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미사 / 세라믹으로 재현한 동굴벽화 이미지

박영택

세라믹으로 재현한 동굴벽화 이미지


이미사의 도판작업/세라믹은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이미지를 매혹적으로 안긴다. 아름답다. 그것은 깊고 어둡고 아득하고 신비한 시간과 공간을 떠올려준다. 도판 하나하나가 타일처럼 이어져서 이미지를 안기고 다시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모종의 흔적을 간직한 화면으로 자족한다. 견고한 질감과 단호한 어둠, 완강한 평면위에 우아한 사슴, 순록의 자태와 몸놀림이 선연하게 내려와 앉아있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보던 동물의 이미지다. 작가는 말하기를 그 벽화를 보는 순간 자신이 보고자 한 세계, 열망하는 조형의 왕국 및 그러한 눈과 마음을 접했고 그래서 그것이 자신과 닮아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시공을 초월해 자신과 동굴벽화를 그렸던 무명의 선사인은 그렇게 연결되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던 듯 하다. 해서 작가는 자신이 잘 다루는 매체를 통해 그 이미지를 오롯이 되살려보고 자기 감성에 따라 녹여내고 강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라믹으로 재현한 동굴벽화라기 보다는 그 벽화이미지를 차용해 자신이 보고 싶은, 도달하고 싶은 그런 감각과 물질의 상태를 연출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작가는 그 선사인들이 가졌던 마음과 눈을 갖고 싶었고 그런 식으로 이미지를 대하고 가꾸었던 손을 모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계, 우주를 보았던 그들의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조형적으로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주술과 제의적 성격을 갖는 동굴의 벽화는 최초의 이미지이자 이미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 성격을 상기시켜준다. 이미지는 기억, 상실에 대한 저항, 죽음에의 저항, 쾌락, 잉여와 사치다. 동굴벽화에는 동물에 대한 살해의식과 함께 충만한 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희생제의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고 죽음과 삶의 경계를 보여주고 인간적인 흔적들을 절실하게 가시화한다. 라스코의 고대인들, 호모사피엔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라스코 고대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하나의 고통스런 강박관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선진성은 바타이유가 지적하듯이 죽음을 성과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에로티즘의 인식과 시대를 같이 한다. 에로티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반드시 선취해야 할 인식의 대상,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얘기다. 에로티즘은 시, 예술, 종교 등과 마찬가지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 목적이요, 조건 없는 욕망이다. 바타이유는 호모 사피엔스가 성과 죽음을 동시에 그린 라스코 동굴벽화를 보고 비로소 예술의 탄생, 에로티즘의 탄생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의 등장을 지켜본 것이다.

이미사는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접한 감동을 환생시킨다. 원시적이면서 근원적인 이미지에 매혹당했다. 죽음과 성, 인간적 한계와 초월에의 주술적 욕망으로 아득한 그림들을 유심히 보았다. 말없이 가슴에 꽂혀 파고든 그 사슴 이미지를 작가는 도판으로 응고시켰다. 돌의 피부위에 재현한 이미지를 흙의 살로 구체화했다. 대지의 자궁 안쪽(동굴) 피부에 밀착시킨 이미지를 가변적인 흙으로 빚은 인위적 화면 위에 굳혀놓았다. 우아한 몸짓으로 부드러운 윤곽선을 그리고 있는 동물의 신체를 도판위에 그리고 파고 긁어서 새겼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파고 긁는다. 그런 느낌이다. 붓으로 그리고 칠하고 다시 긁는다. 붓으로 그리고 그 붓선을 다시 지운다. 걸레나 쑤세미, 조각도 등으로 긁거나 문지르거나 새긴다. 그렇게 해서 질감으로 있는 선, 그런 느낌을 추구한다. 마치 오래된 바위의 결, 층을 보여주는 선과 유사하다. 그 선 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베어 있다. 공간을 주어 저 너머 세계의 깊은 느낌을 부여한다.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깊이 있게 나타내고자 한다. 매혹적이고 신비스러운 그 몸에 자신을 의탁했다. 그 존재는 결국 자신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 작가는 말하기를 그 동물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가고 싶다고 한다. 그 세계를 느끼고 싶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에게 이르는 길이다. 작가는 도판 위에 오랜 시간의 흔적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시간만이 만들 수 있는 얼룩일텐데 작가는 이를 독자한 방법론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오래되고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작가의 감각을 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납작한 사각형의 도판 위에 그려진 그림은 분명 벽화의 흔적이다. 구체적인 사슴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지만 동시에 오래된 벽의 느낌, 박락된 체 아득한 시간의 자취를 뒤집어 쓴 자국들로 마냥 뿌옇다. 밑 색을 계속해 올려서 이룬 단호한 어둠, 짙은 깊은 검정을 만들었다. 그것은 유약이 아니라 이른바 융제인 프린팅 파우더로 인해 이루어진 색채다. 그것은 또한 질감표현과 깊이에 적합하며 코팅과 강도, 색감의 깊이에 관여한다. 이른바 ‘파티나 효과’를 보여준다. 융제로 인해 가능한 그 효과는 멍울이 생기고 기포가 이루어지며 성애처럼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 효과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오랜 시간의 결, 균열과 부식으로 인해 허물어져가는 어떤 순간을 암시해준다. 작가는 이러한 효과를 증폭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추구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효과는 융제로 인해 가능한데 작가는 융제의 차이를 주는가 하면 물감, 볼 클레이, 고화도 안료 등을 섞어 그림을 그린다. 원하는 이미지를 끌어가면서 조율하는 것이다.

작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을 받아 성질이 바뀌는 흙을 이용해 세라믹을 만들었다. 표현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 매체가 자신에게 매우 적합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편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주제와 느낌을 세라믹으로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여정이 그간의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동굴벽화의 이미지가 세라믹으로 구현되어 나왔다. 작가는 조형토를 1230~1250도로 구워내 강도 높은 도판을 만들고 그 위에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자취를 올려놓았다. 동굴벽화를 도자로 구워낸 흔적, 도판인데 이 도판은 벽에서 일정한 높이로 튀어 올라와 걸려있다. 깊이를 달리해서 걸려 지기도 한다. 공간, 벽면에 설치화 되어 식물처럼 퍼진다. 그것은 정해진 틀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가변적이고 개방적으로, 우연적으로 이어지고 파생된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충동과 욕망에 의해 혹은 미지의 힘에 의해 그렇게 나아간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