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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숙 / 늙은 여자의 뒷모습

박영택

장숙 / 늙은 여자의 뒷모습


장숙은 여자의 몸을 본다. 그 시선은 다소 집요하고 깊고 어둡다. 오래 전에 작가는 여자의 몸에 난 구멍을 중후한 흑백사진으로 기록했다. 사실 구멍은 텅 빈 것이다.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심연 같은 절망과 어둠이 잔혹하게 스며들어 있는 장소다. 여자의 구멍, 성기는 결국 모든 남성에게 공포스러운 구멍이자 죽음의 심연이다. 그 구멍은 죽음과 삶이 동시에 선회하고 생과 사가 반복해서 일어난다. 남성들은 여자의 성기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심을 지니고 있다. 오르페우스의 신화가 그런 것이다. 시선 역시 텅 빈 구멍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흡입해내는 그런 구멍이다. 몸에 난 구멍들은 그 몸의 주인이 죽기 직전까지 몸 밖의 것을 욕망하다 지쳐 버린 상처들이다. 그래서인지 그 구멍을 빤히 쳐다보는 일은 다소 고통스럽고 슬프다.

구멍없이 생은 없지만, 가능하지 않지만 그 구멍으로 인한 포오류의 수치는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생의 모멸감은 결국 그 구멍의 결핍으로 인해 촉발된다. 모든 구멍은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겨냥되어 있다. 라캉이 말한 ‘오브제 쁘티 아’(objet petit a)에 놓여져있는 것이다. 작가는 눈과 성기, 배꼽과 항문을 오랫동안, 정지시켜 화석처럼 보여준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마냥 노골적이고 차마 오랫동안 볼 수 없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구멍이야말로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의 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의 결과였다. 정복수가 그린 즉물적인 몸뚱아리를 연상시킨다. 인간 존재를 뒤덮고 있는 허황한 수사를 죄다 지운다면 남는 것은 그렇게 물컹한 살덩어리와 늘어진 피부의 변종들인 기관과 처연하게 뚫린 구멍들뿐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본 장숙의 근작은 여전히 여자의 몸이었다. 그런데 이 몸은 늙은 노파의 몸이고 뒷모습이고 가린 얼굴이자 옆모습이다. 얼굴을 지우고 오로지 등과 피부만을 독대하게 하는가 하면 보는 이로 하여금 앞모습과 앞면을 상상하게 한다. 사실 우리가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사유의 결과이다.

늙은 여자의 몸은 오랜 시간과 세월의 무게에 의해 함몰되어 있고 그녀가 평생 했던 노동의 양에 의해 굴절되어 있다. 아울러 누군가의 손과 몸에 의해 부분적으로 마모되고 눌려졌던 흔적을 은연중 부감한다. 그런가하면 이러저런 상처들과 오랜 시간 노출되어 연소된 피부들이 눌려져있다. 어둠 속에 휜 등과 내려앉은 어깨, 숱이 적은 머리카락, 마른 등살에 난 반점, 얼룩 같은 것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있다. 그 몸, 등은 곧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기 직전이다. 겨우 멈춰선 등은 산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직한 등을 보여준다.

등은 아래를 향해 기우는 신체의 일부이다. 우리가 여자의 무게를 생각하는 것은 등을 볼 때다. 이 여자는 오로지 자신의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뒤는 앞과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다. 인간의 모든 것은 정면에 나타나있다. 그러나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해서 뒤쪽이야말로 진실이라는 미셀 투르니에의 문장이 잠시 떠돈다.“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정면에 나타나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거짓을 모르는 등은 내 몸에서 가장 먼곳이어서 항상 타자의 손길, 눈길에 의해서만 더듬어지고 더렵혀졌을 것이다. 등은 자신의 것이지만 그 등을 보고 소유하는 이들은 타인이다. 얼굴이 지워지고 등만 보여주는 존재는 수수께끼 같고 비밀 같다. 우리는 그 등만으로 그녀가 살아온 생과 사연을 독해한다. 등은 상형문자가 되었다. 마치 별점을 치듯이 등에 난 잡티와 점과 주름과 갈라진 피부를 더듬어가면서 한 늙은 여자의 긴 세월을 더듬어보는 것이다. 가늠해 보는 것이다. 할머니의 등에 새긴 생의 지도가 처연하다.

이 사진은 사진의 재현과 기록, 정보에 속하면서도 그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보이는 등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앞부분을 연상시키고 상상하게 한다. 누군가의 얼굴임을 식별하거나 감상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이 그저 뒷통수와 어깨, 등만을 조심스레 열어 보이는 장면이다. 그것은 정면성의 이미지, 초상사진을 위반한다. 거스른다.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를 다시 보여주는 그런 이미지다. 시선의 욕망 앞에 모든 것이 단박에 드러나고 알려지는 사진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여지지 않는 부분을 상상하고 유추하게 한다.

일반적인 인물사진이 정면을 보여준다면 이 사진은 오로지 뒤태를 보여준다. 간혹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측면이나 손가락으로 죄다 가려버린 얼굴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 실재하는 여자의 몸을 보지만 그 대상은 익명의 존재가 된다. 사진으로 대상을 무로 돌려버린다. 그런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장숙은 늙은 여자의 등, 뒤태를 응시한다. 짙은 배경에 뒤통수를 덮은 머리카락과 목과 등만이 돌처럼, 비석처럼 자리했다. 이 뒤태는 음산한 분위기에서 번져나온다. 보는 이들이 맘껏 그 뒤태를 훔쳐볼 수 있는 시선의 폭력이 자리한다.

뒤를 본다는 것은 그 인물이 보는 이의 시선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의 시선이 관음증적으로 뒷모습을 응시한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나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이 나를 독점해서 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소유된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뒤를 보라는 이 허용의 시선은 내 몸을 마음껏 편애하라는 투항의 제스처다. 몸을 벗는 다는 것은 나의 몸을 타인의 시선과 손길에 내주는 일이다. 다소곳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표정과 얼굴의 모습을 감춘 체 이 할머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뒷모습만을 독대하게 한다. 사진에 의해 가능해진 오랜 응시 아래 보는 이들은 찬찬히 늙은 얼굴과 몸의 디테일을 관조한다. 더듬는다.

우리는 내 등을, 내 뒷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 내 뒤태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등에도 눈이 달려있다. 시선은 그런 것이다. 시선은 눈의 밖에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의 안에 있다. 눈은 시선의 싹이다. (라캉) 장숙은 노인들의 뒷모습을 관음증적으로 관찰한다. 그 등에서 문득 자신의 몸을 본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오버랩된다. 여자의 몸은 누군가의 몸을 만들고 그렇게 거푸집의 기능을 다한 후 소멸된다. 그 여자의 메마른 자궁에서 나왔던 몸들이 다시 몸을 만들고 그 몸들이 또다시 새로운 몸을 만드는 엄정한 순환과 생의 이치를 다시 본다. 자신의 등과 엄마의 등, 할머니의 등 그리고 딸의 등이 동시에 부감된다. 결국 작가가 본 것은 자신의 살이고 몸이다. 죽음의 자리다.

얼굴은 사회적 기호이고 머리는 생물학적인 자리다. 머리는 앞과 뒤가 있지만 얼굴은 앞만 있다. 타자와 부단히 연동된 시선과 표정이 없는 한 그것은 머리에 불과하다. 머리는 표상이 부재하는 기표인 탓에 타자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낯설다. 그런데 들뢰즈는 오로지 머리만이 진정한 주체(자신)에 속한다고 말한다. 장숙이 보여주는 사진에는 얼굴이 없다. 얼굴은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측면에서 겨우 드러나거나 손으로 가려져있다. 그러나 보는 이들은 그 얼굴을 상상한다. 실재하는 한 얼굴의 재현이 아니라 무수한 얼굴을 떠올려준다. 겹쳐놓게 한다. 그것은 관자로 하여금 적극적인 개입을 허용하거나 그 빈 얼굴에 자신의 얼굴 내지는 자신이 보았던, 보고 싶었던 여러 얼굴을 대입시킨다.

그래서 없는 얼굴은 구멍이자 여백 같다. 라캉은 인간만이 가면 뒤에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뒷모습에서 앞모습을, 얼굴없는 곳에서 얼굴을 보게 한다. 일상적인 시각에서 비가시적이었던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미지고 회화이자 사진의 힘이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본다는 일, 곧 시선이란 전에 비가시적이었던 것을 가시적이게 하는 일이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따라서, 혹은 사진과 더불어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물의 복사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눈이 보이지 않는 생각을 사진이라는 가시성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 사진, 이미지의 어려움일 것이다.

캄캄한 어둠을 대면하고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죽음을 관조하는 것도 같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의 흑연 같은 매혹적인 색조의 변주는 절여진 세월과 시간의 무게, 한 여자의 생애를 섬세한 모노크롬으로 빚어낸다. 반짝인다. 전체적으로 균등하고 평화로운 빛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대상을 감싸고 있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풀어 귀 뒤로 쓸어내린 이는 자신의 벗은 몸의 뒤태를 보여준다. 목과 어깨 위로 풀어 내린 머리카락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어깨선이 얼굴과 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슬그머니 자리하고 있다. 그 선을 통해 앞과 뒤가 분리되고 보이지 않는 정면의 얼굴과 등 뒤와 아래쪽 몸을 상상하게 한다.

보는 이의 시선에는 우선적으로 하얀 머리카락과 어깨 선이 들어오고 그리고 귀와 그 아래로 굵게 지나가는 주름들이 다가온다. 은색의 머리결과 주름 그리고 드문드문 비치는 검버섯은 오랜 시간의 결과 그늘을 감촉시킨다. 탄력과 무게를 잃고, 윤기를 망실한 머리결과 피부는 메마르고 까칠한 상태에서 자기 존재의 무게를 죄다 내려놓는 중이다. 이제는 죽어 사라졌을 이 할머니의 뒷모습은 한때 지상에서 보여지고 만져지는 육체를 가진 이의 한 순간의 모습이다. 사진은 그렇게 존재했다가 망실된 이의 육체를, 존재를 오랫동안 응시하게 해준다. 작가는 친분이 있는 한 할머니의 얼굴과 벌거벗은 뒷모습을 찍었다. 이 할머니들은 스스럼 없이 카메라앞에, 지인의 시선에 자기 모습을 맡겼다.

어깨 너머로 마지못해 들여다 본 듯한 얼굴도 드러난다. 아니 얼굴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다만 부분적인 측면만이, 등만이 보는 이의 시선 쪽으로 융기한다. 그래서 귀는 돌올하게 솟아오르고 머리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그 선은 몸에서 발아한 기이한 털들이자 얼굴과 머리부분을 구분짓는 영역임을 증거한다. 쪽을 지었을 머리가 지지대를 상실하고 무방비로 흘러내린다. 온통 하얀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얼굴을 죄다 덮은 손가락의 주름과 그 손가락에 낀 소박한 반지가 만들거린다. 그 하얗게 새버린 머리카락을 통해 이 할머니가 살아왔을 삶과 인생을 온전히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인생이란 자기 생의 긴 시간을 겪어왔고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은빛의 머리털만이 파문을 짓는다.

그것은 결코 풍성하거나 찰지진 않지만 그 어떤 머리카락보다 서사적이다. 자신이 한 여자임을 증거하고 평생 그 머리카락을 감고 빗어넘기면서 단장하고 자기정체성을 표상했을 것이다.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애무되었을 것이고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려 탈색되고 조금씩 빠져나갔을 것이다. 마음의 여러 근심과 한 숨에 의해 헝클어졌을 것이다. 장숙의 근작은 생의 욕망과 여자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조금은 탈각하고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노쇠하고 오그라든 여자의 몸을 대상화했다. 얼룩과 등, 그리고 머리카락에 집중해서 말이다. 할머니란 여자의 몸은 무엇일까? 침묵으로 절여진, 그러나 무수한 내용을 발설하는 그 등은 무엇인가? 그간 사진과 회화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육체, 여체로 재현되어 온 것은 오로지 젊은 여자들이었다.

싱싱하고 탄력적인 살들로 풍성한 몸들이 관능적으로 시각화되어 왔다면 장숙이 찍은 할머니는, 늙은 여자는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여자의 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수압에 의해 밀린 등살을 보여주는 우도의 해녀와 평생 농사일에 시달렸든 이의 등은 같으면서도 무척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등을 통해 그녀의 삶을 읽을 수 있다. 등은 텍스트다. 시간과 세월 속에 탈색된 그 등은 모든 것을 겪어낸 이의 종말 같은 지점에서 가능한 기념비적 증좌다. 몸은 시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부위에 서식하는 시간의 자취와 그늘이 발에 밟히는 이 사진에는 그렇게 시간에 저당 잡혀 있고 세월 속에서 조금씩 소멸하다 어느 순간 무로 돌아가 버리는 육체의 허망함과 덧없음이 침처럼 고여있다. 생과 사의 단락이 이루어지는 몸에 대한 회한 같은 이미지다. 생과 사가 다른 게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그렇게 들러붙어있음을 새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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