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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호 / 조각의 길을 묻다

박영택

조각의 길을 묻다


“나는 늘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한 잔 걸치며 혼자만의 상념을 되새긴다.” 창릉천이 흐르는 북한산 기슭에서 살며 작업하는 이일호는 외롭다. 그러나 고독한 자가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누리려면 기꺼이 고독해야 함을 작가는 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고독한 시간동안 밀려드는 온갖 상념을 아주 자연스레 작업으로 견인한다. 철저하게 자기 생의 단상에서 불거져 부푼 것들이 그의 조각이 된다. 사실 그의 조각은 늘 그런 문장, 문학적 이야기를 달고 있었다. 그는 즐겨 글을 쓰고 그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동시에 그 글들이 이미지가 되고 조각이 되어 공간에 자족해왔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 그 생각을 이미지화하기, 그 이미지를 물질로 만들어 공간에 부려놓기란 루트에 충실해왔다.

“나의 조각은 그냥 내 생각의 조각이다...내 작품은 외로운 섬에서 깜빡거리는 등대처럼 고단한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신호이다.”아울러 “나의 예술은 내 삶의 덧없음과 회한과 고통과 슬픔으로 숙성된다.”그의 생각이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 등으로 귀결되어 왔다. 생과 사, 남과 여, 성과 죽음 등 이원적인 요소들 간의 대립과 길항으로 좁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는 수많은 상념, 생각을 기다린다. 그 생각이 문득 덥치는 순간 냅다 그것을 얼음처럼 얼려놓는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그의 뇌 속에서 돌아다니다 걸려든 것들이 물질로 고형이 되어 존재한다. 어떻게 생각이 이미지가 되고 물질이 될까? 그는 마치 문인이 문자로 생각을 외화시키듯 자기 생각을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이후 그것을 물질로 고정시킨다. 생각은 입자처럼, 전류처럼 혹은 쏟아지는 폭포수 같고 더러 쏜살같이 사라지는 바람 같은데 그는 그것을 애써 부여잡아 구체적인 공간에 자립시킨다.

“조각은 기다림이다. 조각은 귀신과 같아서 멀거니 앉아 있다 해서 올 일이 아니다. 사방에서 화두를 잡듯, 무당이 굿을 하듯 정진해야 한다.” 그는 온 몸으로 생각하고 이를 하나의 형상으로 정리한다. 따라서 그의 온갖 상념은 철저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된다. 조각은 그림과 달리 결정적인 한 몸을 원한다. 공간에 자존하는 구체적인 몸과 살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의 조각은 그러한 형상조각으로 다채로웠고 화려했으며 재미있었다. 그래픽 디자인이나 광고이미지처럼 혹은 시어처럼 간결하고 정리된 그가 산출한 이미지, 형상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욕망과 관능, 삶과 죽음 등 다소 끈적거리고 눅눅한 내용들을 상당히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내왔다. 그 직접적인 내용은 자기 식의 인식과 깨달음이랄까 혹은 느낀 점을 그대로 내지르듯이 던져놓은 것들이다. 그에게 조각이란 무엇일까? 그는 조각가이기 이전에 몽상가다. 생각이 많고 그 많은 생각을, 상념을 적어 책으로도 묶어냈다. 그러나 그는 우선적으로 조각가다. 생각을 물질로 구체화시키는 이다. 그는 인문학적인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조각가다. 그 사유는 관념적이거나 허황되어 보이지 않는다. “조각은 내가 식별하는 세상의 이야기이고 더불어 소통의 다리이다. 내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면 그것은 내가 그동안 저어간 내 마음의 위치이다.”그는 흙을 빚어 그 질감으로 삶에서 연유하는 생각의 질곡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혹은 관능적으로 주물러 빚는다. 무엇보다도 조각은 일이다. “뇌 속에 몽밀하게 부유하던 수 많은 환영들이 쏙 빠져나와 캄캄함 흙을 밀어올려 세상에 없었던 형상을 낚아채는 기쁨이 그나마 이 늙은 이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낙인 것이다.” 그는 그만의 질감으로 세상의 이치를, 속살을 더듬는다. 그의 몸은 혀와 같다. 그는 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혀는 물렁하면서도 날카롭고 원초적 본능으로 충실하다.”그도 그 몸이 혀가 되어 세상을 햩는다. 자기 생각을 죄다 햩아댄다. 그래서인지 그는 질감에 민감하다. 그의 온 몸이 혀가 되어 사유한 것을 고스란히 질감화해서 만든 것이 그의 조각이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는 재료와 기법은 그 질감의 불가피한 물화로 나온다.

이일호의 조각은 말하는 조각이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로 떨어지는 단호한 말이다. 그림이 평면에 일루젼을 주면서 그 말을 건넨다면 조각은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다가온다. 세상에 우리들이 하나씩 무언가를 만들고 세워서 대지를 채워나갔다면 조각가 역시 그렇게 세계에 참여한다. 그것은 납작한 평면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 그림이 눈에 호소한다면 조각은 육체에 감겨든다. 그것은 촉지되는 것이자 공간에 벗은 채로 나앉는 것이다. 이일호의 조각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억에 의존하자면 그의 조각은 언제나 인간의 육체를 형상화해왔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생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선적언어를 단촐하게 구조화시키는 조각이었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그의 형상조각은 명료한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몸과 그 몸이 지닌 여러 문제들을 선명하게 발언한다. 그리고 그 주제는 인간에 관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것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삶과 죽음, 성과 욕망, 타인과의 관계, 남과 여 등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조각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문제를 조각 언어로 묻고 깨우치고 다시 허물고 지우는 과정 속에서 하나씩 몸을 내민 것들이다.

이일호라는 한 개인의 모든 자의식과 생각의 덩어리들이 조각언어의 충실한 규범을 유지하면서 세상 밖으로 출현한다. 나로서는 그의 조각은 자기 개인의 생애의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온 삶에 대한 깨달음에 가깝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다분히 자기모멸과 허무, 자학에 가까운 편이면서 인간이란 존재의 허약하고 비겁한 혹은 지독히 동물적인 부분에 대한 자조에 근접한 인식인데 그런 것들이 얼핏 불가적이고 선가적인 뉘앙스로 추락하기도 했다. 동시에 여전히 인간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과 환멸의 끝을 본 자의 다소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선의 자유로움도 바람처럼 감긴다. 그의 조각은 인간에 대해 말을 건네고 욕망과 죽음과 성이라는 인간 육체의 치명적인 지점을 형상화한다. 그런 주제가 이일호식의 다소 초현실적이고 몽상적이고 환각적으로, 착란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근작은 그런 지점으로부터 조금 떨어져보인다. 이제 인간의 육체에, 질감에 천착한 문제의식이 좀 더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적이랄까. 자신을 둘러싼 광활한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우선적으로 놓여있다. 사실 그것은 너무 어마어마하거나 광활하고 거대한 것이라 조각으로 끌어들이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결코 조각으로 물질화시키기 어려운 것, 질감화시키기 쉽지 않은 것이다.<우주의 겉과 속>, <우주의 영성>이 우주시리즈이고 <낙타와 사람>,<말과 사람>,<어느 한 인간의 풍정>, <버들선생>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한결같이 작품의 거대한 규모와 집요한 노동력, 재료를 다루는 솜씨 등에서 주목된다. 이전 작업에서 보이는 상념과 몽상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는 느낌이고 더 근원적인 지점으로 몰고 간다는 생각, 아울러 그 막막하고 광대한 것, 어마어마한 것의 핵심을 탄탄한 기법과 공정으로 확 나꿔채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어느 한 인간의 풍정>은 남자가 한 평생 쏟아낼 수 있는 정액은 큰 주전자 하나 분량이라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어찌보면 남자는 평생을 막걸리 한 말 정도의 정액에 목숨 걸고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다소 우습고 가련한 중생인 남자에 대한 단상을 조각화한 것이다. 남자 성기가 주전자 꼭지가 되었고 상반신은 부재한데 새장이 이를 대신했다. 한 쌍의 새가 그 새장 안에서 산다. 소리 내고 날개짓 하는 실재의 새들이다. 부부금실을 뜻하는 한 쌍의 새가 인간의 얼굴을 대신했다. <낙타와 사람>,<말과 사람>은 신성한 흰 말과 흰 낙타 사이로 기계 부품 같은 인간의 몸이 걸어가는 동작을 취한다. 동물의 몸통이 된 인간이다. 인간은 갇힌 공간 속에서, 촘촘한 선의 배열에 갇혀있으면서 빠져나가려한다. 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이 축축 늘어져서 탄력적인 질감과 탄성을 보여주는 <버들선생>은 옛 현자 내지는 은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조각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그런 옛 현자들의 은거와 자연 속에서 우주자연을 관조하고 깨닫던 눈과 마음을 새삼 자신의 삶의 지평 위로 일치시키고자 하는 듯 하다. 당연히 현자의 시선은 자연과 우주로 나아간다. 선인들이 자연을 완상하고 산수화를 그린 이유가 산수자연의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의 몸을 우주자연과 부단히 일체시키려는 절박한 제스처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우주의 겉과 속>이란 작품이 주목된다. 거대한 규모와 형태, 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을 용접해서 만들어나간 공정의 집요함, 기술적 세련성에서 돋보이면서도 그동안 자신의 몸, 성기의 질감으로 파악한 세계에서 밀고 나가 우주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그의 삶, 조각이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비로소 새삼 자신의 조각의 길을 발견한 듯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조각의 관심은 저 너머 우주에 있다. 무한으로 흩뿌려진 우주는 정교하면서도 무자비하다. 그곳은 여타한 이성이나 사소한 감성을 들이댈 수 없는 곳이다.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그곳엔 그 어떤 현묘한 철학도, 얼어 죽을 인간의 휴머니즘도 통하지 않는다. 우주에는 겉과 속이 따로 없다. 우주는 그것들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비밀스러운 구멍과 숨은 공간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내 들숨에 빨려든다...우주의 운행을 본받으니 이제 내 조각도 공간과 형상이 분리되지 않고 형상이 공간이 되고 공간이 형상이 되는, 겉과 속, 있음과 없음조차 구획되지 않는 우주의 운행을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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