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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겸 / 손의 언어들

박영택

손의 언어들


“우리의 눈이 기능을 상실한 후에 우리의 손은 오랫동안 세상에 충실하다.”(프레데릭 작스)

몸의 최전선에 놓인 손은 내 몸에서 멀리 나아가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기관이기도 하다. 손은 늘 머리와 연계되어 있다. 어깨에서 늘어진 것이 팔과 손이 아니라 마치 뇌 속에 담겨있다고 곧바로 불쑥 나와 버리는 게 손이다. 그렇게 손은 정신과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에 접속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손은 혀를 대신해 발화하기도 하고 차마 언어화하거나 음성을 갖지 못한 것들을 촉각적으로 전달하거나 묵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손은 나를 대신한 또 다른 나인 듯 하다. 손은 얼굴 못지않게 표현이 풍성한 기관이다. 표정과 음성이 없는 손은 대신 손가락의 다양한 제스처와 온기, 땀, 앙력, 촉각 등을 통해 고도의 언어와 감정을 전달한다. 그것은 아찔하고 숨막히기도 하다. 하여간 뭔가를 만질 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다. 그만큼 손을 통한 촉각은 언어적, 정서적인 접촉보다 열 배는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촉지성에 부단히 사로잡혀있다.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 손 아래 가두고 싶은 것이다. 손으로 쓰다듬고 주무르고 꽉 쥐고 싶은 것이다. 그 행위는 분명 언어적이고 표현적 행위다. 그래서 손은 타고난 예술적 기관인 것이다. 결국 손은 한 개인의 몸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그 무엇이다.정순겸의 그림에는 손, 손 이미지가 등장한다. 펼친 손이 화면위로 부유한다. 그 손은 분명 자기 존재의 표상이자 또 다른 분신으로 나앉아있다. 또는 자신과 함께 하는 무수한 누군가의 얼굴, 몸이고 정신일 것이다. 손은 제각기 방향성을 지시하며 놓여져 있다. 납작한 화면 위에 부조적, 촉각적으로 손이 올려져있는 것이다.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된 손 하나가 화면 위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쓰는 것도 같다. 혹은 한 개인의 모든 것을 함축한 존재성을 기호화하고 있다. 인상적으로는 마치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종이위에 찍던 유희를 연상시킨다. 그런 흔적과 징표는 선사시대 벽화에도 남겨져있다. 아마도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존재표명의 욕망이 바로 그러한 흔적 남기기였던 것 같다. 자기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바람은 그토록 간절하다. 손의 윤곽만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딘지 그 손 바닥에 자욱한 손금도 연상시켜준다.

손에 선연하게 자리한 손금은 한 개인의 운명을 깊은 상처처럼 안겨준다. 손바닥에 새겨진 선들이 예정된 생의 길들을 그려 보인다고 믿었기에 타고난 손금을 중요시했다면 그 손바닥은 원초적인 화면이자 신비한 거울인 셈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손금을 헤아리면서 굴곡심한 목숨의 이 지난한 길들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손 하나하나는 개별적 존재를 은유하고 누군가의 얼굴과 음성, 그리고 몸이 되었다. 막막한 몸짓이나 격렬한 절규, 혹은 침묵으로 조심스러운 손짓, 몸짓 등도 연상시켜준다. 그 손이 부착된 화면은 삶의 공간이자 생의 무대, 또는 실존적인 한계나 인간이 처한 상황성 등을 연상시켜준다. 그 무대에서 손들은 ‘마임’을 한다. 독해될 수 없는, 소통되지 못하는 손의 언어들이다.“손은 복잡한 구조이다. 많은 생명이 멀리 떨어진 샘에서 함께 흘러들어와 모여 행동의 큰 물줄기를 만드는 삼각주다. 손은 그들만의 역사와 문명,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우리는 손에게 그들만의 발전과 소망, 감정, 기분에 따를 권리를 준다.”(릴케)

정순겸은 그 손을, 손의 언어를 화면 위에 콜라주했다. 자신의 손가락을 펼쳐 그 윤곽을 그린 형상이다. 다양한 재료, 재질의 납작한 물질들이 손가락의 형상을 빌어 부조화된 것이다. 그 위로 물감이 흔적이 올려지고 붓질과 다양한 제스처가 교차한다. 그로인해 손은 감정과 풍부한 뉘앙스, 다양한 언어를 지닌 그런 손, 이미지가 되었다. 나로서는 이 손을 형상하는 얇게 오려낸 판, 화면이 무척 흥미롭다. 좀더 적극적인 회화적 제스처와 물질적 연출이 가미되면 더 재미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바탕 역시 감각적이고 예민한 선들이 선회하는 드로잉 맛이 살아있는 게 좋다. 자연스럽게 운동하고 움직이고 부유하는, 방황하는 존재의 은유이기도 하고 복잡하게 엉킨 생의 고비를 풀어나가는 손, 존재를 연상해주기도 한다. 콜라주된 손의 형태와 바탕 면에 자욱한 선, 물감과 붓질로 홍건한 배경이 서로 모종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면서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것이다.

여백처럼 남겨진 바탕면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면 위에 얹혀진 손의 형상은 흡사 벽에 갇혀있거나 폐쇄된 상황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생의 욕망 등도 떠올려준다. 물감이 묻은 캔버스 천을 오려 띠처럼 부착한 것 역시 콜라주된 손의 형상과 함께 하는데 그 작고 좁은 화면에는 추상화의 한 단면, 다분히 충동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붓질과 물감의 흔적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장식적이랄까, 다소 인공적인 처리보다는 손맛이 느껴지는 활달한 드로잉적 선과 표현주의적 처리가 돋보인다. 그림은 주제나 메시지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화면 전체에 홍건하게 녹아져, 물화되어 표명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작가만의 손맛과 감각으로 절여진 어떤 회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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