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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 폐허에서 접한 수평

박영택

폐허에서 접한 수평


모든 폐허는 아름답다. 잔혹하고 참담하지만 그렇게 부서지고 소멸되어 버린 마지막 잔해는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들끓는다. 그곳을 풀들이 점령하며 모든 경계를 지운다. 전쟁이나 화재의 현장, 파괴와 죽음을 접한 이들은 그 강렬한 폐허의 분위기를 의식에서, 마음에서 쉽게 지우지 못한다. 무의 자리를 본 이들은 다시는 헛된 욕망의 전언과 영원을 약속하는 모든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삶의 끝과 욕망의 마지막 자리를 이미, 미리 본 자들이다. 그런 이들의 충혈된 눈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생각해보면 모든 죽음과 끝은 수평의 자리를 보여준다. 수평은 수직에 반한다. 수직이 욕망적이고 남근적이라면 수평은 고요와 휴식, 휴지를 보여준다. 모든 욕망을 죄다 가라앉히고 밑으로,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수평은 평화이며 침묵이고 노동에 반하고 내 존재를 타자 앞에 세우지 않는다는 제스처다. 수평은 그래서 복종이자 겸손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정신이다. 인간이 수평이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최후의 자세를 미리 시연한다. 완벽한 수평을 보여주는 것은 물, 바다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의 수평성에 환호한다. 그 단호한 가라앉음에 감탄한다.근대 이전의 모든 문명은 수직으로 치솟았다. 신전과 첨탑, 사원과 기념비, 궁전과 동상 등이 그렇다. 앙시의 시선을 강요하는 권력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표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 건물들은 풍경의 핵심을 이루고 서있다. 그것들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를 시각화한다. 혼돈의 자연을 지우고 명료한 존재성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반면 근대는 수직의 세계가 아닌 수평에 주목한다. 천상이 아닌 대지에 천착하는 시선은 다분히 유물론적이다. 그 현실이 이루어지는 대지성, 수평성의 주목이 새삼 수직의 건물들을 마구 일으켜세운 아이러니도 만난다. 현대의 도시는 그 발기된 수직성으로 촘촘하다. 무서운 욕망의 현존이 이룬 풍경이다. 도시는 수직의 건물을 부수고 짓고 다시 더 높이 짓고 다시 부수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기증 나는 수직의 도시를 떠나 수평을 찾아나선다. 처연하게 드러누운 바다, 시욕을 무력화하는 사막과 초원을 갈망한다. 그런가하면 폐허의 자리를 순례한다. 흩어진 돌무더기와 깨지고 바스러지는 벽과 닳고 닳은 기둥을 쓸면서 어떤 허무를 만난다. 욕망의 끝을 바라본다.

한애규는 그리스의 한 신전 앞에 앉아있었던 추억을 얘기한다. 그 누워있는 폐허에서 접한 상념과 감회가 모티프가 되어 근작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미 이전 작에도 작가는 폐허와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근작은 그 관심의 강도가 쎄졌다. 무너진 돌무더기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던 순간을 떠올려 폐허와 수평에 대해 숙고한 결과를 작품으로 밀어내고 있다. 작가는 옛 신전에서 여러 세기에 거친 약탈과 괴로움을 당한 포석과 파괴적이고 가혹한 서사시를 만났다. 이 성소는 옛날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완벽한 고독 속에서 비극적이다. 아니 쓸쓸함 속에서 빛나는 통렬함이 있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잘 볼 수 있도록 높은 언덕위에 자리한 부서진 옛 신전은 완전히 노출된 살갗처럼 연속적이며 자기만족적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표피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결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한때의 영화와 권력과 욕망들은 시간이 지난 지금 부질없는 것이 되어 바람에 흩어진다. 무수한 시간이 겹쳐 어지러이 흔들리는 그 착잡한 공간을 찾아온 이들은 결국 무너진 자리, 부재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작가는 그 돌무더기와 기둥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수 천년 전의 자리에 현재의 시간을 올려 놓은 것이다. 수직으로 발기되었던 기둥은 바닥에 쓰러져 뒹굴고 견고한 벽들은 무너졌다. 현재의 사람들은 그 잔해위에 가만히 앉아서 상상한다. 유한한 자신의 생에 대해,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삶의 자취가 결국 먼지가 될 것도 예감할 것이다. 그곳은 결국 반성의 자리이다. 자신의 시작과 끝을 한자리에서 펼쳐 보여주는 공간이다.한애규의 근작은 흙으로 빚은 여인상과 기둥, 쌓아둔 항아리 혹은 옹관, 넙적하게 바닥에 눕혀진 덩어리들이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마치 폐허의 신전이 연상되는 연출이다. 혹은 유물이 출토된 장소, 폐사지 등을 떠올려준다. 자신이 본 폐허의 장면을 부려놓은 것이다. 흙으로 빚고 구워내 따스한 온기가 감촉될 것 같은 나신의 여인들은 바닥을 적조하게 응시한다. 부풀어 풍만한 몸과 고졸하고 소박한 표정이 더없이 평화롭다.
한애규가 만든 여인상의 얼굴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표정으로 보는 이를 받아들인다. 여자들은 넉넉하고 부드럽고 따스하며 기꺼이 수평으로 돌아갈 순간을 기다린다. 주변에는 옹관과 납작한 덩어리들이 누워있다. 부푼 배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여인들은 그 자리를 확인하듯 서있다. 무심히 내려다 본다. 수평성에 눈을 맞춘다. 그러니까 이 직립성은 역설적으로 수평성을 강조하는, 주목시키는 수직이다.

혹은 자신의 작품 역시 수직의 욕망 속에서 부풀다가 이내 사라질 것임을 증거한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 마냥 여인의 형상이 기둥이 되어 열주처럼 늘어서있다. 가슴과 배를 드러낸 벌거벗은 이들은 흙이자 살이고 기둥이자 폐허다. 남자가 부재한 자리에 여자의 살들이 편안하게, 부드러운 관능성으로 다가와 드문 풍경을 만들어 보인다. 관자들로 하여금 그 주위를 거닐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대해, 문명과 폐허에 대해, 수직과 수평에 대해 생각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더러 그 흙덩어리 위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겨도 무방할 것이다. 여자의 몸이고 옹관이자 기둥 같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흙이고 기꺼이 소멸될 흔적들이기도 하다. 한애규는 그 무엇을 재현하거나 표상하려 하기보다는, 의도적이고 목적론적인 이야기를 구현하려하기보다는 모든 욕망의 휴지기를, 그 드물고 빈 풍경을, 폐허에 다름아닌 장소를, 시욕을 다소 무력화시키는 공간을 안긴다. 그곳에서 새삼 인간 존재의 끝을, 모든 문화와 이미지의 마지막 자리를 떠올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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