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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삼 / 달빛이 편애하는 나무들

박영택

이재삼 / 달빛이 편애하는 나무들


어둡고 깊다. 적막하고 적요하다. 칠흑 같은 밤의 서늘하고 음산한 분위기도 베어 나온다. 검은 먹 빛 같고 짙은 갓 색깔과도 같은 배경을 뒤로 하고 우람하고 억세며 옹골찬 나무가 부감된다. 오랜 수령을 지닌 소나무와 매화나무다. 이전에는 대나무 숲이 가득했는데 근작에는 단독으로 설정된 나무가 주를 이룬다. 더러 물, 폭포가 등장한다. 유교적 텍스트를 이념화한 전통회화에서 흔히 접하던 소재들이다. 나무와 물은 어둠을 밀고 나와 환하게 빛난다. 달빛에 의해 반짝이며 드러난 품위 있는 자태다.

화면 속에 달은 부재하지만 거의 정면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달빛을 가득 품고 있는 모양새다. 나무와 물이 그렇게 달빛을 온 몸으로 흡입해내고 있는 듯 하다. 그 달의 음기를 자기 내부로 빨아들여 무엇인가를 회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여성이 임신을 원할 때면 달빛을 한껏 쐬게 하였다. 여성의 생리주기는 달과 일치한다. 그래서 달은 여성, 음을 상징한다. 유교이념 속에서 달의 차가운 느낌은 군자의 덕을 상징했으며 맑고 높은 절개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히 달의 밝은 빛은 정화하는 힘의 상징이었다. 달빛은 신비한 기운을 주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재삼은 그러한 달빛을 받고 서 있는 나무를 그렸다. 치밀하고 엄격하게 그렸다. 달빛을 보여주기 위해 배경을 단호한 어둠으로 마감했고 그 달빛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기 위해 발산하는 나뭇가지와 수직으로 하강하는 물줄기를 그렸다. 나무와 물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상황을 어둠 속에 정지상태로 증거한다. 작가가 그린 그림은 대나무나 매화, 물(사실 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주변의 바위가 그려져 있어서 빈 부분이 물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물 그림은 바위, 돌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이라는 대상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달빛, 음기를 가득 품고 있는 자연계의 비의적인 상황, 그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기운으로 자욱한 긴장의 순간의 시각화하려는 시도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느껴지는 비의적인 분위기, 묘한 아우라야말로 이재삼이 보는 한국의 풍경에서 풍기는 것이고 이 땅의 식물이고 나무고 물의 존재성에서 그가 보고 읽고 느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 사군자나 십장생과 같은 전통적인 문화의 코드에 길들여진 상징에 기대어 그리기 위해 소나무와 매화, 물이 요구되었던 것만이 아니라 그 대상이 전해주는 기운, 그 대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의 기이한 송환,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레 공감하고 우연히 알아채는 묘한 심상의 기억 같은 것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전통이란 그런 심상의 기억을 통해서 환생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질과 대상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그 시간대를 경험하거나 체득하지 못했어도 선조들의 삶이 이루어졌던 이 땅의 모든 것에 은닉된 것들을 산 자들은 절로 깨우친다.

문화유전자는 이렇게 인체 내부의 피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바깥에 있는 사물과 풍경과의 접촉에서 유전되고 전파될 수도 있다. 사물과 풍경의 기억이나 체험을 통해서 문화의 정체성은 세록세록 만들어진다. 두터워진다. 이어령의 표현처럼 한국인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만난 여러 가지 사물이나 도구, 풍경을 통해서 그 문화유전자를 만들어왔고 그것이 유전되고 있다. 이재삼 역시 그가 보고 만난 우리의 풍경에서 느끼고 깨달은 심상의 기억을 반추해서 그리고자 한다. 그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매화나 소나무, 폭포(물)을 보면서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혹은 잃어버리고 있던 우리 문화의 상형문자를 찾아내고 해독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재삼이 그간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 물을 그리는 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풍경, 전통적인 미의식과 연관된 의식적인 행위이었다고 본다. 그는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소나무와 매화를 찾아나섰다. 신묘하고 영험스러운 오래된 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와 그 나무가 있는 땅과 공간을 체득하고자 했다. 당산목을 찾아 나선 손장섭이나 경주 소나무와 종묘를 찾던 배병우의 행적이 그와 겹친다. 이들 모두가 구체적이고 친숙한 소나무를 보여주지만 결국 그들의 작업은 그것의 소박한 재현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발산하는 기운을 포착하는데 사로잡혀있음을 알 수 있다.

밤은 어두워야 비로소 밤이다. 그러므로 밤을 밝히는 조명 역시 대낮의 빛을 모방하는 것보다는 달빛이나 별빛처럼 으스름한 광체를 지닌 것이야 제격이다. 인공의 조명이 아닌 달빛이야말로 진정 밤을 밤답게 한다. 그것도 그냥 밝은 달이 아니라 구름 속에 가린 달빛을 더 좋아한 것이 우리 선조들이다. 으스름한 빛, 어렴풋한 빛, 깁 속에서 번져 나오는 청사초롱의 불빛 같은 그런 빛이 있는 밤이 진짜 밤풍경이다. 이재삼이 그리고 있는 밤이 그런 밤이다. 오묘한 달빛이 나무와 물을 비추고 있다. 엄격한 검은 빛이 나무를 감싸고 있고 달빛은 그 나무의 피부를 감싸안는다. 달빛이 소나무의 표면을 애무한다. 편애한다. 하늘의 천기와 땅의 지기가 맞물려서 선회한다.

양기와 음기가 그득하다. 교교하고 스산한, 이상한 섬찟함이 가득하다. 그 기운은 면 천에 목탄을 수없이 겹쳐 올리며 낸 검은 깊이 속에서 피어난다. 작가는 겹쳐 그리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그만의 목탄의 깊이를 얻는다. 목탄은 나무를 태운 것이고 그 목탄으로 인해 나무는 다시 환생한다. 자연이 자연을 환생시키고 죽은 자연이 살아있는 자연을 흉내낸다.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졌지만 역설적으로 상당히 관념적인 그림이 된다. 나무와 물이 뿜어내는, 그 주변에서 발산하는 이상한 기운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기에 그렇다. 그 기운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한국인이라면, 문화유전자를 간직한 이들이라면 알아차릴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림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가, 되었는가?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어딘지 이상한 기운에 노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수 백년 된 신령스러운 나무, 당산목의 기운과 그 신기를 접하고 그 오묘한 기운을 그리고자 한다. 검은 목탄은 그와 궁합이 잘 맞는다. 면 천과 나무,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은 서로 상응한다. 그는 목탄을 비벼 면 천안으로 밀어 넣거나 단호하게 발라간다. 무수한 레이어를 지닌 검은 깊이가 만들어진다. 목탄을 쌓아올렸다. 그로인해 무광의 절대적 어둠은 막처럼 펼쳐진다. 그 검음은 달빛을 보여주기 위한 배려다. 검은 배경을 뒤로 하고 날카롭게 나무와 물/폭포가 드러난다. 차갑고 엄격하고 냉정한 침묵이 흐른다. 좀 흐트러져도 무방해 보이는데, 여운이 감돌았으면 하는데 그게 좀 아쉽다. 너무 깔끔하고 정확하고 완벽해 보인다. 그의 성격일 것이다. 그리고 자폐적이고 고독하고 엄격함의 내음도 난다. 그는 식물성을 지향한다. 식물성의 존재들이 주는 교훈을 듣는다. 왜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결같이 동물성의 육체를 지우고 식물성의 존재가 되기를 갈망했을까? 왜 난이나 대나무, 바위나 물이 되고자 했을까? 왜 그러한 자연이 되고 싶었을까?

이제 그는 전통이란 다소 무거운 의미를 간직하고 있던 도상적 차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그는 어떤 대상을 그리더라도 한국인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기미, 느낌이 있는 분위기로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찮은 풍경이라도 자신의 필치를 거치면 한국인의 진솔함이 베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그려도 한국인이라면 느낌이 오는 그런 분위기, 기운이 묻어나는 그림을 원한다. 결국 그는 우리 산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라는 화두를 붙들고 목탄 가루를 산처럼 쌓아가면서, 면 천안으로 안으로 하염없이 밀고 들어가면서 진정한 우리 산하의 ‘디테일’을 그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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