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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 / 자기 내면의 투사로서의 서화

박영택

장우성- 자기 내면의 투사로서의 서화


1. 시서화의 분리-문인화전통의 와해와 장우성의 그림

전통사회에서 이미지와 문자는 지식인 계급, 즉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수집하고 평하였으며 아울러 시를 짓고 서예를 하였다. 따라서 당시 그림과 글씨는 이들 문인계급의 세계관, 인생관을 표상하는 핵심적 매체다. 전통사회의 문인들에게 시서화는 오늘날과 같이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있었다. 서화는 단지 시각적 정보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정(詩情)의 문학적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고 감상되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였다. 그림과 글씨는 문인들의 도덕성과 지혜를 함양하는 수양의 도구였다. 그러니까“시서화일률”론이란 단순히 시서화의 형식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글씨, 그림을 하나의 통합된 ‘심미창작규범’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시서화는 매우 특별한 사람, 즉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 즉 ‘문인’에게만 열려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표현의 도구였던 것이다. 조선시대를 거쳐 1910년대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는 행위는 한 화면에서,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통합된 의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예를들어 ‘산수’를 그린다는 것은 문인사대부들의 도덕적. 문화적 자기 확인 방식 중 하나로서 반복되었던 일종의 의식적 행위였다. 군자가 되기 위해 수양을 쌓는 과정 중에서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던 일이다. 실제 자연을 소요하고 완상하는 일, 그리고 이를 그림과 시, 서예를 통해 드러내는 일은 다름아닌 자연이 지닌 덕목을 내재화하고 이를 인격적 대상으로 치환하는 일이었다. 인자요산(仁者樂山)지자요수(知者樂水)가 그것이다. 인과 지를 지닌 대상, 자연을 흠모하고 이를 숭상하며 그 이치를 깨닫는 일, 그래서 그 덕목을 인간이 스스로 내재화 하는 것이 산수화를 그리고 감상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림의 대한 이해는 그림을 시, 서와 같은 ‘문’의 세계에서 파악함으로서만 가능하다. 반면 근대는 전통사회의 그 같은 여러 규범과 원칙을 해체시켜버렸다. 근대는 우리에게 세계를 서구의 근대이성에 입각한 이른바‘자본’의 시각에서 규정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에 따라 서화는 ‘미술’로 대체되고 산수화와 사군자를 지탱했던 문인적 이념의 세계도 증발되어버렸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화적 충격과 갈등의 대부분은 “근대 이전의 문인 중심의 사유체계가 서구근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자본 중심체계로 바뀌는 중심축의 이동과정 속에서 아직 자신의 문화정체성을 명확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까닭”(김백균)에 기인한다. 즉 문인 중심 사회에서 태동한 문화양식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완전히 동화하지 못하고 일종의 이질적 요소로 겉도는 현상을 말한다.

근대 이후 전통적인 수묵채색화는 ‘동양화’라는 이름으로 개조되어 중세적인 와유물과 교화물 및 장엄물에서 근대적인 전람회 창작미술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이미 일본에 의해 1910년대에‘서화’에서 동양화와 서양화를 포괄하는 범주 개념으로서의‘회화’로의 전환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이 같은 전환은 지금까지 서화를 보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통해 동양화를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서(書)는 전통예술로서 구조의 변혁이 일어나지 못해 점차적으로 근대적 전시 체제에서 밀려나버렸다. 이처럼 서화일치사상은 19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사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서화란 명칭은 무리 없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서화일치의 사상 내지 서화일치사상을 뒷받침하는 수묵사상이 아직은 잔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20년대에 오면서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1920년대의 서화분리사상은 선전에서의 동양화부와 서부의 제도적 분리에서 처음 비롯된다. 이제 동양화는 근대적 조형의식으로서의 장르의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서구적인 조형의식에의 자극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서화일치의 문인화관(文人畵觀)에서 벗어나 독립된 회화로서의 장르의식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은 우선 당시 일본화의 리얼리즘 정신의 자극에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동양화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조형개념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서화를 보는 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을 통해서 동양화를 보게 되었다. 이제 ‘수묵사상으로 대변되는 이념의 세계가 현실의 시각적 확대라는 리얼리즘의 세계로 전이되면서 여기에 서구적 방식의 살롱체제’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동양화는 관념과 사상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 현실에 직면해서 그 현실과의 직접적인 대결의식에서 가능해졌는데 그것이 관념산수에서 사경산수로의 전환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사경산수 (寫景山水)는 한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들녘 등이 그림의 소재가 되어 이를 관찰적 시선에 의해 묘사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전 전통적인 그림에 붙던 시, 화제는 사라지고 구체적인 지명이나 작가의 서명만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관념으로서의 산수가 아니라 관찰로서의 자연이란 묘사적 태도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저항’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월전 장우성은 전통 문인화정신과 형식을 계승하는 한편 그림과 화제를 결코 분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글이란 그림 못지않게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해방 이후를 거쳐야 했다. 50년대 이후 월전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세계로 귀의하고 시서화를 끌어안으면서 나아간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시, 문자는 항상 따라 붙을 수밖에 없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을 담은 격조 높은 문인화를 추구하였다. 당연히 화제와 그림이 어우러져 생략과 묘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그런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는 자신의 서화, 자신이 생각하는 전통문인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래 동양화는 사실주의가 아니고 표현주의와 인격과 교양의 기초 위에 초현실적 주관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동양화의 정신이다. 그리고 함축과 여운과 상징과 유현 이것이 동양화의 미다. 사의적 양식에 입각한 수묵선염의 선적경지는 사실에 대한 초월적 가치와 표상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그는 말하기를 “내가 항상 한시문으로 화제를 쓰는데,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그림이면 됐지 제(題)는 써서 무엇 하느냐. 그리고 한문이 어려워서 읽는 사람도 없고, 더구나 한글 전용하는 세상에 시대 역행 아닌가.” 라고 지적한다면서 이에 대해 “나의 화제는 그림의 일부여서 그림 해설이 아니고 또 장식품이 아니며, 더구나 자신의 감흥을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에 남이 읽어주고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사실 문인화에서 화제는 그림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내는 역할을 한다. 즉 화제 역시 문인화의 학문적 요소이며 구도 면에서 그것이 가지는 비중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림이 아무리 좋다 하여도 화제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문인화의 격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장우성의 그림에 등장하는 화제는 대부분이 본인의 감흥을 그대로 읊은 자작시이며 그는 그림을 수학하기 전 한학을 먼저 학습한 결과 특출한 한학실력으로 자작제시와 제발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이 시대 거의 유일한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겨의 전부가 자신의 내면과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그의 그림과 시, 글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이다. 그 세계는 전통사회에서의 문인과 동등한 자리이다. 그는 문인화가로서, 지식인 화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표명하고 있다. 이 점이 월전의 그림이 당대 다른 작가들의 미술관, 작가상과 조금은 다른 지점이다. 이 글은 월전의 그림이 결국 문인적 삶의 이상과 동경을 표방한 본인의 소망을 가시화한 그림이란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작인 화실에서 엿보이는 자화상을 거쳐 노인을 등장시킨 일련의 인물화, 그리고 전통적인 사군자와 돌과 학, 고양이, 물고기, 달과 백자, 그리고 폭포나 바다 등 자연소재를 끌어들여 이를 그리고 화제를 적어놓은 대부분의 그림은 이미 전통시대에 사대부문인들이 즐겨 그렸던 도상적 그림이자 아울러 그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것들은 결국 확대된 자화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장우성의 문인화-자아의 분신, 자화상의 변주

월전 장우성(1912~2005)은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를 통하여 등단한 이래 한국 근 · 현대 전통화단의 변모를 선도해 온 대표적인 작가, 시 · 서 · 화를 온전히 갖추어 전통 문인화의 높고 깊은 세계를 내적, 외적으로 일치시킨 이 시대 마지막 문인화가로 알려져있다. 1912년 충주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31년 봄 낙청헌에 입문한 이래 이당 김은호(1892-1979)에게서 섬세한 공필채색화를 배우며, 위당 정인보에게는 시와 한학을 익히고 그의 정신세계에 감화를 받으며, 또한 서단의 중심에 서있던 성당 김돈희에게는 글씨를 배웠다.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동료 교수인 근원 김용준(1904-1967)과의 만남은 그를 문인화의 세계로 유인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대한민국 국립대학 교육방침을 마련해야했던 당시 장우성과 김용준은 당시 요구되었던 민족미술은 ‘일본화풍’을 탈피하고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일반론에서 출발하여, ‘전통’을 ‘남화’ 그 중에서도 ‘수묵’으로 구체화해 나갔다. 일본화풍을 탈피한 민족미술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30년대 향토색 논의에서부터 있어 왔지만, 해방 공간에서 민족성을 시각화시키는데 적용할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월전의 그림은 개념적으로는 재현성의 약화과정이며, 기법적으로는 섬세하고 정확한 형태묘사를 서구적인 데생기법으로, 진채에서 담채로 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월전 화풍의 ‘형상의 단순화와 선조의 직선화’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월전은 원래 동양화는 사실주의가 아니고 표현주의이므로 새로운 자각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문인화의 사의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정신적인 차원의 개념으로서 그리는 이의 인격, 성품 혹은 사상을 아우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월전 화풍의 특징은 결국 ‘전통적인 동양화에 바탕을 두고 대자연과 교감하는 정신성에 근거하여, 여백을 살린 공간구성으로 간결한 선과 담백한 색으로써 화면을 단장하고 다하지 못한 말을 시로 써넣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의 기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며, 수묵과 선묘를 주조로 하는 월전의 문인화가 여느 문인화와 다른 것은, 대상의 리얼리티와 화사한 색채를 구사하고, 직접 지은 한문이나 한시를 병기하며, 다양한 인장으로 마무리하여 산뜻하고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한다. 간결하고 응축된 선으로 대상의 본질을 담백하게 그리고, 최대한 여운을 주는 여백을 설정하여 달필로 자작 한시를 화제로 씀으로서, 시 · 서 · 화가 조화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월전은 그의 글에서 문인화의 개념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문인화의 현대적 조형성을 강조하였는데 첫째, 사실에서 사의로 발전한 화풍의 흐름과 문인화를 주조한 주역들이 학자, 문인, 교양인들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소재의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즉 양식, 형태, 색채가 없는 작가의 주관, 인격과 사상의 토대위에 세련된 기법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노장불타의 정신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 문인화가로 조선시대 최북, 완당, 오원 그리고 중국 명청대의 동기창, 팔대산인, 석도, 청나라 말기 시서전각의 문인화 가인 오창석을 꼽고 있다. 넷째, 정신 · 감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동양의 역사 · 종교 ·철학과 동양의 고전을 섭렵해야 한다. 는 것이다.

장우성의 그림은 이에 입각해 한결같이 특정 소재를 취해 결국 자신의 심회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 소재는 자신이 지식인 화가, 문인화가상임을 드러내는 수단들이다. 그 기점은 1943년작인 <화실>을 위시로 해 이후에는 전통 문인화의 여러 화목을 취해 드러내는데 그 대표적 소재들이 다름 아닌 백자. 학, 부엉이, 고양이, 사슴, 물고기(간중어), 매화, 죽순, 수선이고 달밤 등이다. 자화상에 해당하는 면벽, 춤 등에는 백발노인도 등장한다. 이 모든 그림은 결국 작가 자신의 분신에 다름아니다. 이처럼 월전의 그림 모두는 사실상 자신의 내면 세계, 사의를 표현한 문인화에 속한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그림은 광의의 자화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2-1) 인물

1943년 <화실>은 입체감을 실린 설채 기법과 화면구성의 방법이 이전 작품화 궤를 같이하는 동시에, 화가의 근대적 작가 의식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화실 주제는 화가의 예술가로서의 의식이 강화되고 사회적인 위치가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그려진 매우 서구적인 주제이다. 그림을 그리는 주체를 문인화가 아니면 환쟁이로 여겨왔던 전통적인 인식이 붕괴된 후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화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고양되었던 근대기 화가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파이프는 고가의 수입품으로서 서구적 가치를 나타내는 소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이 아닌 ‘생각’하여 ‘창조’하는 화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활용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쓴 “동양화의 신단계”라는 글에서 화가가 경멸받던 과거의 관습을 비판하면서, 사회인으로서 중대한 예술가의 사명을 다하는 자로서 자신들을 ‘화학도’, ‘예술가’로 명명했다. 실른 이런 인식은 그가 어린시절부터 익힌 한학,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깃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해방 이후 문인화론으로 정립되어가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문인화가로 위치 짓게 하는 차원으로 옮겨간다. 이후 그려진 <면벽>(1981)은 명상에 잠겨 참선하는 달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달마벽관도’ 형식에서 도상을 차용한 작품인데, ’선‘을 수행하는 구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화제는 “철지(부처님세계)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없고. 쌍수(부처님세계)에 난폭한 새가 없다. 그 가운데 그윽한 도량이 있고, 설산의 흰 소가 날마다 풀을 먹어, 그 배설물이 향기로운 보물이 되어 땅에 가득 향기가 나네. 장자와 거사와 도사가 모두 지혜를 갖춰 즐겁고 고통없는 공덕만 쌓이도다. 남자 아이가 탑을 쓸고 또 닦으니 탑 속에 사리 일백 여덟 개, 청정세계의 하늘 풍악이 들려 부처님 사자성에 계시는 소식을 전하는 듯,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가시덤불이 부드러운 환경이 되고 자갈밭이 광명으로 변하리.”이다.

역시 같은 시기에 그린 <회고>(1981)는 백자 항아리를 앞에 두고 대금을 부는 노인을 그린 그림이다. 화제는 “이전부터 세상사에 관심이 적었거니와, 나이 들자 운이 트여 한가함을 즐긴다. 대지팡이 짚신 신은 봄 삼월, 종이 장막에 매화는 오경을 꿈꾼다. 신선을 구하고 부처를 구하는 것은 모두 망상일 뿐, 걱정 없고 수심 없는 것이 곧 수행이다. 솔바람 부는 어젯밤 열나게 설명했으나, 귀먹은 사람은 들으려하지 않는다.”이다. 전통을 숭상하고 이를 계승하는 자신의 운명을 회고하는 입장에서 그린 그림으로는 <춤>(1984)이 있다. 역시 백발의 노인이 한복을 입고 정갈하게 춤을 추는 모습이다. 다분히 자화상에 해당하는 그림이다.“조용한 듯 움직이고,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며, 없는 듯 있는 듯, 호소하는 듯, 원망하는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멋. 이것이 동양의 정취요 운율이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서양흉내를 내느라고 제 것은 다 팽개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니 참 슬픈 노릇이다. 시험 삼아 전통 춤 그림을 그려보는데 그 선율이 절묘해서 참 모습을 잡기 어렵고 다만 내 마음의 일부를 그릴 뿐이다.” 역시 같은 제목의 그림(1993)은 동일한 포즈에 똑같은 손동작을 취하고 있지만 좀 더 간결하고 담백하게 먹 선만으로 그린 그림이다. 또한 화제 역시 달리하고 있다. “수레먼지 이는 속세의 길 모두 잊고, 산빛과 물 그림자가 마음에 맞다. 옛 시구에 가장 정이 닿아, 두문동칠십이현(조선 전기에 새 왕조 조선을 섬기는 데에 수치스러워 초야에 은둔하여 절의를 지켰던 옛 왕조 고려의 충신 72인을 일컫는 말이다.)이 생각난다.”고 적고 있다. 아울러 “사물 밖에 초월하여 삼매에 노니는 것은 선가(禪家)의 낭만이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 운율이 자재로운 것은 도인의 환희이다. 우연히 백묘법으로 고사고무도를 그렸는데 노쇠한 자의 필치가 결국 도말(塗抹, 먹칠)을 면치 못하니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비로소 작가한다.”고 적고 있다.

2-2) 동물

월전은 순백의 자태로 기품과 품격을 지닌 학과 그와 유사한 경지로 대우받는 백로, 불길함을 상징하지만 그것을 경계로 삼고자 했던 까마귀, 가을의 정서적 표현과 어울리는 기러기를 즐겨 그렸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모티브도 있고, 변주를 통해 월전양식의 소재가 된 것도 있다. 1961년에 그린 <취우 驟雨>는 비가 내리는 허공을 유유히 날아오르는 한 마리 학을 그린 그림이다. 이 역시 자신의 자화상에 해당하는 새의 의인화이다.“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로서 몸이 희고 머리에 단정이 곱고 다리가 훤칠하여 그 외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잘 생긴 모습이 우선 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내 모습이 학을 닮았다 하여 더욱 좋아진지도 모른다. 학은 십장생에도 들어가 있는 장수하는 새로서 잡새들과 휩쓸리지 않고 고고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나는 항상 세속을 벗어난 고귀한 경지와 상서로운 기분을 표현할 때 학을 그린다.” 또한 그는 “학은 선금(仙禽)이라 일러왔고 또 장생(長生)의 동물이라 한다. 그러나 내 그러한 것은 알 바가 아니요, 다만 그 성큼한 다리와 눈빛 같은 몸차림에 선연(鮮娟)한 단정(丹頂)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십리장주 갈밭 속에 한가로운 꿈길과 낙랑장송 상상(上上)가지에 거침없는 자세로서 그 무심한 듯 유정한 듯한 초연한 기품이 한없이 정겨웁다. 내가 즐겨 이 새를 그리는 이유가 바로 그 고고한 생애를 부러워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여러 마리의 사슴을 그린 <서록도 瑞鹿圖>(1973)은 군집의 사슴을 그린 것으로 사슴이 모여 사는 모습이다. 화제는 “사슴이란 놈은 성질이 강하고 깨끗해서 높은 산 깊은 숲속에 사는데 즐겨 약초를 먹고 맑은 물을 마신다. 그 모양이 날씬하고 용력이 뛰어나며 승냥이, 이리, 표범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아 털 있는 족속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다. 찬하여 몸에는 무늬 갑옷을 떨쳐 선명하니 사슴의 문채요, 머리에는 높은 뿔을 이고 뿔가지가 빼어나니 사슴의 위풍이요, 한 수컷이 여러 암컷을 거느려 적을 용납하지 않으니 사슴의 용맹이요, 때때로 신선들과 어울려 노나니 사슴의 풍류로다.”이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사슴이 좋아서 사슴을 즐겨 그린다. 그 훤출한 몸매가 좋고 그 결벽한 성품이 좋아서다. 가을철 단풍든 고산지대나 눈덮힌 평원을 달리는 사슴들의 수려한 모습은 평범한 야수라기 보다는 옛 시인이 말한 동물 중이 귀족이요 선자(仙子)의 벗이라는 찬사 그대로다.”

부엉이를 그린<가을부엉이>(1981)는 달밤에 나뭇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는 부엉이를 그린 그림이다. 부엉이는 한자로 치(鴟) 또는 효(鴞)라고 하는데, ‘고양이를 닮은 매’라 하여 묘응(描鷹)이라 하여 전통적으로는 고양이와 같은 뜻으로 그린다. 가을의 쓸쓸함과 밤의 적막감과 긴장감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그린 듯하다. 부엉이는 야행성으로 밝을 때에는 활동을 못하고 어둠속에서라야만 먹이를 구할 수 있기에 근본적인 슬픔을 안고 있다고 여겨진 새다. 월전은 이렇게 쓸쓸하고 호젓한 분위기, 다소 고독하고 외로운 상황을 연출한다. 그래서 그는 가을과 달빛, 그 가운데 외로운 동물과 식물 하나를 자신의 분신으로 던져놓는다. 고양이를 그린 <노묘 怒猫>(1968)는 몸을 틀어 뒤를 노려보는 성난 고양이 한 마리를 묘사한 그림이다. “명나라 상희는 고양이와 개 그림을 그렸고, 서청 등은 잠자는 고양이, 청나라 팔대산인은 엎드려 있는 고양이, 신라산인은 나비를 희롱하는 고양이, 심전은 여러 마리 고양이가 장난하는 그림을, 우리나라 변희제는 노는 고양이를 그렸으나, 아직 성난 고양이를 그린 이는 별로 없다. 고양이는 원래 사납고 날쌔며 쥐 같은 못된 것을 잡는 버릇이 있어서 시험 삼아 고양이를 그렸는데 아마 이 고양이가 한 번 크게 소리치면 세상의 모든 도둑질하는 쥐들이 다 도망칠 것이다.” 라고 적혀있다.

물고기 역시 즐겨 그린 소재인데 <간중어癎中魚>(1977)은 유속이 빠른 맑은 물에 사는 쏘가리를 그린 그림이다.“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는 난리 통에 폭풍과 파도가 바다를 뒤집네. 고래가 서로 물고 교룡이 뒤얽혀 물이 온통 피바다가 되지만 조용한 시냇물에 놀고 있는 고기는 즐겁기만 하다오.”고 쓰여있다. 옛부터 쏘가리는 쏘가리 궐(鱖)이 궁궐 궐(闕)과 발음이 같아서 ‘과거에 급제하여 대궐에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입신양명하라는 의미로 공부하는 자제의 방에 주로 걸어두었다고 한다. 쏘가리도 잉어와 마찬가지로 장원급제나 관직등용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월전에 와서는 그 민화에서 엿보이는 주술적 의미보다는 노장자적 해석이 두드러진다. 1980년에 그린 <용문 龍門>(1980)은 힘차게 솟아오르는 물고기를 그린 그림이다.“강에서 용문으로 오르는데 세월이 더디다고 탓하지 않는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과 정신세계 혹은 현재 자신이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있는 지사적 존재를 상징하기 위해 그러한 전통적 도상을 차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도상과 연관된 내용이 유지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문인이 투명하고 맑은 정신세계, 내면을 표상하는 차원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다. 또한 다분히 지식인의 현실세태를 풍자, 비판하는 맥락에서 그리기도 한다. 2-3)돌

돌은 단단하다. 단단한 것은 오래가고 잘 변하지 않는다. 백년도 못되는 인간의 목숨에 비해 수백 년을 살 수 있다. 영원을 희구하는 인간이 변치 않는 돌을 완상하면서 그 의미를 부합한다. 그래서 돌은 동양화에서 수를 뜻한다. 축을 의미하는 대나무와 그리면 <축수도>가 되는데, 장수를 축하하거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렸다. 또 돌은 단단하여 그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꾸 변하지만 돌은 원래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건드리지 않으면 혼자 움직이지도 않고 남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돌은 태초에 생겨난 데에서 그냥 그대로 있다. 그래서 돌은 정의 의미가 있다. 자연 그대로여서 천진까지 깃들여 있다. 그래서인지 월전은 불멸과 천진의 의미로 돌을 좋아하고 자주 그렸다. <수석>(1984)은 돌 하나만이 단독으로 화면 중심부로 직립한 그림이다. “만리서풍이 추위에 떨게 할 때, 작은 돌 하나를 스스로 그려 본다. 아늑한 가슴 속에 수심이 많다고 비웃지 마소. 광란을 막을 지주(砥柱)가 되긴 어렵나니.”라고 쓰고 있다. 그는 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돌이 좋아 돌을 사랑한다. 고산운수(高山雲髓)건 남포수정(南浦秀晶)이건 뭉수리 곰보 할 것 없이 그렇게 의젓하고 그렇게 고요하고 그렇게 천진스럽고 또 그렇게 소박할 수가 없다. 불멸의 생체인듯 우주이 파편인 듯 하나같이 아득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한 체 천만겁이 이끼를 머금고 말이 없다. 나는 어루만져 체온을 가늠해 본다. 싸늘한 몸속에 기가 흐르는 듯 하다. 살며시 귀를 기울이면 가느다란 무슨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그래서 돌은 나의 친구다. 돌과 대하하며 살아가는 것이 즐겁다.”

2-4) 백자

월전은 백자나 청자 등 항아리 작품을 그렸는데, 꽃을 꽂는 화병으로 그리는가 하면 독자적인 주제로 그리기도 했다. 이미 1930년대부터 백자는 한국적인, 조선적인 미의 상징이자 전통문화, 문인적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소재로서 즐겨 그려졌었고 50년대를 거치면서, 또한 지금까지도 집중적으로 그려지는 소재다. <백자>(1969), (1979)를 그린 그림에는 동일한 화제가 붙어있다. “구름사이 달 같고 이슬 젖은 연꽃 같고 소복단장한 여인 같아라.”<백자와 봄꽃>(1970)이란 그림에는 “그림이 간소를 상품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象)에 간소함이지 의(意)에 간소함이 아니다. 간의 극치는 화려의 극치이다. 소(溸)는 운무를 그릴 때 고귀한 것만을 남기고 푸른 빛 검은 색 등을 거두어 물리친다. 혹자가 필획이 적은 것을 간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대개 고상한 화품은 번간(煩簡)밖에 있다. ”고 쓰여있다. 알다시피 항아리는 도가사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백자들을 보면 한 치의 기교나 색, 한 점의 문양도 없는 순백으로 남겨 비움의 미학과 동양적 여백의 미를 나타내며 어떤 작위도 털어버린 자연스러움을 표방하였다.

4-5) 식물

사군자 자체가 이미 그 식물성을 통해 그림 그리는 이의 마음과 정신, 인격을 표상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월전 작품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들인 매화, 국화, 소나무, 달 등은 6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그려져 왔다. 월전의 작품에 나타나는 소재들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가 대부분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거나, 심미적인 감정을 토로하거나, 우주의 섭리를 펼치는 데에도 자연적인 소재들은 유용하다. 월전은 그런 소재를 두루 취하되 개인적 취향의 정서와 감회를 표출하기도 하고, 고답적인 의미보다는 나름의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화의 특성상 어떤 소재로도 심회나 웅지, 예술관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월전의 작품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매화, 수선, 국화, 장미를 주로 그렸다. 매화와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이고 수선과 장미는 월전이 특별히 좋아한 꽃이라 즐겨 그렸다. 그는 사군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부터 동양사람들은 매란과 함께 국죽을 더하여 사군자라 칭호를 붙여왔다. 식물에게 인격을 부여해서 애중을 표시한 것은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이해가 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식물이 간직하고 있는 특이한 성정과 높은 격조를 실제로 접하고 보면 고인들의 유별난 대우가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매와 난은 또한 전형적인 동양의 화초라 할 수 있다. 그 정적, 단순의 미는 선(禪)의 경지를 연상시키고 수묵화와 한시의 소재로서 풍류와 멋의 정신적 정토이기도 하다.”월전은 동양화의 고유정신을 회복하고자 문인화의 핵심적인 소재인 사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기존의 수묵화와는 달리 독특한 운필과 몰골법, 그리고 색상을 가미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산뜻하게 표현한 것이 그 특징이다. 월전이 특히 자주 그렸던 꽃은 수선화다. <수선>(1979)은 뿌리가 드러난 수선을 그린 그림이다. “기화요초와 친구가 되어, 울긋불긋 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슬방울 머금은 붓은 속세 먼지를 끊고, 미인의 눈처럼 담담하게 봄날 가지 하나를 그린다. 화가의 분우기는 모두 사라져, 동니가 시선의 기풍 지닌 낙수(洛水)의 신이다. ”1990년도에 그린 <수선>은 군집을 이룬 수선화를 그렸다.
역시 유사한 화제가 적혀있다. “기화요초(신선세계의 화초)나 친구가 될까? 울긋불긋 보통 꽃과는 거리가 멀다”

1998년도에 그린 <수선>은 단촐하고 소박한 그림이다.“달 밝은 밤이슬은 찬데 구슬 같은 꽃망울 바람결에 향기 풍기네.”라고 적혀있다. 그는 수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수선은 겨울에 핀다. 빛깔은 녹색, 하양, 노랑 등이 있는데, 수선 애호가들이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것은 하양이다. 그 새하얀, 청초한 꽃 모양새가 그들이 찾는 고결함을 유감없이 표현해주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 꽃은 옛 사대부들에게도, 소녀들에게도, 동양사람에게도, 서양사람에게도 두루 사랑과 아낌을 받았고, 나르시스의 전설 같은 애절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선한 선형을 특색으로 지닌 채 수반위에 담은 이 수선도 족히 새해의 새 기분을 꽃잎에 품고 고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들이자는 이야기를 조용조용 하고 있다.”월전이 수선화를 즐겨 그린 것은 그의 절친한 화우이자 큰 영향을 받았던 근원 김용준(1904-1967)으로부터 연유한다. 1940년경에 그린 근원의 <수선화>는 당시 그가 조선회화의 계승을 통해 전통을 재인식하고 작가의 주관성과 수묵의 표현성을 강조한 조선시대 문인화에서 조선회화의 전통을 발견하려 한 그런 시도에서 나온 작품이다. 화분에 담긴 수선화를 그리고 하면 우측에 제발을 넣음으로써 시.,서.화 일치를 근간으로 한 문인화의 전통성에 주목하고자 한 그림이다.

“파도 위의 신선이 진세의 신발을 신고, 물 위에서 살랑살랑 은은한 달빛 아래 걷고 있네. 그 누가 이토록 창자를 끊을 듯 슬픈 넋을 불러내었나. 가을꽃을 심어서 한없는 시름을 부칠거나, 향기 머금은 체소(體素)라서 경성지색이요, 산반화(山礬花)는 그 아우고 매화는 그 형이네. 그저 마주하고 있으면 참으로 꽃에 뇌쇄당하여, 문을 나서며 크게 웃으니 큰 강이 가로놓였네.”라고 제발을 쓰고 있다. 월전의 매화그림은 여럿 전한다. <백매>(1978)은 어둑한 밤하늘에 매화가 은은히 피어있는 장면이다. “쇠 같은 뼈들이 돌의 창자 얼음처럼 차가운 정신”이라고 씌어 있다. <야매>(1988)는 그의 대표적인 매화그림이다. “다만 안개와 달을 그릴 뿐, 눈인지 매화인지 알 지 못한다”고 적혀있다. <매화>(1994)는 검은 먹색만으로 매화를 강직하고 소박하게 그렸다. 말년으로 갈수록 그림은 화사함이나 여운보다는 소박한 자태를 유지한다. “넉넉한 자태는 눈, 서리와 잘도 어울려서, 널 위해 맘껏 청정한 노래를 부르노라. 이와 같이 차가운 향기와 냉정한 요염 앞에, 나는 강철같은 심장을 내 놓을 수가 없구나.” 라고 쓰고 있다. 다른 <매화>(1999)에는 “맑은 그림자 내려와 달은 차고 밤은 깊고 사람은 고요하다.”고 적혀있다.

그와 함께 장미 역시 월전이 즐겨 그린 꽃이다. 장미는 ‘청춘을 오래 간직한다’는 뜻을 지녀 장춘화라고 부른다. 매달 꽃이 연이어 피므로 늙지 않는 여성처럼 청춘을 오래 누린다는 뜻으로 월계화라고도 하는데, 이는 육체적으로 젊게 살려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으로 선비들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가치와도 부합된다. 월전의 장미그림은 깔끔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세간에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얼려져있다.

7. 자연

또한 월전은 달, 태양, 눈, 운무, 비 등 정서를 반영하기에 적절한 소재를 택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달의 맑고 찬 느낌을 살려 가을의 전형적인 정서를 표현했으며, 희고 깨끗하고 고요하게 눈 내리는 풍경을 담았으며, 운무로 자연의 조화를 푸근하고 깔끔하게 그렸고, 세차게 내리는 비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 표현하기도 했다. 달을 좋아하는 월전의 성향 때문인지 배경으로 달이 많이 등장한다. 맑고 깨끗하며 찬 기운의 달을 좋아해서 즐겨 그렸던 월전은 그러한 성향에 따라 같은 심성을 지닌 폭포와 강, 바다 또한 자주 그렸다. 수직적으로 올곧은 느낌의 폭포와 곡선으로 유유히 흐르며 이어지는 강, 수평선의 드넓은 바다는 서정적인 풍경인 동시에 월전이 닮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고 전한다. 자연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와 이상을 내포하고 심상을 펼쳐 보인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월전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반영한 것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추구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자연에 대한 주제에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이입시키고 자신의 감회를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표출한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월전은 자연을 관찰하면서 스스로 느낀 초자연적인 힘을 작품화하여 인간의 근본적인 오만함을 일깨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유발하게 하려는 작품들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연을 그린 그림 대부분 역시 그 같은 자연의 덕목을 본받고자 했던 사대부문인들의 정신세계와 삶의 가치를 흠모하는 차원에서 그려진 그림이 주를 이룬다.

나가는 글

장우성은 정신성을 망각하고 외형으로만 표현하는 그림은 문인화가 아니며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신이고 격조라고 거듭 주장했다. 정신주의의 입장에서 남화를 옹호한 그에게 있어서 남화는 주관적인 정신성이 그 핵심이다. 해서 그의 문인화는 간결함 속에 선조가 살아있고 정신과 격조가 있는 그런 전통을 따르고자 했고 무엇보다도 화제가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그림과 화제는 모두 그가 추구하고 이상화했던 존재에 대한 연모로 가득하다. 급격한 시대적 변화와 문인이 사라진 시대,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고 문화적 정체성이 흔들리며 혼돈과 갈등이 거듭되는 과정 속에서 그가 부여잡고 의미를 부여했던 세계는 분명 문인들의 정신적 세계였다. 그는 전통사회에서 문인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를 다시 반복해서 이를 자신의 내면과 정신을 표상하는 매개로 거듭 다루었다. 따라서 그 소재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자 그가 지향하는 존재의 표상이었다. 그 존재란 결국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이었다. 그는 자신을 그 존재와 부단히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 대부분이 그러한 존재의 투사로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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