은 그러한 기이한 공간을 만들고(조각적으로)이를 사진(납작하고 평면적으로)으로 다시 보여준다. 이 사진은 순간을 저장하고 기억을 보존하려는 욕망이 초래한 묘한 역설을 드러낸다. 차갑고 견고하며 영원한 침묵으로 더없이 고요한 에폭시의 두께, 깊이 안에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기억의 완전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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