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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 시간의 봉인

박영택

시간의 봉인


박철희는 우연히 아버지의 가방에서 몇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부친의 소지품과 함께 있던 사진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다. 졸업식, 결혼식, 그리고 증명사진, 혹은 유원지에서 더러는 여행지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들이다. 그 사진 속에는 본인과 아버지, 나머지 가족들이 간혹 등장한다. 구체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그 사진들을 보면 그때가 불현듯 생각나고 여러 감정들이 밀려들 것이다. 잊혀졌던, 망각되었던 기억이 술술 풀리기도 하고 더러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은 결국 죽음이고 시간의 잔해이자 덧없는 유한함을 마구 안긴다. 조각난 기억들, 흐릿하고 퇴락한 시간의 얼룩들, 분명 존재했지만 너무 아득해서 실감이 나지 않는 어떤 순간들이 꿈처럼 몽롱하다. 마냥 뿌옇다. 순간 지난 시간, 과거가 문득 애잔해졌다. 아련하고 쓸쓸하다. 그런 감정들이 몰려다니며 가슴을 쓰라리게 문지르고 다닌다. 상처들이다. 지나간 사진들은 한결같이 상처를 안긴다. 분명 기념사진은 그 한때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보존하고자 기쁨에 들떠 찍었던 것들이지만 지나가보면 그 당시의 감정, 상황과 무관한 것이 되어 돌연 등장한다. 이렇게 박철희는 아버지의 소지품 옆에서 함께 발견한 몇 장의 지난 사진을 통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가 되었다. 마치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박철희는 사진을 통해서만 마주치게 되는 생소한 과거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오래된 사진으로부터 추출하여 확대하고 강조함으로써 현재로 이끌어 낸다. 앨범 속에서 지난 시간이 각인된, 봉인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였고 그 한 장의 사진은 비로소 그의 기억을 회생시킨다. 해서 사진을 단서삼아 아득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때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은 생생한 현재 시제로 살아난다. 따라서 사진은 죽은 시간과 장면을 보여주는데 머물지 않고 지난 시간을 현재의 시간의 문맥 위에 맥박 치게 만든다. 사진 속에는 익숙한 얼굴, 그러나 지금의 얼굴은 아닌 과거의 얼굴이 들어있다. 희한한 얼굴이다. 사실 사람의 얼굴은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시간이 한 얼굴 속에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삶을 사는 동안 소모된 것 이상의 시간이 잔뜩 들어있다. 생각해보면 사진이란 모두 ‘죽어버린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허구화된 현재이며, 부재의 증거이기도 하다. 아울러 사진 속에서 잘려져 있는 시간의 한 부분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다. 영원한 침묵 속에 봉인되어 있다. 그 속에 우리가, 세계가 함께 공존해 있던 순간만이 기억되어 있으며, 모든 사물이 소멸되어도 사진에서는 그때의 현실이 불변한 채 남아있게 된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시각화시킨 하나의 또 다른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사진을 보면서 실재하는 대상, 세계를 연상하고 동일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한 순간, 어느 특정 시간의 편린일 뿐이다. 사진 속에 들어온 대상이 실재 대상은 아니다. 이미 그 대상은 사라지고 변화를 거듭해나갔을 것이다. 박철희는 유년시절의 기념사진을 모았다. 그리고 확대한 후에 그 사진을 파라핀 틀 속에 봉인해버렸다. 순간 사진은 불투명한 틀 속에 잠겨 온통 희뿌연하다. 더욱이 파라핀으로 감싼 그 표면에 주름을 잡고 굴절을 일으켜 표면의 투명성을 의도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그것은 과거의 기념사진이 결국 상처임을 보여주려는 친절한 배려이나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그것은 사진의 재현적 능력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몽상하고 상상하게 하는 한편 우리의 기억이 결국 그렇게 불투명하고 흐릿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전략에 해당한다. 혹은 지난 시간을 온전히 굳히고 박제화시켜 사진이 결국 그런 일을 감행하는 도구임을 폭로시킨다. 파라핀으로 감싸버린 사진/가족사진은 어렴풋하게나마 모종의 흔적을 안긴다. 사진 속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고 모든 세부는 다 지워져버렸다. 가족구성원이 결속과 사랑과 믿음은 지워져간다. 아울러 이 사진연출은 망막을 의도적으로 무력화시키거나 불필요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연출은 지난 시간을 더욱 애매하고 아련한 것으로 굳혀버리는 좀 가학적인 제스처로도 다가온다. 순간 그 증명사진, 기념사진은 본연의 역할을 마감하고 증발해버리기 직전이다. 작가는 파라핀으로 봉인해버린 기념사진을 좌대/선반에 올려놓았다. 그 사진은 벽이 아닌 공간에 자립한다. 공간에 설치되었다. 그것은 마치 비석과도 같다. 그는 “과거의 이미지를 파라핀 속에 넣어 흐리게 함으로써 죽어있는 기억에 대하여 일종의 추모이자 기념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있는 정서적 환기력에 주목하는 이 작가는 사진의 미학을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에서 찾는다. 죽어버린 시간을 불러일으키는 심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기형화된 과거의 추억을 이상한 기념사진, 모호한 틀로 이중으로 봉인해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순간 사진이 본질적으로 심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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